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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KE Oct 02. 2019

나는.지금.멜버른.에 있다

성공과 실패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나는 지금 멜버른에 있다. 별로 관심 있었던 도시가 아니라 내 평생 한번 갈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너무 싼 비행기표가 있어서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구매했다. 대신 중국 남방항공을 이용해 광저우에서 경유를 하고, 시드니 공항에 내려 국내선을 갈아타고 멜버른으로 들어가야 했다. 경유 시간이 너무 타이트해서 동선이 꼬이거나 비행기가 연기되는 등 예상치 못한 문제가 조금이라도 발생하면 다음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정이었다.

멜버른으로 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환승시간은 딱 90분이었다. 빠듯하지만, 제시간에 도착해서 빠르게 짐을 찾고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비행기를 예약한 후, 국제선과 국내선 터미널이 멀어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버스 배차간격은 15분이었다. 결론적으로 모든 상황이 완벽하더라도 터미널을 이동하는 버스 시간이 꼬이면 90분 중 귀한 30분을 낭비해야 하는 것이다. 예매한 표는 환불이 불가한 티켓이라 일단 도전해보고, 비행기를 놓치면 시드니 공항에서 다른 항공편을 알아보자고 결정했다.

우리는 틈틈이 인터넷으로 공항 이미지를 검색해보고 머릿속으로 계속 환승 동선을 시뮬레이션했다. 출구로 나와서 몇 번 게이트 오른쪽, 20미터 직진 맥도널드...

관건은 캐리어가 얼마나 빨리 나오느냐에 달려있었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바로 눈에 띈 자동입국심사 기계로 입국 수속을 빠르게 마쳤다.

내 캐리어는 인천 공항에서 수화물 우선 서비스 스티커를 붙여 빠르게 나왔지만, 와이프의 짐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먼저 나가서 길을 찾아놓으라는 말에 다급하게 먼저 뛰쳐나갔다. 공항 출구도 줄이 길었다. 나는 서둘러 나와 시뮬레이션 한 대로 버스를 타는 곳을 찾았다. 이때 남은 시간이 16분(두둥). 멀리서 뛰어오며 버스를 빨리 타라고 소리치는 와이프가 보였고, 아주 잠깐 멈칫하는 사이 옆에 있던 버스 출입문이 닫혔다. 애처롭게 문을 두드렸지만 기사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출발했다. 이 버스를 타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었고 단 몇 초 사이에 희망이 깨졌다.

우리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다음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비행기를 알아보려는 순간, 다행히도 우리가 타려 했던 멜버른 가는 비행기가 연기가 되어 간신히 수속을 할 수 있었다. 순간의 선택, 찰나의 시간으로 웃고 웃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우리 삶은 알 수 없이 흘러간다. 될 것 같았던 일이 실패하기도 하고, 노력을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의도치 않은 성공을 하기도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좋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 계속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멜버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안상수 선생님이 독일에서 큰 상을 받게 되어 한 달간 선생님 연구실 조교들과 같이 독일에 머문적이있다. 라이프치히시에서 경비 지원을 받아 바우하우스, 구텐베르크 박물관 등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관련된 유산들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다. 선생님과 연구실 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가 관련 책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을 것 같지만 선생님과 일면식 없이 깍두기같이 부담 없이 투어에 합류한 나에겐 값지고 귀한 여행이었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 조교 중 한 명이 멜버른을 다녀와서 이 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자리 공석이 생겼고, 공개 모집을 통해 당시 디자인도 잘 모르고 선생님과 연구실, 아무 연이 없던 내가 운이 좋게도 그 투어를 함께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날개집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 디자인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디자인을 포기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시기라 더욱 의미 깊다.

아마 그 조교에게 멜버른 일정이 없었다면 내가 날개집 식구들과 독일 투어를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고, 디자인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다른 일을 하며 지금보다 더 즐겁게 지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예측하기 어렵고 알 수 없기 때문에 여행도, 일도, 우리 삶도 더 의미 있고 즐겁다.

나는 지금 그 멜버른에 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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