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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연 Nov 09. 2023

할머니는 손녀인 날 사랑했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많이 슬프지 않을거라 장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에게 전해 듣기로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당시 딸이란 이유만으로 통곡을 하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탄생이 그리고 우리 엄마의 출산이 축복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 나는 그녀를 아주 오랫동안 보고 싶어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밀어내왔다.


아들만 넷을 낳아 길렀기에 딸 키우는 재미도 모르는, 무뚝뚝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셋째아들의 며느리가 아들을 둘이나 낳았을 때 그녀의 달라진 며느리 대접 때문에 딸을 둔, 이외 며느리들은 ‘어머니도 같은 여자이면서 어쩜 그러냐’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그런 할미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내 키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늙은이를 미워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할머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늘 그녀를 힘껏 안을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나의 탄생을, 나의 존재를 환영해주지 않았던 사실만으로 너무 큰 상처였지만 그녀는 그저 나약한, 어느덧 나이가 많이 든 할머니 일뿐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방문하는 빈도수가 몇 년에 한 번 정도로 줄었지만 시골 할머니댁에 갈 때면 할머니는 마치 귀신양이라도 본 양 ‘아이구, 우리 미연이가 여길 다 왔어’라며 놀라 반기곤 했다. 아빠 트럭을 타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늘 대문 앞에 서서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배웅을 했는데 매번의 작별 이후 할머니가 보냈을 저녁 시간이 얼마나 허전했을지 나는 감히 알지 못한다.


어느 때부턴가 그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새벽 같이 가선 손주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부르며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때문에 할머니댁에 가 동네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너가 그 근춘이 딸 미연이구나’라는 인사를 받곤 했다. 그 때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그녀만의 애정이었을 거다. 표현의 정도나 방식은 달라도 꾸준한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최대 실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38년에 태어난 할머니는 향년 85세로 6.25전쟁 당시 12살이었다. 지금 살아계셨으면 64세일 첫째 아들, 큰아빠를 고작 21살에 출산하신거다.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바로 다음 해에는 우리 아빠를 낳으셨다. 전쟁 전후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매일매일 생존이었을, 할머니의 삶을 제대로 궁금해 한 적이 없단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의 존재란 늘 너무 당연해서 그저 할머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표현에 인색한 분이었기에 나 또한 질문을 잘하지 않았던 것마저 이제 와서 후회가 된다.


언제건 가평 대보리에서 일요일 아침이면 아궁이 퀘퀘한 장작 냄새와 함께 송해 할아버지가 출연하는 전국노래자랑으로 그녀가 아침을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의 끝이 있을 거라 생각 못했지만 송해 할아버지도 우리 할머니도 떠났고..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기억하는 대보리 할머니집의 흔적도 아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누군가 멀리 떠난 후에야 뒤늦게 도착하는 마음이 있다. 할머니의 부고를 접하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할머니가 나 예뻐하셨지?’ 돌아온 대답은 ‘그럼’이었다. 왜 직접 묻지 않았는지 혹은 못했는지 모르지만 짐작컨대 할머니의 성격으로는 얘가 실없는 소릴 다한다며 미소 짓고는 ‘아요, 그럼 손녀 딸인데 이쁘지’라고 대답했을 거다.


2021년 6개월 가량 다니던 마지막 회사 정리를 하고 부리나케 한 달 정도만에 출국 준비를 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출국일 당일까지 아빠는 할머니를 뵙고 가라 했지만 어쩐지 나는 내키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이었기에 꺼려지는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다녀와서 뵐텐데’라는 마음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되면 어쩌지란 두려움이 도사려 있었을 거다.


출국 후 3개월이 지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오늘로 마지막 조부모였던 할머니마저 떠났다. 서른이 넘었어도 응석을 부리는, 손녀딸일 수 있는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기에 빼도 박도 못하게 ‘어른’의 위치로 밀려난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작고 단단한 체구에 살구 통조림을 좋아했다는 것 외에는 할머니에 대해 아는게 얼마 없다. 아침 부고 소식을 듣고 눈물을 삼킨 뒤 학교에 촬영을 갔다. 낙엽이 지는 풍경을 보며 할머니랑 이걸 함께 봤으면 참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다. 퇴근길 학교에서 만난 19살의 학생이 친구가 죽어 장례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포옹으로 서로의 상실을 위로하고 헤어지는데 표현에 아낄 날이 없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해외에 살며 이런 때에 황망한 마음을 나눌 길이 많지 않기에 할머니는 손녀인 날 사랑했을까란 질문으로 시작한 글을 갈 데 잃은 응석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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