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살아가다(feat. 스쿠버다이빙)
중년의 정체성 혼란 : 제2의 사춘기
정체성 이야기를 하면 사춘기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사춘기의 혼란스러움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인 정체성 형성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중년기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중년이 되면서 내 삶을 이끌고 지탱해왔던 정체성에 회의가 들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정체성이란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 짓는 개별성과 독특성을 의미합니다.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마치 흐트러진 레고 블록들을 가지고 나만의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한 가지 완성품만을 만들 수 있는 레고 박스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조립도를 보고 블록들을 맞추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블록들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맞추어보고 부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는 삶의 여정 중에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체성 문제는 분명한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풀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이후 한 번 형성된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적응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점검하고 다시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환경에 적응적이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크게 두 번의 정체성 혼란의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성인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는 관문인 사춘기로 시작하는 청소년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노인기로 가는 길목인 갱년기로 특징 지워지는 중년기입니다.
심리상담학은 중년의 시기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나’가 아닌 본래의 ‘나’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은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본래의 ‘나’와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왠지 멋있어 보이는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문구는 나를 향해서 한 번 뿐인 인생을 주인처럼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다 보면 삶이라는 것이 참 혼란스러워집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살아왔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지라는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으세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경마장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결승선을 향해 달립니다. 결승선에서는 경주의 목적인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다”에 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승선에 도착하면 경주마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러 갑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결승선을 향해서 달립니다. 결승선에서의 보상을 충분히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경주마가 은퇴할 때까지 경주는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경마장의 경주마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게끔 훈련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경주마처럼 열심히 달린다고 해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삶을 주도하는 기수가 본래의 ‘나’ 자신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나는 육아를 하기에는 다소 늦은 중년의 나이에 세 쌍둥이 육아를 하고 있습니다. 중년의 체력으로는 세 쌍둥이 육아가 매우 버겁기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분노 폭발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잦아졌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참을성 적은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내가 경멸하는 쓰레기같은 행동을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반성하면서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육아를 하면서 인격이 무너지는 나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뉴스에 종종 나오는 나쁜 부모들을 욕할 수 없을 만큼 내 마음과 생각은 쓰레기통 그 자체였습니다. 다행히 나는 뉴스에 나올만한 짓을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세 쌍둥이 육아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육아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는 심리정신적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주체적인 삶인지 아닌지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를 관찰하면 충분히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과정이 힘들거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탓’(남 탓,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육아를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탓'의 끝인 아이들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었으니 말입니다.
내 성격적인 강점은 책임감입니다. 그 덕분에 아내의 세 쌍둥이 임신과 출산 과정 그리고 육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육아로 인해서 반복되는 심신의 한계적 상황에서 책임감은 금세 밑천을 드러냈습니다. 분노 조절도 잘 안되고 쉽게 폭발하기 일쑤였습니다. 세 쌍둥이 육아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누구나 영유아기 육아를 하다 보면 심신이 소진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상태라도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대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같은 경우는 육아를 하면서 점점 더 부정적인 해결 방법을 선택하고 짜증과 화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분명히 내가 세 쌍둥이 육아를 하기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화는 육아 때문이라고 탓했습니다. 어찌 보면 나는 내 삶의 주체로서 책임감 있게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의 힘듦도 남을 탓하거나 환경 탓을 하면서 불평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우울함, 초조함, 짜증, 화 등이 마음에 가득 차서 입으로 흘러넘쳐 나왔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책임감 있어 보이는 나로서는 더 이상 육아를 행복하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쁨과 좋음의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 쌍둥이 육아에 대해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 쉽지않았습니다. 낯설었습니다. 내 정체성의 블록들을 부수고 다시 맞추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