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으로 불편한 경험 설계하기
경험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생각과 견해를 담은 글입니다.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것'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을 브런치에 올리고 나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주로 “그럼 경험 디자인이라는 것은 사용자를 배려해 친절하게, 사용하기 편하게 만드는 것인가요?”라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멋진 경험' = '좋은 사용성'이라는 논리인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 기준에선 편하고 좋은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 경험디자인은 아니다. 좋고, 나쁨보다 내가 의도한 대로 사용자가 경험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설계하는 쪽에 더 가깝다. 브랜드의 좋은 면만을 고객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브랜드가 가진 철학과 가치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프로젝트 목적과 주 타겟의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를 위한 브랜드가 있기도 하고 단 몇 명 만을 위한 브랜드도 있다. 다수를 위해 친절하게 만들기 도하지만 때로는 의도적으로 불편하고 복잡하게 경험을 설계하기도 한다. 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의도적으로 불편한 경험을 설계했던 프로젝트가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하려 한다.
타임북이란?
타임북은 1900년대 초반 미국 철도원이나 광부 등이 근무시간을 적었던 작은 공책을 가리킨다. 작업자들은 작업시간과 함께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 자신의 생각을 가볍게 기록하여 보관했다. <타임북 14>는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네이버에서 진행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모은 책이다. 단순히 결과물을 엮는 기존 연감과 달리 네이버 디자인 철학과 태도, 작업자의 고민과 흔적을 더해 스토리북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단 500권만 소량 제작해 프로젝트를 진행한 디자이너들에게만 배포했다.
제작 프로세스
네이버는 모바일과 웹을 기반으로 한 IT기업이지만 네이버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글꼴을 만들어서 나누기도 했고 영세한 소규모 점포를 위해 한글 간판을 제작해 지원하기도 했다. 웹사이트나 모바일 UI를 비롯해 제품, 영상, 공간 등 온.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프로젝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우선 네이버에서 2013년 진행된 모든 프로젝트를 꼼꼼히 살피고 작업자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한 달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로젝트 선정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균형'이었다. 팀마다 성격이 달라 프로젝트를 중심적으로 이끄는 팀이 있고, 프로젝트에 필요한 요소를 뒷받침해주는 팀도 있었다. 일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에 대한 생각과 수고는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느 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프로젝트 우선순위가 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모두가 네이버라는 서비스, 기업, 브랜드를 이끄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 시간순으로 페이지를 구성해 한 권의 책에서 1년의 시간 흐름이 느껴지도록 했다.
콘셉트
인터뷰 내용과 취합한 이미지 자료를 모아놓고 보니, 괜찮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대부분 결과와 과정을 모두 중시하는 디자이너들이라 프로젝트 중간중간 꼼꼼하게 생각들을 기록하고 이미지를 남겼다. 이런 날것의 과정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멋지게 아웃풋 이미지만을 묶어 이미지북으로 구성하기엔 작업자의 고민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쉬웠고, 완성된 이미지 위에 294명 작업자들의 이야기를 담기에 책의 톤을 하나로 맞추기 어려웠다. 근사하게 프로젝트 결과물을 촬영해 일반적인 연감처럼 만들기보다 디자이너들이 제공한 raw 한 자료에 집중하기로 했다. 프로젝트의 아웃풋을 담은 책과 프로젝트 과정을 담은, 완전하게 다른 콘셉트의 책 두 권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정제된 프로젝트 결과물 이미지만으로 Work book을 구성하고 작업자의 고민과 흔적, 작업이 디벨롭되는 과정을 묶어 Story book을 만들었다.
Work book은 최대한 인공적으로 가공된 느낌의 이미지를 담았다. Story book은 Work book과 완전히 반대 콘셉트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이미지들을 극대화하고 싶었다. 인터뷰 내용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들어가기도 하고, 작업자의 생각을 짧은 문구로 넣기도 했다. 이미지는 최대한 raw 하고 natural 하게 사용했다. 내지 디자인은 폰트를 지정한 것 말고는 그리드, 여백, 이미지 크기, 폰트 크기 등에 별도 규칙을 두지 않았다. 최대한 날것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다. 종이 역시 Work book은 깔끔하게 코팅이 된 젠틀페이스를 Story book은 러프한 신문용지를 사용했다. 또한 Story book에 사용한 사진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했고 Story book에 사용한 이미지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 두 책의 대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한 권으로 연결되어 책을 펼치면 마주 보는 구조를 취한다. 이는 프로젝트와 진행 과정에 숨은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4페이지의 이야기가 양쪽으로 펼쳐진다. 책의 중앙에는 한그루의 나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조금씩 자란다. 매일 한강에서 같은 나무를 찍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던 표기식 작가님을 사진을 사용했다. 시간성을 가지고 조금씩 변하는 나무의 이미지는 책의 콘셉트를 끌고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의도적인 불편함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모두를 위한 책은 아니다. 심지어 책 표지에 'It's not for everyone'이라고 표기를 했을 정도다. ‘아무나' 볼 수 있는 책이 아니고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언제고 생각이 날 때 찾아서 볼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때문에 타임북은 대중적이거나 친절하지 않다. 의도적으로 몇몇 부분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도록 불편한 장치와 경험들을 설계했다.
슬리브
두 권을 싸고 있는 책 슬리브는 슬라이딩 방식이다. 슬리브를 뜯거나 쉽게 꺼낼 수 있는 장치가 없고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위고 아래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크기도 커서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뭔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슬리브 옆으로 살짝 보이는 책 등을 길게 밀어서만 책을 꺼낼 수 있다. 슬리브와 책의 질감을 다르게 만들고 싶어 슬리브는 꺼끌꺼끌한 거친 느낌의 큐리어스메터를 사용했고 책 커버는 습하고 보들보들한 큐리어스스킨을 사용했다. 서로 다른 질감의 종이가 만나 만드는 강한 장력이 책을 꺼내기 굉장히 불편하게 만든다. 꺼낸 책을 다시 슬리브에 넣는 것은 더욱 어렵다.
종이
흰색 큐리어스스킨과 큐리어스매터는 한번 손을 대면 손때가 어마어마하게 타는 특징이 있다. 아주 조심해서 섬세하게 책을 꺼내고 만지다고 해도 한번 책을 꺼내게 되면 금세 책이 더려워진다. 아마 지금도 아무런 가공 없이 이 종이를 포장이나 커버에 사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책을 꺼내거나 만지지 않더라도 종이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변색이 잘되고 내지로 사용한 신문용지 역시 지질이 약해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책을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불친절한 구조
책을 꺼내게 되면 '이 책을 어떻게 봐야 하지?' 하는 고민부터 들게 된다. 친절한 설명이나 장치가 없다. 사실 이 책은 어떻게 봐도 상관없는 구조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보든 사람에게도 일단 책이 내 앞에 있다면 어떻게 사용해도 좋다. 프로젝트 면을 가볍게 보는 것도, 조금 더 깊게 프로세스 면을 읽는 것도, 전체를 비교하면서 동시에 읽는 것도 가능하다. 펼쳐서 두 권으로 읽는 것도 중간을 반을 접어서 한 권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것이 열려있기에 오히려 "어?" 하며 시작되는 낯설음이 있다. 그 경험을 의도해 책에 대한 설명을 넣지 않았다.
디자인
이 책 내지 디자인은 다소 두서없다. Work book은 너무 디자인을 안 한 것 같은 느낌이고 Story book은 오히려 너무 과한 느낌이다. 그리드, 마진, 단 등의 디자인 규칙들을 가급적 각각 책에 맞는 방식으로 없애려고 노력했다. 전체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고 한컷 한컷을 전체 흐름에 맞게 강약과 위계를 만든 것이 전부이다.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영상을 본다’라는 개념으로 디자인했다.
이미지
기획 이후 디자인된 책이 아니라 자료의 취합 이후 기획된 책이라 책의 전체 콘셉과 흐름을 이끌고 가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나는 프로젝트와 크게 상관없는 재미있고 엉뚱한 이미지들을 흐름 안에 중간중간 넣었다. 논리적이지 않고 극히 주관적인 해석의 이미지들이라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같은 의미로 해석을 한 사람들은 공감을 할 테고,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한 사람들도 좋다. 어? 이게 뭐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두를 위한 책은 아니니까. 예를 들면 ‘UXDP포스터는 레이어가 겹치는 콘셉트니까 여러 송이가 겹쳐있는 들꽃의 사진을 사용하자’식의 의식의 흐름이었다. 콘셉트를 표기식 작가님께 설명했고 작가님은 흔쾌히 믿고 맡길 테니 알아서 사용하라고 그동안 촬영했던 데이터가 담긴 외장하드를 통째로 주셨다. 인공적으로 의도한 사진과 인공적이지 않게 의도한 이미지가 충돌하는 느낌을 담고 싶었다.
제작
책 제작 단계에서 많은 부분을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책 커버는 때가 타는 이유로 기계에 태우기 어려웠고 포장을 하면서 손때가 묻어 생기는 파본들도 상당했다. 기계로 재단이 어려운 가공들은 모두 직접 손으로 잘랐다. 서로 다른 종이 평량을 사용해 두 권의 책 두께를 같게 맞추는 작업도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콘텐츠에 집중해 디자인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디자인이 좋은 북디자인라고 정의한다면, 이 책은 좋은 북디자인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은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책을 만든 나 조차도 딱 한 권 가지고 있을 뿐이고 때가 탈까 꺼내보기 두렵다. 보라고 만든 책이지만 한편으론 보지 말라고 만들기도 했다. 얼마 전 Off-White 레인코트 가격표를 보고 ‘과연 이걸 내가 비 오는 날 입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적이 있다. 잘 알다시피 슈프림에서 판매하는 벽돌, 샤넬에서 만드는 부메랑, 최근 화제가 된 루이뷔통 젠가 등은 제품의 기능이나 사용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아니다. '우리 브랜드 가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거야' 식의 도도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불편한 사람에게 왠지 모르게 끌리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불쾌한 영화를 찾아보기도 한다. 때로는 불편하게 설계된 사인시스템과 동선이 공간의 매출을 올리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나에게 불편한 경험을 주었다고 해서 정말 잘못 설계된 경험디자인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 경험은 의도적인, 전략적인 불편함은 아니었을까?
에도 간간히 작업물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