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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KE Dec 17. 2019

한국에서 브랜드 경험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2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 이야기

원티드에서 주최하고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진행한 '크리에이티브 토크'에 참여했습니다. 프로젝트 리뷰나 실무적이고 실질적인 이야기보다 한국에서 평범하게 디자인을 하면서 느꼈던 솔직한 고민들을 꺼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발표 내용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아 공유 가능한 범위 안에서 브런치에 정리하려 합니다. 혹시라도 필요하셨던 분들이 있다면, 작게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여러 개로 나누어 공유합니다. #1에 이은 두 번째 내용입니다. 


#1 - Point of View : 관점에 관한 이야기

https://brunch.co.kr/@choikiwoong/35

#2 - Context : 맥락에 관한 이야기

#3 - Attitude : 태도에 관한 이야기 





2 - Context


관점과 함께 브랜드 경험을 설계하는 또 다른 핵심은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앞과 뒤, 전체와 부분, 사용자와 생산자, 어제와 오늘, 회사와 나 등 관계와 위계를 살펴 맥락을 이해하고 지금 설계한 경험이 맞는 경험인지 아닌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래 '블루보틀' 카페에 어울리는 컵을 하나 준비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컵을 골라야 할까요? 유명한 브랜드의 컵? 혹은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컵? 사용성이 좋은? 유명한 작가가 만든 컵? 공간 경험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이 컵은 여러 가지 요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메뉴판과 관계, 인테리어 자재와 관계, 커피 맛/향과 관계, 음악, 온도, 무드, 직원들의 태도, 조명,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손님들, 소음, 심지어 그날의 날씨나 그 순간의 내 기분 등을 포함해 여러 가지 요소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소품 하나를 중심으로 플로우 차트를 만들거나 페이지네이션을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맥락 안에서 우리는 커피를 구매하고, 마시고 그 모든 설계된 총체적인 경험을 소비합니다.



Univers Font System


(다들 익숙하시겠지만)아래 이미지는 유니버스 글꼴의 홀리스틱 뷰 입니다. 제가 이 표를 접했을 당시는 안선생님 연구실에서 일을 했을 때라, 저는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이 도표를 봤습니다. 한동안 이 도표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시간이 지나, 관점을 바꿔 브랜드 경험 디자인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도 이 표가 어떤 기준이 되는 정석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표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 부분과 부분의 관계, 앞과 뒤...등의 맥락 안에서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맥락과 해석 안에서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맞고 틀림만 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관의 영역에서 객관적인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데 이만한 예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Brand Architecture


브랜드 아키텍처를 만들 때도 맥락을 고려합니다. 네이버 서비스의 아키텍처를 예시로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제가 이 작업을 하지 않아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 경쟁사와의 관계, 사용자와의 관계 등을 따져서 각각 또는 전체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경험을 설계하고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단편적으로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이런 맥락 안에서 우리는 서비스를 만들고, 공간을 만들고, 제품을 만듭니다.



NAVER Corporation Stationary Set


네이버에 처음 입사했을 때, 저는 입사하자마자 기업 스테이셔너리 세트를 만드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CX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라 이 작업은 보통 기업과 서비스 이해도가 높은 디자이너가 맡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저는 입사 초기라 의욕이 매우 넘쳤고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그동안 실무를 경험하며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과 가공을 욕심 껏 다 해보려했습니다.


이 시기는 네이버가 당시 사용하던 nhn에서 처음 사용했던 서비스명인 네이버로 사명을 다시 바꾸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저는 다시 본질,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백/Back/’이라는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디자인을 하지 않는 디자인을 모토로 환경과 인간 모두를 위해 최소한의 디자인, 최소한의 공정으로 다이어리 기획하고 만들었습니다. 대신 재료가 가진 고유의 물성과 감성, 제품의 본질적인 사용성을 차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더하자면,


지기 Package Structure

세트는 다이어리, 노트, 메모패드로 구성되고 스테이셔너리 케이스는 옆면을 뜯어 반대쪽으로 접으면 쉽게 탁상용 캘린더로 재 사용할 수 있는 지기로 만들었습니다. 슬리브 형태의 패킹이라 구성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사이즈의 미세한 디테일과 구성품 간 마찰력을 만들어내는 테스트를 수차례 진행해서 자연스러운 언팩킹 경험을 유도했습니다.


재질 Quality of the Material

슬리브 케이스, 다이어리와 노트 커버에 프리터라는 수입지를 사용했습니다. 프리터는 손끝만 스쳐도 때가 타는 종이라 일반적으로 커버 쪽에 잘 사용하지 않는 종이입니다. 내지는 친환경을 고려해 재생지와 비목재 펄프인 돌종이를 어렵게 수소문해 사용했습니다. 캘린더 커버는 열가공을 하면 투명해지는 문드림을, 캘린더 내지는 속이 비치고 잘 바스러지는 노루지를 미싱 제본으로 묶었습니다. 모두 가격이 비싸고 사용성이 떨어져 일반적으로 기성품에 사용하기 힘든 재료입니다. 다이어리 커버로 사용한 PVC 원단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직접 제작했고 마음에 드는 가름 끈과 제본 마감 밴드를 찾기 위해 여러 나라를 수소문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가공 Manufacturing

코팅 후가공과 스프링을 없애고 실로 제본했습니다. 꼭 필요한 부분에만 에코폰트를 사용해 콩기름으로 인쇄를 했습니다. 색상을 모두 빼서 휴일 표시도 흑백이고 네이버를 상징하는 그린 컬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캘린더와 노트에 디테일을 더하고 싶어서 낱장 2mm 간격으로 계단 형태의 층을 만들었습니다. 한 메모패드에 여러 질감 종이를 섞고 선의 색을 원하는 정도에 맞추기 위해, 최적의 펼침 정도를 만들기 위한 교정과 테스트도 수없이 진행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네이버 글꼴을 썼고 의미를 잘 담았고 디테일한 가공과 사용성 측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으니 저 나름대로는 이만하면 훌륭한 디자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외국에서 상도 많이 받았고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생각해보니 패키지나 스테이셔너리 디자인 관점에선 괜찮은 디자인일 순 있지만, 브랜드 경험 디자인 관점과 맥락에선 다소 아쉬운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제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것처럼 콘셉트와 사용성에서 좋은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했지만, 그간 네이버가 만들었던 다이어리의 히스토리와 기업과 서비스 맥락 안에서 제가 만든 디자인은 너무 따로 노는 느낌이었습니다. 무드도 다르고 네이버라는 공간과 서비스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벨류 포인트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기업 이념을 살려 환경을 생각한다곤 했지만 비싼 재료를 썼고 대부분 수작업이라 비용과 사람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갔으니 큰 맥락에서 친환경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Gmarket Brand Identity Renewal


이베이에서 지마켓 아이덴티티를 개편했을 땐 큰 맥락과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을 고민했습니다. 큰, 오래된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바꾸는 일은 온오프라인에서 큰 비용과 리소스가 들어가는 작업이라 쉽게 의사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브랜드 히스토리를 꼼꼼하게 살피고 시장 상황과 경쟁사가 집중하고 있는 것, 앞으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들에 관한 맥락을 살펴 왜 브랜드 아이덴티티 개편이 필요한지를 고객과, 생산자, 판매자 등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해 유관부서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 핵심 가치를 전달하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도록 기업 문화와 공간을 바꾸는 일을 병행했습니다. 꽤 긴 설득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 최근 아래와 같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리뉴얼했습니다.


#3 - Attitude : 태도 관한 이야기로 계속 >



별 것 아닌 내용일 수 있지만, 오랜 시간 경험하고 고민한 내용이라 퍼가실 때 출처를 남겨주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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