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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KE Jan 22. 2019

디자이너 관점으로 본 영화 ‘말모이’

주말에 영화 말모이를 봤다. 간략하게 소감을 말하자면, 자극적이지 않지만 담백하고 의미 있는 영화였다. 영화 제목인 ‘말모이’는 ‘말을 모은 것’이라 하여 ‘사전’을 우리말로 다듬은 토박이말이다. 영화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일본을 피해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는 조선어 학회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존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에 비해 소재가 신선했고, 세상을 바꾸려는 다른 시각의 노력을 부각한 점에서 참신하다 느꼈다.

영화를 보면서 ‘말모이’를 편찬하는 과정이 내가 생각하던 ‘디자인 프로세스’와 많이 닮아있어 꽤 흥미로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말모이 프로젝트는 명확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었고 문제의식 과정 > 프로젝트의 목적 확립 > 정보 수집 > 데이터 분석 > 사용성 테스트 > 제작이라는 큰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영화 주제나 내용보다 디자이너 관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어 학회 구성원들에게 배울만한 점들을 몇 가지 적어보려 한다. 다소 주관적이고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


1. Why? 에서 시작한다.

얼마 전까지 ebay 디자인 수장이었던 Dave Lippman은 모든 프로젝트는 ‘why?’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늘 ‘Why?’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왜 필요하지?", "왜 우리 팀에서 굳이 내가 진행해야 하지?", "이 프로젝트는 나에게 / 내 동료에게 / 내 가족에게 / 내 상사에게 / 회사에 / 사용자에게 / 경쟁업체에 / 우리나라… 에 어떤 의미가 있지?", "만약 진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프로젝트를 마친다면 어떤 것들이 달라지지?" 등으로 말이다. 극 중 류정환을 비롯한 조선어 학회 구성원은 명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왜 이 일(우리말 사전 편찬)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목적이 확고했다. 스스로가 가진 프로젝트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에 조직 구성원들을 쉽게 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고, 결국 새로 팀에 합류한 까막눈 김판수까지도 그 목적과 당위성에 공감하게된다.


2. 용어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프로젝트에 사용될 주요 용어를 새로 정의하고 각 협업 조직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의미 혼선이 없도록 말을 통일하는 것이다. ‘다 비슷비슷한 단어이고 비슷비슷한 뜻인데 서로 의미만 통하고 의사소통만 잘 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성원 간 100% 일치하지 않은 의미를 가진 단어 사용은 명확한 의사소통을 흐리고 이후 검색이나 자료 정리에 있어 데이터로서 가치를 없앤다. 예를들어 편집자가 생각하는 편집과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편집은 같은 개념이지만 미묘하게 다를 수 있고 흔하게 사용되는 브랜드라는 단어 역시 마케팅 조직에서 이해하는 개념과 프로덕트 조직에서 이해하는 개념, 운영 조직에서 이해하는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 아직 정확하게 정의 되어있지 않은 단어라면 더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해 사용할 필요가 있고, 일반적으로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쉬운 단어라도 프로젝트를 위해 따로 정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3. 가급적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소통한다.

전국 사투리를 모아 공청회를 여는 장면에서 정환은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애를 먹는다. 의미 차이를 어렵게 설명하는 정환을 답답해하며 까막눈 판수는 분필가루와 의자를 활용한 쉬운 설명으로 공청회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 실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다. 전문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하며 스스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포장한다. 사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려운 이야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쉽게 풀어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쉬운 말로 소통을 하면 서로가 원하는 방향을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고 각 조직 간 입장 차이를 줄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부가적으로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한다.


4. 만드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쓰는 사람 위주다.

영화 내내 조선어 학회 구성원들은 말모이를 쓰게 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만드는 사람의 관점, 개인적인 이익보다 보다 사용자의 사용성에 더 집중한다. 공청회 일정상 사전에서 사투리는 빼는 게 어떻겠냐는 주변의 우려를 뒤로하고 각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을 찾아다니고,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용성 테스트를 하며 여러 사용자의 의견들을 귀담아듣는다. 그로 인해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더디게 흘러가더라도 말이다. 각 지역의 사투리를 우편으로 취합하면서 말모이는 결국 사용자 참여형 프로젝트로 바뀐다.  


5. 함께 일하는 동료를 신뢰한다. 

조선어 학회 구성원은 개인의 이익보다 프로젝트 전체의 방향을 위해 힘쓰고 서로 신뢰로 뭉쳐있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명확한 프로젝트 목표 설정과 조직의 가고자 하는 방향성에 관한 의견 차이가 적을수록 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일할 동료를 선택할 때 실력, 업무 능력만 보지 않는다. 조직의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큰 비전과 뜻이 같은 성향의 사람인지 아닌지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코드, 기준, 방향성, 목표와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맞으면 서로 간 신뢰와 믿음이 쌓이고 순탄하게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 신뢰가 있어야 나의 일을 나눌 수 있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이 크다.


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백업'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던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자료 보관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다른 디자이너들도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역에서 중요한 원고가 든 가방을 소매치기당하고, 일본 순사가 들이닥쳐 10년간 수집한 원고를 모두 빼앗아 가는 장면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결과적으론 우체부 직원들이 자료들을 파기하지 않고 모아 두고, 조 선생이 원고를 일일이 손으로 기록해 따로 보관해둔 백업 자료 덕분에 무사히 사전을 편찬할 수 있었다.


짧막하게 나열했지만 모든 항목이 디자인을 대하는 기본 태도와 관련있다. 아마 디자인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디자이너들이여 나중에 후회 말고 Ctrl+S를 생활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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