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가여운 것들 : Poor things>
어린아이의 뇌를 가진 채로 성인 여성의 몸을 운용해야하는 벨라의 하루, 하루는 피곤하다. 생각보다 먼저 성장하여 사회에 도착해있는, 몸을 따라가야 하니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녹초가 되버린다. 그런 벨라에게서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애어른’으로 불렸던 나의 유년기의 시작도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라는 공통점을 찾는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대뜸 삶이 시작되어버린 것이 평생에 거쳐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11살부터 13살까지 3년에 거쳐 매년 10센치미터씩 자랐던 나는 잠에 원수 진 사람처럼 긴 잠들을 자곤 했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우후죽순 뻗어나가는 팔다리들을 보며 많이 무서웠다. 넘어지기도, 많이 다치기도 했는데 이건 사실 성인이 된, 지금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전교에서 손꼽게 도드라지는 신장을 가졌던 나는 또래 남자애들에게 그야말로 Freak이었기에 온갖 심한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그 후로 애어른이라며 조숙하다는 얘길 밥 먹듯이 듣고 자라며 울 일이 참 적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 외양만 보고 성인 요금을 지불하라는 목욕탕에서 억울해하던 엄마 옆의 6살짜리는 미처 몰랐던 미래다.
장신의 키만으로 모두가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농구선수, 모델 등의 장래희망을 점지해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냥 내가 나인것만으로 운동을 ‘못하는’ 애, 모델을 하기에는 '너무 마르거나', '너무 통통한' 애 등으로 그들의 기대를 비켜갔다.
그 후로도 여자치곤 키가 크네. 여자인데 조신하지 못하네. 여자인데 목소리가 너무 크네. 페미니즘 그거 다 좋은데 적당히 해. 아들이 태어났어야 하는데 딸이 태어났네 등. 구구절절 한국 근현대사에 촘촘히 배겨진 한은 176센치미터의 89년생 신여성의 몸을 결코 비켜가지 않았다.
꼬리표가 우수수 매달렸다. 덕분에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닌 가지지 못한 것(이를테면 적당히 큰 키와 적당한 크기의 엉덩이, 적당한 날렵함...)들에 마음을 쏟게 되었다. 왜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는 괜찮지 못한건가, 충분하지 못한건가. 그 분노와 좌절은 안으로 향하며 파고 들었다.
벨라의 ‘전생’은 아이를 배고 강에 투신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를 밀어넣은 것이 어떤 종류의 분노 혹은 슬픔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채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 트라우마에서 살아 남은 육신은 벨라의 엄마이면서 나 자신이 되버린 존재로 계속된다. 최근 스스로가 내 삶의 가녀장(양육자)이라고 새삼스레 깨닫고 선언한 사람으로서 이것만큼 분명한 상징도 없다.
생명들을 직조해서 새로운 크리쳐로 빚어내는 갓윈의 집에는 벨라 이외에도 오리의 얼굴을 한 개, 돼지의 얼굴을 한 닭 같은 존재가 부유한다. 만일 돼지가 개의 얼굴을 하고 있었대도 우리는 그들을 지금처럼 대우했을까란 질문이 드는 풍경이다.
벨라는 이 인간 이외 짐승들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수직으로 높이 솟아있는 자신의 몸의 방향을 이곳 저곳으로 튼다. 부딪히고 구르고 다치면서 아이가 마땅히 해야 할 모험들을 수행한다. 그 모험의 클라이막스는 단연 몸에 난 구멍으로의 탐색이다.
아이 벨라는 구멍에 온갖 과일, 채소와 남성의 성기들을 넣어대며 자신의 '살아난' 몸을 발견해 나간다. 집에 있는 시체 검안소에서 죽은 남성의 성기를 손으로 가지고 놀며 자란 아이다. 살아 있는 남성의 성기가 가진 탄력성이야말로 아이 벨라에게는 더없이 재밌는 장난감이었을거다.
우리는 쾌락을 밝히고 좇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끔 학습 받아 온 사회에서 자랐다. 그런 동시에 미디어는 어린 여성의 몸과 얼굴에서 섹시함을 찾는다. 포르노조차 브이로그로 하는 시대에 우리는 쾌락의 프라이버시와 대중화에서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고독'을 자주 빠트린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벨라가 사창가에서 한 손님에게 농담을 대가로 이야기를 주고 받자고 하는 대목이다.
벨라는 단숨에 청소년-청년기를 지나 지적인 쾌락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가장 원초적인, 욕구들의 발현을 충실히 이행한다. 이족보행이 수월해지자 자신의 의지대로 출가를 했고, 온갖 종류의 쾌락을 원없이 누리고자 했으며 책과 대화를 통해 질문하는 행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연민이라는 감정을 벨라에게 가져온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와 적당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평생에 거쳐 요구 받았기에 거침 없는 벨라의 행보에 해방감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죽어나가는 아이들을 목격한 벨라는 스스로의 몸에 새겨진 상실(유산)을 짐작이라도 한듯 울부짖고, 던컨의 노름돈을 모든걸 잃은 이들에게 가져다주려 한다. 불공평하게 돌아간 자본을 재분배 했을 뿐인데 갈취 당한, 던컨의 입장에서는 그런 벨라를 이해할 리 없다.
아이는 긴 여정을 거쳐 결국 자신의 엄마, 보호자가 된다. 지식의 쾌락까지 흡수해버린 그는 더욱 매혹적인 마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뜬 마녀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장본인인 전남편과 재회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곤두서있는 그에게 풀 뜯어 먹으며 전원의 생활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온당한 분노에 찬, 여성들을 두고 지나치게 예민하다는데에 대한 확실한 화답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전 친구와 고급진 바에 가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다. 때마침 한국인 남성분이었던 바텐더가 한국인인 우리를 알아보고는 반가워하는 우연에까지 미쳤다. 내가 마티니를 주문하자 그는 ‘오, 여성들은 마티니 잘 안 시키시는데’라며 나의 취향이 예사롭지 않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없이 했다. 그 말에 나는 친구와 눈을 마주치며 ‘지랄’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렸었다.
벨라는 모든 잡음을 잠재우고 자신이 다시 태어난 집의 정원에서 선택한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마니티’를 마신다. 그 모습에 친구와 함께 마셨던, 그간 마셔온 수많은 마티니의 향이 코를 스쳤다. 엠마 스톤의 해사한 얼굴에 마니티까지 더 바랄 것이 없는 장면이다.
She's totally without shame. She's pure joy and curiosity and experimentation and adventure and has no qualms about her body or her you know experience or food or drink or you know the way she relates to other people. It was so inspiring to me on a daily basis.
Emma Stone's word about the character Bella
from The Hollywood Reporter Roundtable Interview
그는 수치심이 전혀 없어요. 그는 순수한 기쁨이고 호기심이고 실험이자 모험 그 자체죠. 그 자신의 몸이나 그의 음식이나 음료 혹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어요. 매일매일이 제겐 영감이 되어주었죠.
할리우드 리포터 라운드테이블 인터뷰 중
엠마스톤의 <가여운것들>의 캐릭터 '벨라'에 대한 언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