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의미 사이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실험
타이포그라피학회 기획전 포스터 디자인(2013). 최소한의 조건에서 텍스트와 의미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실험으로 35명의 디자이너에게(전체 문장을 숨긴 채) 어떤 문장을 구성하는 한 단어씩을 무작위로 배포한 후 그 단어 혹은 단어가 가진 의미로 자유롭게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다. 아마도 디자이너들은 앞, 뒤 문장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단어만으로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 더 열린 사고가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작품이 공간에 전시되는 순서가 전체 문장을 단어의 순서와 같았기 때문에 오롯이 텍스트 자체가 전체 문장의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내가 받은 단어는 ‘가장’이었다. (나는 개전식에서야 그 단어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발췌한 한 문장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가장은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하는 ‘가장’과 한 가정을 이끄는 사람을 뜻하는 ‘가장’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를 반어적이고 위트 있게 쓸 수 있는 단어를 고민하다 ‘가장자리’를 떠올렸다. 가장자리는 일반적으로 외진, 구석자리를 뜻한다. 가장자리는 중심, 핵심이 되는 자리가 아니다. ‘가장’이란 여럿 중 제일을 의미하는 부사지만 가장자리는 역설적으로 소외된 곳을 의미한다. 디자인을 할 때에도 상대적으로 시선을 끄는 면적이 아니다. 가장家長의 자리 역시 한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외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중의적이고 역설적인 의미를 표현하고자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한 구절을 발췌해 간단한 규칙이 적용된 암호를 만들었다.
포스터에 적힌 의미 그대로 가장자리(구석)부터 빙 돌려가며 글자를 읽으면 아래 문장이 읽히도록 설계했다.
“나는 내가 마지막 눈을 감는 날의 일도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만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그들 시대의 성격을 가졌다. 나의 몸은 아버지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나는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발췌
실제로 전시에 사용한 포스터는 ‘문드림’이라는 특수지를 사용해 전면 형압(누르는) 가공으로 작업했다. 부분적인 실크 인쇄를 빼곤 별도로 인쇄 작업은 하지 않았다.
판화지 질감을 가진 ‘문드림’은 열을 받으면 용지가 반투명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제작된 포스터는 멀리서 보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 흰 눈밭이 연상되고 가까이서 봐야만 뒤가 살짝 비치는 반투명한 글자를 볼 수 있다. 가장자리(구석자리)와 가장자리(아버지의 자리)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나와 가까워져야 그제야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소외감을 느끼고, 그 소외감은 보이지 않는 불안감을 만든다. 나부터 먼저 ‘가장자리’를 살피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