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양면

by choiplan

수십 개의 거대한 청동 거울들이 사막의 뜨거운 태양 빛을 한곳으로 모아 거대한 무쇠 수조의 물을 펄펄 끓여내고 있었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증기의 압력이 집채만 한 톱니바퀴와 복잡한 태엽 장치들을 굉음과 함께 맞물려 돌리며 쉴 새 없이 엘로한 황성의 거대한 수로를 퍼 올렸다.

그것은 대홍수의 재앙을 겪지 않아 신을 믿지 않고, 타 대륙보다 기술력이 약 1세기나 앞서 있는 엘로한 특유의 눈부신 기계 공학이었다.


어전 회의가 끝난 직후, 뿜어져 나오는 하얀 증기와 거대한 톱니바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서쪽의 둥근 아치형 회랑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마주 섰다.


"아쉬우시겠습니다, 왕자님. 모처럼 그럴싸한 명분으로 황제 폐하의 마음을 흔드셨는데 말이지요."


모래 자매단의 2인자인 대모(大母)이자 엘로한 왕실의 조언자인 시스터 엥가가 화려한 실크 로브를 끌며 태양 올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먹잇감을 조롱하는 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올리는 등 뒤로 들려오는 거대한 기계의 마찰음을 들으며, 불쾌한 기색을 숨긴 채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언자라는 가면을 쓰고 내 앞길을 가로막은 건 당신이오, 시스터 엥가. 엘로한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사르칸을 치는 것이 합당한데, 어찌하여 억지를 부리는 거요?"


"억지라니요. 저는 그저 우리 황실의 귀한 왕자님께서 행여나 다치실까 염려했을 뿐입니다."


엥가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회랑에 흩날리던 붉은 꽃잎 하나를 영력으로 잡아채 올리의 가슴팍에 살포시 얹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괴한 빛을 내며 올리의 내면을 훑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왕자님의 마음속은 참으로 흥미롭더군요. 황실의 눈을 피해 어느 가련한 평민 여인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고 계신다는 공공연한 소문 말입니다."


올리의 구릿빛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지자, 엥가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올리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하지만 제 눈은 속일 수 없지요. 왕자님의 그 은밀한 침소에 드는 자가 여인이 아니라… 탄탄한 근육을 가진 '사내'라는 사실을요."


올리가 철저히 숨겨왔던 진실. 엘로한의 차기 황제가 될 제1 왕자가 남색(男色)을 탐하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엥가가 독심술로 꿰뚫어 본 것이었다.


"어디, 우리 고귀하신 왕자님의 밤을 훔친 그 발칙한 사내가 뉘신지 얼굴이나 좀 자세히 들여다볼까…."


그녀가 혀를 차며 올리의 머릿속 가장 깊은 곳, 연인의 정체가 숨겨진 기억의 심연으로 파고들려던 찰나였다.


"……?"


엥가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강철 벽에 가로막힌 듯, 올리의 내면을 탐색하던 그녀의 정신이 맹렬하게 튕겨 나간 것이다. 그녀는 당황하여 다시 한번 영력을 끌어올려 마음을 읽으려 했으나, 올리의 머릿속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로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더는 깊게 파고들지 못할 거요, 시스터."


당황하여 파랗게 질린 엥가를 향해, 올리가 의미심장하고도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영력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자매단의 독심술을 막아낸단 말입니까!"


"내가 그깟 눈속임에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소?"


올리의 나른했던 눈빛이 일순간 맹수처럼 매섭게 변했다. 그는 한 걸음 거칠게 다가서며 엥가를 회랑의 돌벽으로 고압적으로 몰아붙였다. 늘 여유롭고 굽히는 척하던 왕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완벽한 포식자의 기백이었다.


"입단과 동시에 세속의 성과 본명을 파기하고, 오직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겠다며 고결한 척은 다 하는 모래 자매단. 하지만 정작 그 조직의 2인자라는 당신은 어떤가?"


올리가 엥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밤마다 황성의 젊고 잘생긴 근위병들을 제 처소로 들이고 남색을 밝히며, 그 알량한 세치 혀로 우리 황실을 제 뜻대로 주무르려 하지. 참으로 역겹고 썩어빠진 위선이 아닐 수 없군."


"왕, 왕자님! 지금 무슨 망발을…!"


"당신의 그 타락한 육욕과 권력욕을, 자매단의 가장 높은 책임자인 시스터 헬가 대조모께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신다면 과연 무어라 하실까?"


헬가의 이름이 나오자 엥가의 눈동자에 명백한 공포가 서렸다.


"여태까지는 멍청한 궁성 사람들이 당신의 그 알량한 염력과 끔찍한 보복이 두려워 당신의 더러운 유희를 알면서도 묵인해 왔지.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오."


올리가 엥가의 턱을 놓아주며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내 머릿속조차 읽지 못하는 얄팍한 영력 따위, 더는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거든. 처신 잘하시오, 엥가 대모. 다음번에도 건방지게 내 앞길을 막아선다면, 그땐 시스터 헬가의 귀에 당신의 그 난잡한 밤의 유희가 아주 상세하고도 완벽한 증거와 함께 들어가게 될 테니."


올리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엥가를 남겨둔 채, 구겨진 망토를 무심하게 털어내고는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수증기를 뚫고 유유히 회랑을 걸어 나갔다.

증기 압력으로 돌아가는 기계 톱니바퀴의 육중한 굉음 속에서, 모래 자매단의 오만한 권위가 왕자의 치밀하고도 서늘한 이면 앞에 완벽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


사르칸의 웅장한 궁성, 붉은 카펫이 깔린 거대한 알현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기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알현실 중앙에는 사르칸의 핵심 권력을 쥐고 있는 고위 귀족들과 영주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러러보는 가장 높은 옥좌 위에는, 핏빛 찬탈극을 거쳐 마침내 대륙의 지배자가 된 노을 제논이 특유의 나른하고도 서늘한 눈빛으로 무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논은 창부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평생 자신을 핍박했던 오만한 교단을 진저리 나게 혐오했기에, 반역의 밤 군대를 보내 대성언관의 목을 베어버리고 사원을 피로 물들였다. 하지만 제논은 10세기 동안 백성들에게 뿌리내린 신앙심마저 단칼에 베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단을 완전히 자신의 발밑에 두기 위해, 이 모든 핏빛 찬탈극을 뒤에서 조용히 설계하고 지원해 온 은밀한 '뒷배', 브라더 이립을 새로운 대성언관으로 내세울 참이었다.


"사르칸의 붉은 태양이시여, 부름에 응하여 이 자리에 섰나이다."


짙은 회색의 사제복을 입은 쉰둘의 사내, 브라더 이립이 옥좌 아래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깊게 파인 주름과 자애로운 눈매는 영락없는 독실한 성직자의 모습이었지만, 굽혀진 그의 고개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에는 지독하게 검고 맹렬한 야심이 들끓고 있었다.


한때 브라더 이립은 10세기 전 대홍수로부터 세상을 구원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조정자'를 누구보다 순수하게 섬기며 헌신했던 독실한 사제였다. 하지만 뼈를 깎는 수련과 학구열로 교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그는 교단이 굳게 숨기고 있는 거대한 진실의 벽에 봉착하고 말았다.

대홍수의 진짜 이유와 주기, 그리고 대사원의 가장 깊고 은밀한 금서(禁書) 구역에 감춰진 세계의 기원들.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지식을 향한 이립의 순수했던 갈망은, 점차 금기를 파헤치려는 광적인 집착으로 변질되어 갔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교단의 가장 높은 곳, 절대적인 권력을 쥔 '대성언관'의 자리에 기어코 올라야만 했다.


그 맹목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이립은 기꺼이 타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철저히 버림받은 왕의 서자, 어린 제논의 독기와 결핍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립은 남몰래 제논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고, 교단의 막대한 자금과 정보력을 뒤로 빼돌려 제논이 왼막관과 영주들의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도록 치밀한 판을 짜주었다. 제논의 옥좌 뒤에는 늘 신의 교리를 비틀어버린 늙은 사제의 섬뜩한 지식욕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논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사르칸의 신앙을 이끌어갈 새로운 대성언관으로 브라더 이립을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놀랍게도 알현실의 귀족들은 이 갑작스러운 인사를 그저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사원이 무력으로 짓밟힌 직후였으나, 브라더 이립은 평소 사르칸의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한없이 인자하고 명망 높기로 유명한 자애로운 성직자였기 때문이다. 교단의 끔찍한 학살극에 내심 공포와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오히려 흠잡을 데 없이 덕망 높은 이립이 대성언관의 자리에 오르자 안도감마저 느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가는 듯한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제논의 시선이 알현실 앞열에 서 있던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 같은 사내, 오른막관 갈색 벤시를 향했다.

왕실 군대를 통솔하며 사르칸 제일의 무력을 행사하는 그는 찬탈의 밤 옥좌의 문을 열어젖힌 일등 공신이었다. 오늘은 대성언관의 임명식이자, 동시에 그가 사르칸 최고의 권력인 '금막관(金幕官)'으로 추대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제논은 옥좌의 계단을 한 칸 내려와 벤시를 향해 따뜻하고도 경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갈색 벤시 공. 사르칸의 가장 굳건한 방패이자, 과인의 가장 충직한 검이여. 그대의 용맹한 결단과 기사들의 피가 없었다면 과인은 결코 이 붉은 옥좌에 닿지 못했을 것이오."


"당치 않사옵니다, 전하. 소신은 그저 진정한 사르칸의 태양을 위해 당연한 충의를 다했을 뿐입니다."


거구의 벤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자신이 대륙 최고의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벅차오르는 승리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제논의 가벼운 손짓에 하인이 붉은 벨벳 쿠션 위에 올려진 눈부신 '신발 모양의 황금 잔'과 진귀한 포도주를 대령했다. 왕의 신발 모양을 딴 잔에 술을 마시고 브로치를 다는 것은 오직 왕의 핏줄이 섞인 친척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다.


"과거의 오만한 금막관들은 핏줄만을 운운하며 구습을 고집해 왔소. 하지만 과인은 선언하건대, 진정으로 피를 흘려 옥좌를 지켜낸 자만이 그 찬란한 황금 잔을 쥘 자격이 있소. 자, 사르칸의 새로운 금막관을 위하여. 단숨에 들이켜시오, 나의 든든한 형제여."


귀족들의 부러움과 시기가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벤시는 경외감에 찬 얼굴로 거대한 손을 뻗어 황금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찰랑거리는 핏빛 포도주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크하하! 과연, 옥좌가 내리는 술의 맛은 단연코 대륙 최—"


그 순간이었다.


벤시의 우렁차던 목소리가 툭, 하고 불길하게 끊어졌다.


"…어?"


벤시의 짐승처럼 번뜩이던 두 눈동자의 실핏줄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터져나갔다. 목구멍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끔찍한 작열감이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들러붙는 듯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제 목을 부여잡으려던 찰나였다.


"컥…! 카아아악-!"


거대한 벤시의 몸뚱이가 벼락을 맞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대리석 바닥으로 쿵, 하고 처박혔다. 그는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제 목을 쥐어뜯으며 발버둥 쳤지만, 이미 검게 변해버린 독혈이 기도를 막고 역류하고 있었다.


"크으윽… 끄륵…!"


2미터의 거구가 바닥을 뒹굴며 고통으로 몸을 활처럼 기괴하게 비틀었다. 두 눈과 코, 찢어질 듯 벌어진 입에서 거품 섞인 검은 피가 꿀럭거리며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벤시의 거대한 두 손이 알현실의 붉은 카펫을 북북 찢어발기며 살기 위해 발악했으나, 그의 손가락 관절들은 이미 기괴한 각도로 꺾여 들어가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벤시의 눈동자가 원망과 경악으로 옥좌를 향했지만, 제논은 그저 서늘하고 무감각한 눈으로 바닥을 기는 벌레를 보듯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침내 끔찍한 경련이 멎고, 사르칸 제일의 무력을 자랑하던 기사는 제 입에서 토해낸 거대한 피 웅덩이 속에서 허무하게 숨을 거두었다. 불과 십여 초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압도적인 참극이었다.


"히, 히익!" "벤, 벤시 공이!"


축복으로 가득했던 알현실은 순식간에 끔찍한 비명과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파랗게 질린 귀족들이 뒷걸음질 치고, 벤시를 따르던 기사들이 경악하여 검자루에 손을 뻗으려던 그 찰나였다.


"보았는가!"


제논의 쩌렁쩌렁한 일갈이 알현실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제논은, 어느새 지독하리만치 서늘하고 오만한 얼굴로 바닥에 나뒹구는 벤시의 시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탐욕스러운 자를 보라! 감히 왕의 핏줄만이 쥘 수 있는 금막관의 자리를 탐낸 오만한 대가다! 고귀한 황금 잔이 저 천한 기사의 피를 거부했기에 신벌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고, 누가 보아도 토사구팽을 위해 왕이 직접 내린 치사량의 맹독이었다.

그러나 귀족들 중 그 누구도 감히 반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애롭게 웃으며 형제라 칭하던 왕이, 단숨에 사르칸 제일의 무력을 지닌 오른막관의 숨통을 벌레 잡듯 끊어버린 그 압도적인 공포와 잔혹함이 그들의 이성을 하얗게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벤시의 끔찍한 시체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절대 권력의 무자비함 앞에 철저히 납작 엎드렸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금막관을 탐낸 오만한 대가이옵니다…."


오직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절대적인 힘 앞에 짐승처럼 굴종하는 인간의 뼈저린 공포와 나약한 민낯이었다. 영주들의 막대한 사병과 돈줄을 쥐고 있는 왼막관 초원 할리만이 구석에서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고 이 끔찍한 참극을 묵묵히 관망할 뿐이었다.


모든 핏빛 숙청이 끝나고, 제논은 텅 빈 집무실로 돌아와 사르칸의 권력을 나타내는 거대한 세력도를 훑어보았다. 전대 왕을 지키다 목이 달아난 '금막관'의 빈자리와, 방금 전 맹독을 마시고 절명한 갈색 벤시의 '오른막관' 빈자리. 제논은 옥좌를 위협할 수 있는 오만한 사냥개를 치워버리고 마침내 자신만을 위한 완벽한 권력의 공백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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