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후계자

by choiplan

칠흑 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유르가드 황궁의 거대한 실내 연회장.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사냥제의 도중이다.

혹한에 살아남고 충성을 다 하는 전사들을 위해 뜨거운 술을 나누는 자리이며, 결속을 다지는 행사였다.


물막이 산맥의 빙벽을 타고 넘어온 살을 에이는 듯한 매서운 칼바람이 잿빛 돌벽과 두꺼운 유리창을 사정없이 할퀴며 기괴한 비명 소리를 냈다. 끝없이 몰아치는 백색의 눈보라가 바깥세상을 온통 혹한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지만, 견고한 황궁 내부만큼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거대한 벽난로 덕분에 묵직하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벽난로의 시뻘건 불길 위로는 험준한 눈밭을 누비며 사냥해 온 거대한 순록 고기가 두툼한 무쇠 꼬챙이에 꿰인 채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뜨거운 짐승의 기름이 숯불 위로 뚝뚝 떨어질 때마다 매캐하고 고소한 연기가 치솟아 오르며 연회장의 공기를 덥혔다.


유르가드는 일 년의 절반 이상이 지독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짐승과 망자들을 사냥해야 하는 남부의 기사들과 전사들은 꽁꽁 언 손발을 녹이기 위해 불가로 모여들었고, 독한 불술이 찰랑거리는 무거운 나무 잔을 거칠게 부딪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란스러운 연회장 한구석에서 가장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은 서리 가문의 덩치 큰 종자, 언덕네 데일이었다.


"아니,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그 징그러운 흰 털복숭이 두억시니 서른 마리가 절벽 끝에서 우리를 확 포위했단 말이여!"


얼굴의 반을 덮은 덥수룩한 털보에 산만 한 덩치를 가진 데일은, 양손에 든 거대한 고기 꼬치와 술잔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침을 튀겼다.


"근데 우리가 업고 온 그 사제 어르신이 갑자기 땅바닥을 세 번 탁, 탁, 탁 치니까! 산맥 전체가 우르르르쾅쾅 무너지면서 그 괴물 놈들을 싹 다 쓸어버렸슈!"


"하하하! 이 뚱보 녀석아, 불술을 얼마나 마신 거냐! 늙은 사제가 무슨 수로 산사태를 일으켜!"


기사들이 믿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자, 데일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옘병, 진짜라니까! 우리 나으리랑 내가 아주 그 절벽 끝에서—"


"그쯤 해두지, 데일. 무용담이 길어지면 허풍이 되는 법이다."


그때, 곁에 앉아 있던 서리 가문의 장남 달튼이 무심한 얼굴로 데일의 커다란 입에 익은 순록 고기 한 덩이를 푹 쑤셔 넣었다. 데일이 웅얼거리며 고기를 씹어 삼키자, 달튼은 못 말린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을 데일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어릴 적부터 달튼을 보필해 온 데일은 투박하고 상스럽지만, 전쟁터에서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가족이자 삼촌 같은 존재였다.


"나으리도 참. 사실을 말해도 안 믿어주니 답답해서 그러지유."


"그래, 네 그 무식한 도끼질 덕분에 살아서 이 맛있는 고기를 씹고 있으니, 그만 떠들고 술이나 마셔라."

달튼과 데일의 허물없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르가드의 젊은 왕, 산맥 루턴이 호탕하게 웃으며 상석에서 걸어 내려왔다.


"네 종자의 덩치만큼이나 허풍도 아주 산만 하군, 서리의 장남. 그 끔찍한 눈보라를 뚫고 본성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유르가드의 불술은 언제 마셔도 뼛속까지 타오르는 기분입니다."


달튼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잔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루턴의 곁에는 묵묵히 활을 손질하던 산맥 카일도 함께 다가와 섰다.


"네가 등에 업고 온 그 늙은 사제는 의원들이 달라붙어 화로를 쬐고 독한 약초를 먹인 덕분에 지금은 안쪽 병상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카일의 차분한 말에 달튼이 깊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처음엔 붉은 강물이 맑아진다는 둥 대홍수가 어쩐다는 둥 헛소리를 하실 정도로 실성한 상태였습니다만… 가슴에 품고 있던 그 기이한 징표와 유리병을 보아하니 평범한 수도승은 아닌 듯했습니다."


달튼의 덤덤한 대답에 루턴이 턱수염을 긁적이며 특유의 야성적인 푸른 눈을 찌푸렸다.


"그 늙은 사제가 왜 험준한 산맥을 넘어 우리 쪽으로 도망쳐 왔는지, 그 이유야 뻔하지. 그나저나 사르칸의 그 핏빛 찬탈극 말이다. 넌 아직도 모르는 거냐? 척박한 변방의 산맥에 틀어박혀 있느라 그 거대한 소식마저 눈보라에 파묻힌 모양이군."


"…찬탈극이라니요?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달튼의 서늘한 눈동자가 의문으로 커졌다. 국경의 경계를 서느라 사르칸 중앙에서 벌어진 정변을 전혀 전해 듣지 못한 탓이었다.


"사르칸의 서자 제논 그 미치광이 놈이, 기어이 제 동복형인 유론을 독살하고 붉은 옥좌를 꿰찼단 소리다."


루턴의 건조한 선고에 달튼은 크게 흠칫하며 들고 있던 술잔을 멈칫했다.


"서자가 반역을 일으켜 적통 왕을 시해했다고요?"


"그래. 돈벌레 같은 왼막관과 칼잡이 오른막관 놈들을 완벽하게 구워삶아서 길을 텄지. 그뿐만이 아니다."


카일이 타오르는 붉은 벽난로를 응시하며 묵직하게 덧붙였다.


"옥좌를 차지한 제논 놈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눈엣가시처럼 굴던 조정성교의 대사원마저 며칠 전 완벽하게 무력으로 짓밟았다."


"대사원을 말입니까?"


"끝까지 꼿꼿하게 저항하던 대성언관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대사원 입구에 높이 내걸었다더군. 피를 본 대사원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지."


루턴의 잔혹한 설명에 달튼은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핏대를 세웠다.


"대성언관을 베다니요! 아무리 정통성 없는 미치광이 찬탈자라 해도 선을 넘은 것 아닙니까. 10세기 전 대홍수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조정자를 모시는 숭고한 분을 그리 무참히 도륙하다니!"


비록 유르가드가 척박한 얼음 땅에 쫓겨나 살고 있다 한들, 거친 눈보라와 싸워야 하는 남부의 백성들 가슴 속에는 세상을 구원한 조정성교에 대한 깊은 경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달튼은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제가 눈보라 속에서 구한 그 늙은 어르신이, 피바람을 피해 도망쳐 온 대사원의 고위 사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사르칸의 왕조가 교단을 짓밟은 이 끔찍한 사태는… 대륙의 멸망을 앞당길 겁니다."


"멸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전하, 카일 왕자님. 제가 험준한 빙벽을 넘어 급히 본성으로 달려온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달튼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늙은 사제는 결코 실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영주이신 아버님께서, 사제가 품고 온 기이한 유리병을 직접 확인하셨지요. 그 안에는 붉은빛을 완전히 잃고 탁해진 사르칸의 강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리병의 물이 탁해졌다고?"


"예. 10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끔찍한 재앙의 주기… 대홍수의 징조가 다시 시작된 겁니다."


그 무거운 진실 앞에, 루턴과 카일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단지 미치광이 찬탈자의 난동인 줄 알았던 사르칸의 피바람 뒤에, 두 대륙을 통째로 집어삼킬 거대한 자연의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숨 막히게 했다.


"그 끔찍한 사르칸의 피바람 속에서 귀한 사제님을 구해주어 참으로 고마워요, 서리의 장남."


그때,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은 사내들 뒤로 온화하고도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꺼운 은빛 여우 모피를 두른 자애로운 미소의 여인, 바로 루턴의 어머니이자 유르가드의 대비인 산맥 켈리였다. 그녀의 곁에는 눈부신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산맥 제인 공주가 함께 서 있었다.


"어머니. 누추한 사냥제 연회장엔 어쩐 일로 걸음을 하셨습니까."


루턴이 평소의 불량한 태도를 거두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카일 역시 재빨리 켈리와 제인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에 털가죽을 덧대어 주었다.


"서리의 기사가 험난한 물막이 산맥을 넘어 거룩한 사제 한 분을 업고 오셨다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왔지요."


켈리는 달튼을 향해 몹시 우아하고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며 가슴 위로 조정성교의 표식을 그렸다.


"사르칸이 무지몽매한 권력욕에 눈이 멀어 성스러운 대사원을 짓밟았다니,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홍수의 재앙을 기억하는 우리 유르가드마저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되지요. 사제님께서 눈을 뜨시면, 제가 직접 성심을 다해 모실 생각입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이 계시니, 사제 어르신께서도 분명 큰 위로를 받으실 겁니다."


카일이 제인과 애틋한 시선을 교환하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맹렬하게 몰아치는 유르가드의 밤바람이 거대한 유리창을 덜컹이며 때렸지만, 붉은 벽난로 앞을 둘러싼 이들의 연회는 깊고 무거운 온기를 품은 채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 건너 사르칸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거대한 핏빛 혼란과 멸망의 전조를 직감하며, 두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이들의 묵직한 밤이 천천히 깊어가고 있었다.


***


눈부신 태양과 끝없는 모래사막이 펼쳐진 우측 대륙 엘로한. 그 황량한 사막의 외진 변방에는 기괴하리만치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진 은밀한 성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건조한 모래바람 너머로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에메랄드빛 오아시스가 기적처럼 고여 있었고, 그 뒤로는 금방이라도 붉은 용암을 토해낼 듯 매캐한 흑색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화산이 압도적인 위용으로 솟아 있었다. 물과 불, 생명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질적인 대자연의 조화 속에 세워진 환상적인 건축물. 그곳이 바로 모래 자매단의 비밀스러운 요람인 시쿠미에 사원이었다.


오아시스의 맑은 물가 앞 넓은 수련장에는, 스무 명 남짓한 젊은 여성들이 단정한 수련복을 입고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의 팽팽한 집중력 속에서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중력을 거스른 채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떠올라 있었다.


"집중해라. 두려움은 육체를 갉아먹고, 잡념은 영력을 흩트린다."


수련생들 사이를 유유히 거니는 여인은 시쿠미에 사원의 책임 자매, 시스터 카샤였다. 그녀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럽고 탄탄한 짙은 갈색 피부에, 사슴처럼 길고 우아한 목선을 지니고 있었다. 등 뒤로 두 손을 여유롭게 뒷짐 진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흑표범처럼 예리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서늘한 눈빛이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았다. 단순하고 엄격한 스승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단단한 내면 깊은 곳에는 제자들을 향한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엘로한의 이 척박한 모래땅에서, 우리 자매단이 태동한 지 벌써 8세기가 지났다. 우리는 허황된 구원자에게 기대지 않고 오직 인간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시스터 카샤의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돌멩이가 떠 있는 허공을 맴돌았다.


"여성의 몸으로만 돌파 가능한 한계점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입단과 동시에 세속의 성(姓)과 이름을 영원히 파기하고 오직 자매단의 교리 아래 결속한 것이다. 그 극한의 깨달음 끝, 우리 자매단의 가장 높은 정점에 도달하신 단 한 분만이 '시스터 헬가'라는 위대한 이름을 부여받고 대조모(大祖母)가 되신다."


카샤는 흔들리는 돌멩이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제자의 집중력을 다잡아 주었다.


"그 아래로는 대모(大母)이신 '시스터 엥가'께서 계신다. 엥가 대모님께서는 엘로한 황실에 파견되어, 그들의 조언자로서 이 거대한 대륙의 역사를 우리 자매단의 뜻대로 조율하고 계시지."


카샤의 훈육이 이어지던 그때, 수련장 뒷열에 앉은 몇몇 젊은 시스터들 사이에서 모기 소리만 한 은밀한 뒷담화가 흘러나왔다.


"들었어? 엥가 대모님께서 황성의 젊고 잘생긴 근위병들을 밤마다 처소로 들이신대."


"맞아. 영력을 수련하시기는커녕 세속의 쾌락에 찌들어 남색만 밝히신다던데. 고귀한 대모라는 자리가 아깝지도 않나 봐."


수련생들의 작고 발칙한 속삭임이 오아시스의 바람을 타고 번지는 순간이었다. 뒷짐을 지고 걷던 카샤의 서늘한 눈빛이 벼락처럼 뒷열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잡담을 나누던 시스터들의 허공에 떠 있던 돌멩이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잡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자는 제 영력의 얄팍한 바닥을 드러낼 뿐이다."


카샤의 단호하고도 차가운 일갈에, 뒷담화를 나누던 수련생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고위 자매들의 행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다시 집중!"


카샤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맨 앞줄에 앉은 두 수련생의 돌멩이는 유독 높고 안정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요정처럼 작고 가녀린 체구를 지닌 시스터 헤라였다. 풍성하고 길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조막만 한 얼굴이 드러났고, 유독 크고 맑은 눈망울은 인형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여린 어깨와 슬픔이 고인 듯한 눈동자 너머에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사연과 과거의 무게가 짓눌려 있었다. 본인조차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작고 섬세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허공의 바위는 소름 돋을 만큼 강력한 영력과 강제 통제력에 묶여 떠오르고 있었다.


"헤라, 표정이 굳어 있구나.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야지."


"…네, 카샤 자매님."


헤라의 곁에서 활기찬 목소리로 속삭인 것은 그녀의 절친한 동기, 시스터 텔가였다. 짧게 쳐낸 흑발과 윤기 나는 구릿빛 피부, 뚜렷하고 생기 넘치는 이목구비를 지닌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탄력적이고 강인한 야생동물 같은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돌을 봐, 헤라. 네 것보단 작지만 아주 안정적이잖아!"


텔가가 빙긋 웃으며 허공의 돌을 이리저리 춤추게 하자, 굳어있던 헤라의 맑은 눈동자에도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멀리서 들려온 카샤의 구두 굽 소리에 두 수련생은 서둘러 입을 다물고 다시 돌멩이에 영력을 집중해야 했다.


***


그날 밤, 화산의 미열이 스며들어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시쿠미에 사원의 깊은 숙소.

낮의 엄숙했던 수련 시간이 무색하게, 좁은 방 안에서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받아, 헤라!"


텔가가 침대 위에서 펄쩍 뛰며 허공에 띄운 사과 하나를 영력으로 튕겨냈다.


"앗, 정말! 떨어뜨리면 카샤 자매님한테 또 혼난단 말이야."


헤라가 침대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 떨어지던 사과를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멈춰 세웠다. 가녀린 손짓 하나에 붉은 사과가 두 수련생생의 머리 위를 유성처럼 빙글빙글 맴돌았다.


"우리 헤라는 영력이 이렇게나 강한데 왜 매일 겁을 내는지 몰라."


텔가가 사과를 베어 물며 농담처럼 툭 던졌다. 그 말에 헤라의 맑은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어두워졌다.


"강하다니… 그저, 이따금 내 머릿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아주 슬프고 차가운 과거의 풍경들이 안개처럼 밀려올 때가 있어서 그래. 내가 누구였는지, 왜 이곳 화산 아래에 숨어 지내야만 하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헤라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작게 웅얼거렸다. 그녀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자, 장난치던 텔가도 사과를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래. 우리 자매단의 규율이 참 지독하긴 하지. 입단과 동시에 모든 과거와 이름을 파기해버리니까. 나도 가끔은 내가 이 사막에 오기 전에 어떤 불량배였을지, 아니면 어느 부잣집 딸이었을지 궁금하거든."


"텔가… 넌 정말 예전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헤라가 고개를 들고 속삭이듯 물었다.


"사실, 네게만 몰래 알려주고 싶어서 밤새 기억을 더듬어 본 적이 있었어. 내 진짜 이름을 네가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기억났어?"


"아니. 하얗게 타버린 재처럼 마음속이 텅 비어버렸어.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해도 혀끝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린 느낌이야. 시스터 헬가 대조모님의 강력한 영력이 우리의 기억마저 통제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텔가가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헤라 역시 동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 각자가 품고 있을 찬란하거나 비극적이었을 과거의 이름들은, 폐쇄적인 자매단의 규율 속에 영원히 망각되어 파묻혀 있었다.


덜컥.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숙소의 나무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억을 더듬을 시간에, 영력 통제나 한 번 더 수련하는 게 어떠냐."


문가에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기대어 선 것은 책임 자매 시스터 카샤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서늘한 눈빛이 방 안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반쪽짜리 사과에 멈추었다.


"히익!"


텔가가 기겁하며 손을 젓자, 허공에 떠 있던 사과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굴러갔다. 헤라 역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려 고개를 숙였다.


"카, 카샤 자매님! 이건 그냥 취침 전 가벼운… 집중력 훈련이었습니다!"


텔가가 더듬거리며 변명했지만, 카샤는 매끄러운 갈색 피부 위로 작게 한숨을 쉬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낮에 뒷열의 수련생들이 엥가 대모님을 험담하다 영력을 흩트린 것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더냐. 쓸데없는 과거에 얽매여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은 시스터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죄송합니다, 자매님."


헤라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 가녀리고 애처로운 모습에 카샤의 서늘했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겉으로는 엄격하게 그들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훗날 닥쳐올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수련생을 지켜낼 든든한 조력자다운 묵직한 온기가 카샤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내일 아침 수련 전까지, 두 사람 모두 사원 뒷마당의 화산재를 쓸어내도록. 영력은 단 1할도 써서는 안 된다. 맨손으로 빗자루를 쥐고 육체의 고단함을 느끼며 잡념을 비워내라."


"네, 자매님…."


텔가와 헤라가 풀 죽은 목소리로 나란히 대답했다. 카샤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두 수련생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치만 보며 숨을 죽였다.

화산의 낮은 진동이 사원의 바닥을 기분 좋게 울리고 있는 밤. 잃어버린 이름과 숨겨진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엘로한 변방 시쿠미에 사원의 젊은 시스터들은 거대한 운명이 자신들을 부를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조용히 성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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