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하반기에 접어들자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각 나라의 국경봉쇄가 조금씩 풀리면서 드디어 필리핀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발매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필리핀에 들어가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가는 짐을 쌌다. 2년여라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처음에 올 때보다 짐이 어마어마하게 늘어서 차에 다 실을 수가 없어 일부는 택배로 포장해서 보내기로 했다.
11월 10일에 아들이 차를 가져와서 짐을 싣고 춘천으로 오는데 참 감회가 새로웠다. 생면부지의 강릉이란 곳에 와서 난생처음 해보는 모텔 청소일을 무사히 해낸 자신이 뿌듯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릉 경포 S모텔에서 2020년 9월부터 2022년 11월까지 2년 3개월간의 첫 모텔 청소일이 마무리되었다.
처음 생각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강릉에서 머물면서 정이 참 많이 들었다. 차가 없으니 주로 걸어 다니거나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이 또한 기억에 남는 멋진 경험이다. 나중에는 시티버스(Sea Tea Bus)라는 마을버스 같은 교통수단을 알게 되어 자주 이용하였는데 강릉부터 주문진까지 해변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져 기가 막힌 풍경에 눈이 황홀해지곤 했다.
한여름에는 푹푹 찌는 더위에 창문 하나 없는 골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세탁물 정리를 했지만 한겨울에는 뜨끈뜨끈한 난방패널 위에서 사지를 노곤노곤하게 지져대곤 했다. 여름휴가철이 되면 경포해변이 피서객들로 가득 차 사랑과 낭만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며 피어나곤 했었지~ 형형색색의 수영복과 비키니를 멋지게 차려입은 청춘들이 젊음을 뽐내는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부럽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건 모텔 청소일은 참 정직한 직업이다. 내 몸으로 땀 흘려 일한 만큼만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다. 남을 속이거나 머리를 싸매고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몸만 건강하면 어디서든 일을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비록 3D 직종에 해당하는 힘든 일이어서 요즘엔 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역이 되고 있으나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은퇴 후에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릉은 어느새 제2의 고향으로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춘천에 돌아와서는 필리핀 항공티켓을 예매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된 게 아니기에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거의 3년 만에 필리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처음 갈 때처럼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드디어 2022년 11월 24일 밤에 필리핀에 도착하였다.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함께 상주하는 필리핀 매니저 부부가 그동안 잘 관리하여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만약 그동안 방치해 두었다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 완전 폐허처럼 되어있었을 텐데 역시 사람 손이 무서운 가 보다. 방 내부는 예전 그대로 잘 정리되어 있고 정원의 꽃이며 나무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서 각종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지만 철제 시설물들은 녹도 슬고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앞으로 태풍에 떨어진 간판을 새로 달아야 하고, 창문에 블라인드도 설치해야 하고, 펜스 무너진 곳도 보수해야 하고, 방마다 방충망도 손보아야 하고, 전등 조명도 바꾸어야 하고, 곳곳에 페인트도 칠해야 하는데 거의 리모델링 수준의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할 것 같다. 에휴~
[애플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우리 집 아름다운 정원]
거의 3년 만에 돌아온 필리핀은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그때처럼 낯설고 긴장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바뀐 거리 모습과 새롭게 들어선 건물들이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곳곳에 설치된 교통신호 등이 점점 발전하는 필리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착한 다음 날부터 필리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수업료(?)를 내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LPG 가스통이다. 가스레인지에 가스가 연결되어야 음식을 할 텐데 기존에 사용하던 가스통이 더 이상 생산이 안되어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틀 동안 돌아다녀봐도 파는 데가 하나도 없다. 다른 브랜드와 교환도 안된단다. 하는 수 없이 한통에 1,500페소씩 3,000페소라는 엄청난(?) 가스통 값을 더 내고 사 올 수 있었다. 당장 먹어야 하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젠장~
두 번째는 은행 ATM 기기와 관련된 일이다. 따가이따이 아얄라몰에 있는 BDO은행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카카오뱅크 체크카드를 넣었는데 에러가 나면서 도로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ATM기 주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현금인출을 위해 줄을 서있던 필리피노에게 물어보니 근처에 있는 BDO 은행에 직접 가서 신고를 하고 직원을 데려와서 기계를 열고 카드를 꺼내면 된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간단히 해결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뿔싸! 여기가 한국이 아니고 필리핀이라는 사실을 잠깐 간과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은행을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해 주고 도움을 요청하니 BDO은행 고객센터라고 하는 곳의 무료전화번호를 알려줄 테니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Reference Number를 받아서 가져오면 다시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해도 알아듣기 힘든데 전화로 영어를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전화를 걸어보니 연결이 안 되고 뚜우~ 뚜우~ 소리만 계속 들린다. 이게 뭐지? 뭐가 문제지? 짜증이 막 나는데 웬 필리핀 놈이 옆에서 뭘 사라고 자꾸 말을 건다. 이걸 확 조져버릴까? ㅋㅋㅋ
[사진출처 : Pixabay]
어쩔 수 없이 필리피노 매니저인 로이에게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잠시 후 도착한 로이가 고객센터로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상담원과 통화가 되었는데 뭐라 뭐라 한참을 씨부려대더니 결국은 해당 계좌를 닫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자기네 은행 계좌의 카드라면 바로 처리해 주는데 한국에서 발행된 인터내셔널 카드이니 먼저 계좌를 닫고 다시 연락하면 또 방법을 찾아봐주겠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이 나라의 일처리 방식은 끝도 없이 길어지고 기다리다 지치면 결국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카카오뱅크의 체크카드를 하나 날려버렸다. 빌어먹을~
세 번째는 필리핀 운전면허증 갱신 때 있었던 일이다. 면허증이 만기가 되어 갱신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일이 엄청 까다롭고 엄격해졌다고 이미 들었던 터다. 처음 면허증을 취득할 때와 마찬가지로 메디컬 테스트는 기본이고 Writing 시험과 온라인 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한단다. 이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ㅠ 기존에는 신청서만 제출하고 몇 시간 기다리면 되었는데... 또한 외국인은 가까운 LTO(한국의 도로교통공단에 해당)를 놔두고 무조건 마닐라나 처음 발급받았던 지역으로 가야 한다니 이 또한 너무 불합리한 일이다.
아무튼 이 나라의 법과 규정이 그렇게 바뀌었다니 어쩌겠는가~ 다행히도 로이가 잘 아는 따가이따이 LTO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을 통해 알아보니 그곳에서도 갱신이 가능하다고 하여 매니저 로이를 대동하고 아침 일찍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LTO에 도착해 보니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숨 쉴 틈이 없이 모여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숨이 턱 막힌다. 먼저 사무실에 들러 신청서를 받아 메디컬 테스트(혈압검사, 시력 및 청력검사, 키, 몸무게)까지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1인 450페소). 사무실 직원이 온라인 시험을 대신 치르는지 한참을 꼬물락거리더니 80%로 패스했다는 결과지를 첨부하여 준다. 이건 또 뭔 일이람 ㅋ 부정시험 아닌가?
[사진출처 : Pixabay]
이제 이 서류를 가지고 2층 시험장(Examination Room)으로 올라가 Writing 시험만 보면 된단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갔는데 먼저 들어간 나의 아내 Alda가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열린 문틈 사이로 얼핏 보인다. 문제가 생각보다 어려운가 보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무 내용이나 자신의 스토리를 영어로 쓰라는 건데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내용만 쓰다가 몇 번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어찌어찌 써서 일단 Writing은 통과되었는데 아뿔싸~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관이 대리시험으로 통과된 결과지를 보더니 인정할 수 없다며 뜯어내고 다시 시험을 치르라고 한단다. 이전에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시험을 통과했으니 당연히 눈치를 챘으리라 생각된다.
온라인으로 구글에 접속하여 시험사이트를 열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고 로그인하여 문제를 풀라고 하니 컴퓨터로 이런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Alda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쩔쩔매다가 감독관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시험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나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드디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러 명의 필리피노들은 각자 데스크톱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데, 외국인은 별도의 공간에 비치된 허름한 의자에 앉아 자신의 휴대폰으로 접속하여 문제를 풀라고 한다. 이것도 자국민 우선주의인가? 왠지 차별받는 느낌이 들어 살짝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서 Writing 시험은 어려움 없이 써냈는데 구글에 로그인을 할 수가 없다. 사무실 직원이 임의로 만든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들어갔으니 내가 그걸 어찌 알겠는가? 패스워드가 생각이 안 난다고 하니 방금 전에 시험을 통과하고 왔는데 왜 기억을 못 하냐고 추궁을 한다. 패스워드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기억을 못 하고 수첩에 적어놓았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사무실 직원이 들어와 감독관과 무슨 얘기를 한참동안 하더니 내 휴대폰으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고 로그인을 시켜주고 나갔다. 시험문제는 총 25문항이었는데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대충 가장 긴 답지를 찍으며 마지막 문항까지 풀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제출버튼을 눌렀는데 이게 웬일이야~ 72%로 통과되었다는 축하메시지가 화면에 뜨는 것이 아닌가? 역쒸 나의 능력은 대단해 ㅎㅎ
[사진출처 : Pixabay]
감독관에게 의기양양하게 결과를 보여주니 머쓱해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받아 들곤 느닷없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읽어보고 도네이션을 해달라고 한다. 대충 읽어보니 12월 며칠까지 연말맞이 농구대회를 개최하는데 필요한 기부금을 마련하는 중이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서였다.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고민을 하다가 내 아내의 시험도 통과시켜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한다. 각 500페소씩 도네이션을 하고 드디어 시험 통과가 되었다. 결국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구나. 기부금을 받아내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필리핀 완장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완장을 채워놓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대고 일반 서민들은 꼼짝도 못 하고 복종을 한다. 수백 년에 걸친 식민지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는 의식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이 나라의 국민성이다.
이제 남은 단계는 면허갱신 신청서와 시험통과 서류를 제출하고 마냥 기다리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창구 앞에서 대기하다가 이름을 부르면 갱신비용(1인당 660페소)을 내고 다른 창구에 가서 사진을 찍고 지문을 등록한 후 마지막 창구에서 카드를 수령하면 된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10년짜리 새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만세~ 만세~~
마지막으로 따가이따이 BDO은행 ATM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의 아내 Alda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카드를 넣고 진행하는 와중에 전에는 없던 지문인식과 얼굴인식 등록 메뉴가 나오니 당황한 Alda는 몇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취소를 누르고 카드를 꺼낸 후 그냥 집으로 가려고 차에 탔는데 뒤에 서있던 필리피노가 현금이 나와있다고 소리쳐 불렀다. 급히 뛰어가서 현금을 꺼내려는 순간 다시 기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해도 다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필 그날이 공휴일이라 은행도 문을 닫았으니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진출처 : Pixabay]
일단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리퀘스트 레터를 작성하여 두고 다음날 은퇴청에 은퇴비자카드를 갱신하러 갔다가 오후에 은행에 들러서 리포트를 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7시에 출발하여 마카티 시티은행 타워 29층에 있던 은퇴청을 물어물어 찾아가 갱신 신청을 한 후 약 1시간 후에 카드를 수령하고, (은퇴청은 필리핀 관공서 중에서 나름 가장 친절하고 일처리도 정확하다), 하나은행에 들러 은퇴비자 예치금의 적립된 이자를 확인한 후 SLEX 고속도로를 달려 따가이따이 BDO 은행에 오후 2시쯤 도착하였다.
은행 직원에게 레터를 보여주고 도움을 요청하니 본점 핫라인 전화를 통해 사건을 접수하고 Reference Number를 받으라고 하는데 필리핀에서 영어로 전화 통화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결국 은행 직원이 Korean Help Desk를 연결해 주어 한국인 직원과 편한(?) 한국어로 사건을 접수하고 마무리지었다. 약 5일 후면 사건을 조사하고 확인한 후 미수령 현금을 계좌로 입금해 주겠다고 한다. 진작 이렇게 할걸~~~
요즘 하루하루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외국에서 살려면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인걸...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어쩔 필리핀 ㅋㅋ
그나저나 이제 코로나 팬데믹도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다시 관광이 활성화되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교회 선교단체들의 방문도 예전처럼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