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칼바람이 몰아치는 유르가드 내륙 깊숙한 곳.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빙벽과 암반을 통째로 파내어 빚어낸 웅장한 건축물이 눈보라 속에 그 장엄한 위용을 드러냈다.
사르칸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사원들과는 달리, 척박한 얼음의 땅에 뿌리내린 유르가드의 조정성교(調整聖敎) 본관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압도적인 신성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잿빛 돌기둥들 사이로는 얼어붙지 않는 기묘한 푸른 불꽃이 타올랐고, 10세기 전 세상을 휩쓸었던 대홍수와 인류를 구원한 조정자의 전설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빙벽의 부조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도착했군요, 서리의 장남."
얼어붙은 사원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짙은 회색의 사제복을 입은 마흔일곱의 사내, 브라더 라제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깊은 지혜가 엿보이는 온화한 눈매를 지닌 그는, 피로에 지친 서리 달튼과 언덕네 데일, 그리고 염솟말 위에 엎드려 있는 늙은 사제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이토록 참혹한 눈보라를 뚫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언관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달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르가드 본성에서 의원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아 간신히 안정을 취하긴 했으나 여전히 위태로운 늙은 사제를 부축해 사원의 가장 깊은 성소로 걸음을 옮겼다.
성소의 중앙, 타오르는 거대한 무쇠 화로 앞에는 유르가드 조정성교를 이끄는 예순하나의 성언관, 브라더 마일이 위압적인 기백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깊게 팬 주름과 예리한 은빛 눈동자를 지닌 그는, 달튼 일행이 눕혀 놓은 늙은 사제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강물이 맑아졌다는 징조는 익히 들었네."
브라더 마일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실성한 늙은이가 진정 그 거대한 재앙과 연관이 있는 자인지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조정성교의 고위 브라더들은 타인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그 자가 살아온 과거의 궤적과 지은 죄를 읽어내는 신비한 비전(秘傳)을 지니고 있었다. 마일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늙은 사제의 탁한 눈동자 속으로 자신의 정신을 밀어 넣었다.
"……!"
그 순간, 브라더 마일의 은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며 격렬하게 요동쳤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십 년에 불과할 과거의 기억이, 이 노인의 머릿속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수십 세기의 심연으로 기괴하게 얽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헉…!"
마일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거칠게 물러섰다. 평생 수많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던 성언관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요?"
데일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이며 당황해 묻자, 마일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감히 인간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얄팍한 세월이 아니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지식과 시간이 이 노인의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네."
마일의 시선이 늙은 사제의 낡은 로브에 새겨진 희미한 표식에 머물렀다. 비록 자아를 잃고 껍데기만 남은 자였지만, 마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초라한 이방인이 바로 10세기 전의 대홍수, 그리고 세상을 구원한 전설 속의 '조정자'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그가 누구든, 사르칸의 찬탈자가 이 자를 노리고 있다면 그 추악한 손길로부터 반드시 숨겨야만 하네."
마일은 몸을 돌려 제단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작은 나무상자를 꺼내 달튼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짙고 서늘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기묘한 원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유르가드의 최북단, 가장 깊은 심해 얼음 밑에서만 캘 수 있는 진귀한 '청금석(靑金石)'이네. 이것을 사제의 품에 지니게 하라."
달튼이 의아한 눈으로 청금석을 받아 들자, 마일이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그 돌은 타인의 정신을 엿보는 영력(靈力)을 차단하는 짙은 안개를 뿜어내지. 더 정교하게 제련한다면 아예 영력 자체를 완벽히 튕겨내는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유르가드의 기술력으로는 그저 마음의 장벽을 치는 이 정도 수준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네."
그 청금석의 존재는, 바다 건너 엘로한에서 태양 올리 왕자가 시스터 엥가의 끔찍한 독심술을 완벽하게 파훼할 수 있었던 숨겨진 비밀이기도 했다. 유르가드의 희귀한 원석이 어째서 엘로한 왕자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력을 막아내는 이 돌의 힘만큼은 확실했다.
"사르칸의 백성들은 10세기의 풍요에 취해 신앙을 잃고 타락했으나, 우리 유르가드는 그 척박함 속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켜왔네."
마일이 결연한 눈빛으로 북쪽의 빙벽을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래전 우리의 교리에서 파생되어 엘로한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모래 자매단'과도 은밀한 서신을 주고받는 연관을 맺고 있지. 그들의 예언과 영력이라면 이 노인이 짊어진 거대한 운명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을 터. 내가 시스터들의 책임자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겠네."
그날 밤, 유르가드 대사원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맹렬한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눈매(雪鷹) 한 마리가 엘로한을 향해 은밀하게 날아올랐다.
***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거센 눈보라가 한풀 꺾인 유르가드 대사원의 따뜻한 성소 안. 거대한 무쇠 화로 앞에는 여전히 초점을 잃은 텅 빈 눈동자로 타오르는 불길만을 응시하는 늙은 사제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한 달 내내 그 화로만 뚫어져라 쳐다보시는데, 그 안에 뭐 금덩이라도 숨겨놨슈? 눈알 안 빠져유?"
참다못한 언덕네 데일이 덥수룩한 수염을 벅벅 긁으며 핀잔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늙은 사제는 데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갈라진 입술을 달싹이며 알 수 없는 기계적인 단어들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탄소... 연소 반응... 열에너지의 팽창..."
"옘병! 또 그놈의 알 수 없는 헛소리! 눈 빠지겠으니까 그냥 고구마나 하나 구워 드시구랴!"
데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거리던 그때였다. 짙은 회색 사제복을 입은 브라더 라제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와 늙은 사제의 앞을 성스럽게 가로막았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데일 형제님! 어찌 감히 세상을 구원하신 분의 거룩한 신탁을 헛소리라 폄하하십니까! 저것은 세상을 정화하는 불꽃의 거룩한 순환과 생명의 팽창을 예언하시는 겁니다! 오오, 역시 위대하십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감격에 겨워 부들부들 떠는 라제의 모습에, 데일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염병하네, 진짜. 그냥 따뜻해서 불멍 때리시는구만 뭘 정화가 어쩌고 저째유? 거 성직자 양반, 꿈보다 해몽이 너무 과한 거 아니요?"
"해몽이라니요! 무지한 자의 눈에는 그저 실성한 늙은이로 보일지 모르나, 저분은 우리의 살아있는 전설이십니다!"
라제는 대변인이라도 된 양 열을 올리며 데일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달튼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으며 데일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그만해라, 데일. 어르신께 무례하게 굴지 마."
실제로 데일의 눈에는 그저 넋 나간 노인네일지 몰라도, 이곳 유르가드 대사원의 브라더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도 숭고했다. 성언관을 비롯한 모든 고위 사제들은 그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했고, 가장 귀한 약초를 달여 바치며 매일 밤 그의 헌 발을 직접 씻겨주었다. 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룩한 헌신은 도무지 '실성한 늙은이'를 대하는 것이라 폄하할 수 없는 깊고 진실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때, 성소의 무거운 문이 열리며 성언관 브라더 마일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거대한 눈매(雪鷹)를 통해 엘로한에서 날아온 양피지 전언이 쥐어져 있었다.
양피지에 적힌 문장은 몹시 간결하고도 단호했다.
'시쿠미에 사원으로 오라.'
전언을 확인한 브라더 마일이 굳은 결의를 다지며 달튼과 데일, 그리고 라제를 호출했다.
"모래 자매단의 응답이 왔네. 가장 위험하고도 거대한 여정이 될 것이야. 사르칸의 피바람과 엘로한의 모래바람을 동시에 관통해야 하니 말이지."
마일은 곁에 서 있던 브라더 라제를 콕 집어 그들 앞으로 내세웠다.
"브라더 라제. 자네가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 엘로한의 시쿠미에 사원까지 동행하게."
"예? 제, 제가... 그 험난한 미지의 사막 대륙까지 말입니까?"
평생을 유르가드의 성소에서 기도만 올리며 살아왔던 라제는 갑작스러운 여정 명령에 크게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마일의 눈빛은 확고했다.
"자네는 본래 유르가드 남단의 척박한 해변가 출신이지 않은가. 두 대륙을 잇는 거친 해변길과 조류의 흐름에 누구보다 밝지. 게다가 자네의 그 굳건하고 독실한 신앙심이라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저분을 무사히 모실 수 있을 거라 믿네."
마일의 말에 라제는 곧바로 당황한 기색을 거두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성언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업을 완수하겠나이다."
라제가 짐을 챙기기 위해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라제의 손끝이 닿지도 않았건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두꺼운 성서 한 권이 미세하게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스르륵 그의 낡은 가죽 가방 안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은 엘로한의 모래 자매단이 다루는 것과 완벽히 같은 원리의 기묘한 '영력(靈力)'이었다. 라제 본인조차 그 힘의 원리를 명확히 알지 못했고, 뒤에 선 달튼과 데일 역시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자연스러운 기행이었다.
마일은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친 라제의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사제들의 궤적을 읽어내는 마일의 비전(秘傳)이 이번에는 라제의 머나먼 미래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것은...?'
마일의 은빛 눈동자가 묘한 이채를 띠며 흔들렸다. 라제의 험난한 여정 끝에 엿보인 환상. 그곳에는 눈부신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마차와 붉은 실크로 짜인 최고급 카펫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더욱 기괴한 것은, 짐승의 털을 뒤집어쓴 유르가드의 토착 괴물 두억시니들과 인간들이 어깨를 맞댄 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모니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풍경이었다.
'황금 마차와 실크 카펫... 그리고 털복숭이들과 인간의 화음이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알 수 없는 미래로군.'
마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라제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게나, 브라더 라제. 자네의 앞길에 기이하고도 찬란한 축복이 함께할 것이네."
마침내 모든 채비를 마친 일행이 성소의 문을 나섰다. 맹렬하던 물막이 산맥의 눈보라도 그들의 웅장한 여정을 축복하듯 잦아들어 있었다.
에취!
찬 바람을 맞은 늙은 사제가 갑작스레 작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그러자 앞장서 걷던 라제가 화들짝 놀라며 눈밭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오오! 이것은 엘로한의 지독한 모래바람을 경계하라는 거룩한 경고의 뜻이옵니다! 일행 모두 옷깃을 단단히 여미십시오!"
그의 거창하고 맹목적인 충성심에 데일이 혀를 쯧쯧 내두르며 늙은 사제의 코밑을 거칠게 닦아주었다.
"아이고, 옘병! 그냥 추워서 감기 드신 거유! 제발 그만 좀 하쇼, 귓구멍에서 피 날 것 같으니까!"
별것 아닌 행동조차 거창하게 확대 해석해 대는 엉뚱한 대변인 사제와, 그에게 연신 면박을 주는 투덜이 괴력 종자. 달튼은 묵묵히 대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홍수의 징조를 품은 구원자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거대하고도 기묘한 여정이, 마침내 얼어붙은 유르가드를 떠나 미지의 사막 대륙을 향해 그 유쾌하고도 장엄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