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업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AKE Jan 12. 2020

관찰을 통해 발견한 직관적인 디자인

감각적인 디자인 vs 논리적인 디자인


JOH(현 카카오IX)에서 일을 할 때, 내가 쓰던 모니터 앞엔 커다란 시멘트 벽돌로 된 벽이 있었다. 회의공간과 업무공간을 분리하는 일종의 파티션 역할을 하는 벽이었다. 그 벽엔 딱 내 눈높이에 a4 2장 정도 크기 창이 뚫려있었다.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다 보면 작은 창 너머로 맞은편 대표님 방이 보였다. 그 방은 흰색 작은 큐브 구조의 독립된 입방체로 독특한 구조였다. 사람들이 자주 오고가는 통로에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대표님 방 바깥쪽 벽면을 게시판처럼 활용했다. 벽에는 메모나 게시물 부착이 가능하도록 늘 짧고 긴 형태의 자석과 작은 자석이 달려있는 연필 여러 자루가 붙어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게시판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게시판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깐 멍하게 서서 이리저리 길고 짧은 자석을 돌려가며 자신들만의 조형을 만들었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에디터나 같이 근무했던 셰프들까지도 직급에 상관없이, 외부 손님이나 사무실에 잠깐 놀러 온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 벽 앞에서 잠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유심히 그 행동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결과는 꽤 재미있었다. 아마 같은 재료를 주고 의식적으로 조형을 만들라고 했다면 점과 선 사이 간격이나 각도, 혹은 빈 공간의 비례감 같은 것들을 고심하며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순간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한 조형의 결과물은 조금 더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일로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이유 있는 디자인, 관계, 맥락, 논리, 분석, 데이터 등 다소 딱딱하고 이성적인 내용들을 고민하다 보면, 가끔은 일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한 명의 창작자로서 논리, 이성적인 것들을 덜어낸 작업을 동경하고 순수하게 본능적이고 감각(직관)에 의존한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찌 보면 짧은 순간 목적 없이 발생한 이런 행동과 행동의 결과가 순수한 직관에 의한 조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것들을 한데 모아 포스터로 만들었다.


포스터를 만들고 나니 그 의도치 않은 자유로운 느낌들이 사라졌다. 아마도 이것들을 취합하며 본의 아니게 내가 가지고 있던 규칙이나 버릇들이 디자인 결과에 반영이 된 것 같다. 대가들은 점을 하나 찍거나 선을 하나 그어도 그것이 예술이고 작품이 된다는 말이 있다. 굉장히 정교한 위치에 순수한 감각에만 의존해 점을 하나 찍는 것은 고도의 내공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수한 직관의 표현은 굉장히 어렵다. 내가 접한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들 대부분은 본인들의 의도와 크게 관계없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드와 규칙이 존재하는 듯했고 그것을 깨는 것을 꽤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자유롭게 사진을 찍어도 알게 모르게 그리드, 황금비율, 등의 조형을 무의식 중에 맞추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명색이 디자이너인데 디자인적인 감각과 심미적인 아트워크, 내 작업이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간혹 받는다. 물론 예술적인, 소위 작업물을 간지 나게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브랜드 경험 디자인 분야에선 멋진 작업을 하기 위한 클라이언트와 사용자 설득의 밑 작업으로 논리, 맥락, 이유 등이 필요하고, 그것이 선행된 이후 감각적으로 디자인적인 완성도를 올리거나 디테일한 마감을 하는 것들은 디자이너의 기본적인 소양과 태도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후자를 먼저 고민하거나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에 디자인을 하게 되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어렵고 함께 일하는 협업 부서 사이 섬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프로젝트냐에 따라 예술적인, 시각적인 감각이 전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험 디자이너의 일로서 크리에이티브와 개인 창작자의 예술로서 디자인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론 너무 주관적인 실험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이 재미있었고 요즘 업무적으로 맥락, 논리, 이유 있는 디자인의 틀 안에서 답답함을 느껴 잠시 예전의 기억을 꺼냈다.



instagram.com/kiwa_archive

behance.net/kiwa_work

choikiwoong.net

에도 아주 가끔씩 작업을 올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젝트]네이버 디자이너 294명의 시간을 모은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