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칼바람이 얼어붙은 대지를 사정없이 할퀴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사르칸과 유르가드를 가로막는 거대한 자연의 장벽, 물막이 산맥의 눈보라는 생명체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듯 맹렬했다. 끝없이 굽이치는 핏빛 강물과 풍요로운 흑토가 넘실대던 사르칸의 따스한 기후와는 질적으로 다른, 살을 에는 듯한 지독한 혹한이었다.
새하얀 지옥 같은 눈밭 위로, 둔탁하고 특이한 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서리 달튼과 늙은 사제, 그리고 종자인 언덕네 데일이 탄 두 마리의 짐승이 남기는 소리였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군마가 아니었다. 험준한 물막이 산맥을 넘기 위해 사르칸 과 유르가드의 경계에서 거금을 주고 구한 '염솟말'이라는 희귀한 짐승이었다. 겉보기에는 조랑말처럼 짤막하고 단단한 체형을 가졌지만, 다리 끝에는 말발굽 대신 산양이나 염소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단단하고 뾰족한 발굽이 달려 있었다. 평지에서는 속도를 전혀 내지 못해 짐마차 끄는 당나귀보다도 느렸지만, 이처럼 빙판이 얼어붙고 가파른 바위투성이의 산맥을 오를 때만큼은 절대 미끄러지지 않는 기적의 생물이었다.
선두에는 달튼이 홀로 염솟말을 타고 길을 냈고, 그 뒤를 따르는 염솟말의 넓은 등에는 데일과 늙은 사제가 위태롭게 함께 타고 있었다.
"아오, 씨부랄! 진짜 불알이 꽁꽁 얼어 터지겠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서리 달튼의 충직한 종자인 언덕네 데일이었다. 얼굴의 반을 덮은 덥수룩한 털보에, 두꺼운 짐승 가죽옷을 뚫고 나올 듯 둥그렇게 튀어나온 배를 가진 영락없는 뚱보 사내였다. 커다란 눈방울은 툭 튀어나와 험악하면서도 어딘가 맹한 인상을 주었지만, 곰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골격과 산처럼 부푼 근육은 그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괴력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달튼 나으리! 내 뒤에 탄 이 뼈다귀 영감님, 아니, 사제 어르신이랑 내 덩치를 합치면 이 비싼 염솟말 허리가 아주 똑 부러질 판이구만유! 짐승 헉헉대는 소리 안 들리슈?"
"입 다물라, 데일! 체력을 아껴야 할 때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리는 그 상스러운 입버릇 좀 고치지 못하겠나!"
달튼이 고개를 돌려 매섭게 호통을 쳤지만, 데일은 버릇을 고칠 생각조차 없는 듯 꽁꽁 언 수염을 긁적이며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옘병, 추운 걸 춥다 그러지 그럼 덥다 그럴까유! 애초에 그 따뜻하고 기름진 사르칸 땅을 놔두고 이 얼어 죽을 구덩이로 기어들어 온 게 뉘신데! 성스럽다던 이 영감님은 기도 한 줄 안 올리고 아주 꿀 먹은 벙어리 아닙니까요!"
데일의 투박한 불평 뒤로, 두꺼운 모피에 파묻힌 채 달튼의 등에 업히듯 매달려 있는 비쩍 마른 늙은 사제는 그저 초점 없는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이, 사제 영감님! 신한테 기도 좀 해보쇼! 내 콧물이 얼어서 고드름이 됐는데,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내 코도 똑 부러져서 떨어지는 거 아니요? 그럼 장가도 못 간 내 얼굴은 어쩌란 말이오!"
지치고 짜증이 난 데일이 코를 훌쩍이며 뚱딴지같은 질문을 냅다 던졌다. 달튼이 다시 한숨을 쉬며 제지하려던 찰나, 멍하니 앞만 보던 늙은 사제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데일을 바라보았다.
"코가… 부러져도… 생명 유지에는… 지장이, 없다. 체온이… 30도 아래로 내려가면… 심정지가… 먼저 온다."
한 치의 농담도 섞이지 않은, 기괴할 정도로 진지하고 단편적인 대답. 데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씨부랄! 기도를 해달라니까 왜 끔찍한 저주를 하고 자빠졌소! 심정지? 영감님 진짜 미친 거 아니요?"
"그만해라, 데일!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주변이나 잘 살펴라. 물막이 산맥은 찬탈자의 군대보다 토착 괴물들이 더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염려 마슈. 이 지독한 눈보라 속에서 기어 나올 미친 놈들이 대체 어딨—"
그 순간이었다. 데일의 실없는 투덜거림이 일순간 뚝 멎었다. 매서운 칼바람 사이로, 짐승의
울음소리도 인간의 말도 아닌 기괴하고 날카로운 괴음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끽! 끼기기긱!
"망할! 달튼 나으리, 저게 뭡니까요!"
데일이 기겁하며 외치자, 앞장서던 달튼이 지체 없이 염솟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달튼의 예리하고 푸른빛을 띤 장검이 눈보라 속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
새하얀 눈구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십여 마리에 달하는 흉측한 무리였다. 두 발로 걷는 모양새는 사람과 비슷했으나 체구가 몹시 비쩍 말라 있었고, 온몸이 빳빳한 흰 털로 겹겹이 뒤덮여 있어 새하얀 설원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기괴한 짐승들이었다.
이 험준한 물막이 산맥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흉포한 토착 괴물, '두억시니‘.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괴한 언어로 꽥꽥거리며 소통하더니, 조잡하게 갈아 만든 날카로운 돌도끼와 돌창 등 석기 무기들을 치켜들고 일행을 향해 호전적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두억시니 떼다! 진형을 갖춰라, 데일! 사제 어르신이 다치지 않게 호위해!"
달튼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서리 가문은 백 명 중 한 명꼴로 기이하게 되살아나는 망자들을 처리하거나, 이 험준한 물막이 산맥에 출몰하는 두억시니들을 토벌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아온 일족이었다. 달튼에게는 이 눈 덮인 괴물들의 습성과 잔혹함이 아주 익숙했다.
"옘병, 털복숭이 새끼들이 기어코 기어나오는구만!"
데일 역시 늙은 사제를 말등에 단단히 엎드리게 한 뒤 땅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그의 거대한 손에 들린 것은, 일반 장정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들어 올릴 법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날 전투 도끼였다.
카앙-! 서걱!
가장 먼저 돌창을 찌르며 달려든 두억시니의 목통을 달튼의 푸른 검격이 깔끔하게 베어 넘겼다. 베테랑 검사이자 괴물 사냥에 도가 튼 서리 가문의 핏줄다운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솜씨였다.
"뒈져라, 이 털뭉치 새끼들아!"
그 곁에서는 데일의 무식한 도끼질이 시작됐다. 부웅-! 찢어질 듯한 파공음과 함께 데일이 그
거대한 양날 도끼를 한 손으로 풍차처럼 휘둘렀다.
콰직! 쩌저적!
정교한 검술 따위는 필요 없었다. 괴력의 뚱보가 휘두르는 압도적인 질량과 힘 앞에, 달려들던 두억시니 두 마리가 도끼날에 맞고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눈밭 위로 흩뿌려졌다. 붉은 피와 흰 털이 튀었지만, 데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검술이 춤을 추는 달튼과, 전차처럼 밀어붙이는 데일의 호흡은 완벽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두억시니들은 짐승처럼 무작정 달려드는 존재가 아니었다. 녀석들은 기괴한 언어로 서로 소통하며 교묘하게 진형을 짜고, 사각지대에서 날카로운 돌도끼를 던져댔다. 삼십 마리의 맹렬한 협공에 밀려, 달튼과 데일, 그리고 사제를 태운 두 마리의 염솟말은 점차 산맥의 가장자리로 몰리기 시작했다.
"헉… 헉… 나으리! 놈들이 생각보다 잽쌉니다유!"
데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끼자루로 돌창을 쳐냈다. 두 사람의 뒤편은 천길낭떠러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을 등진 채, 염솟말들이 겁에 질려 불안하게 발굽을 구르며 울음소리를 냈다. 살아남은 이십여 마리의 두억시니들이 완전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난 달튼의 예리한 푸른 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를 뒤집어쓴 데일도 헉헉대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씨부랄. 여기서 얼어 뒈지는 게 아니라 저 털복숭이 새끼들한테 돌로 쳐맞아 뒈지게 생겼구만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염솟말 위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늙은 사제가 돌연 덜덜 떨리는 앙상한 몸을 이끌고 안장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철퍼덕.
눈밭에 엎어지듯 착지한 그는, 자신들을 향해 쇄도하는 두억시니 떼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듯 절벽 끝의 단단한 암반 위로 기어갔다. 그러고는 앙상한 맨손으로 차가운 바닥을 짚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기묘한 단어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눈 하중 밀도... 파형의 공명..."
절벽 끝에서 바닥을 더듬는 늙은 사제의 기행에, 피투성이가 된 도끼를 치켜들고 방어태세를 취하던 데일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지금 뭣하는 겨!"
달튼 역시 당황했지만, 사제의 텅 빈 눈동자 너머에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는 다급히 데일을 제지했다.
"잠시 지켜보자."
"놈들이 코앞까지 왔고 절벽인디...!"
데일이 눈알을 부라리며 펄쩍 뛰었다. 두억시니들의 날카로운 돌도끼가 데일의 코앞까지 날아들던 바로 그 찰나였다.
늙은 사제의 앙상한 손가락이 바닥의 암맥을 정확하고 기묘한 리듬으로 세 번, 툭툭툭 두드렸다.
우르르르릉—!
순간, 물막이 산맥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폭발했다. 달튼과 데일이 서 있는 절벽의 작은 암반을 제외한, 그들 앞쪽의 거대한 경사면 전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산사태였다. 수천 톤의 눈과 바위, 그리고 얼음덩어리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쏟아져 내리며 일행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던 삼십여 마리의 두억시니 떼를 한꺼번에 휩쓸어버렸다. 기괴한 비명조차 압도적인 대자연의 울림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으아아악!"
데일이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염솟말들은 본능적으로 단단한 암반에 특유의 발굽을 박아 넣고 버텼다.
불과 몇 초.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던 산사태가 절벽 밑의 심연으로 모습을 감추자, 주변은 끔찍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휘몰아치던 눈보라의 먼지가 걷히고, 일행이 서 있는 비좁은 절벽 끝 바위지대 앞으로는 두억시니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텅 빈 낭떠러지만이 거대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행이 서 있는 암반만 기적처럼 남겨둔 채 괴물들만을 완벽하게 휩쓸어버린 끔찍한 자연의 파괴력이었다.
"헉… 헉……."
달튼은 얼어붙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눈밭에 주저앉은 뚱보 데일은 턱이 가슴까지 떨어질 정도로 입을 떡 벌린 채, 조금 전까지 털복숭이 괴물들이 서 있던 텅 빈 절벽 앞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거대한 손에서 양날 도끼가 툭 떨어져 눈밭에 파묻혔다.
바닥을 짚고 있던 늙은 사제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그저 멍한 표정으로 제 앙상한 손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이고도 기적적인 풍경 앞에, 데일이 덥수룩한 수염을 벅벅 긁적이며 맹한 눈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벌나네, 씨부랄… 그래도 사제는 사제가 맞는갑다."
***
물막이 산맥 남측, 혹한의 땅 유르가드.
거대한 산맥이 찬 바람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거대한 빙벽 탓에 유르가드는 일 년의 절반 이상이 지독한 눈보라와 얼음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었다. 사르칸의 기름진 흑토와 핏빛 강물이 뿜어내는 따스한 풍요로움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새하얀 침엽수림과 꽁꽁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는, 오직 강한 자만이 짐승을 사냥하고 모피를 벗겨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앗-!
침엽수림 사이로 매서운 화살 한 발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 거대한 뿔을 가진 순록의 목덜미에 정확히 꽂혔다.
"명중이다!"
눈 속에 매복해 있던 짐승 가죽을 쓴 거친 사내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일제히 뛰쳐나갔다. 그들은 두꺼운 곰과 늑대의 털가죽을 겹겹이 덮어쓰고, 뺨에는 짐승의 피를 으깨어 바른 채 도끼와 창을 들고 있었다. 척박한 얼음의 땅 유르가드 특유의 거칠고 호전적인 수렵 문화였다.
"하하하! 오늘 저녁은 갓 잡은 순록 고기에 독한 불술을 양껏 마실 수 있겠군!"
거대한 활을 든 채 눈더미를 털고 일어나는 청년, 산맥 카일이었다. 그는 사르칸 왕조 특유의 짙은 선을 지녔지만, 오랜 세월 유르가드의 혹한 속에서 단련된 탄탄한 근육과 야성적인 기백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죽은 순록에게 다가가 단검으로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낼 준비를 하자, 곁에 서 있던 사내가 미간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동네 사냥꾼처럼 태평하게 웃고만 있을테냐."
질 좋은 담비 가죽 코트를 걸친 사내, 현재 유르가드를 다스리는 젊은 왕 산맥 루턴이었다.
"태평하다니. 유르가드의 사내라면 모름지기 제 손으로 피를 묻혀 사냥감을 취하는 법이잖지. 돌아가신 선왕께서도 그리 가르치셨고."
카일이 피 묻은 손을 눈으로 대충 닦아내며 싱긋 웃었다.
"아버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루턴이 답답하다는 듯 주변의 하인들을 물린 뒤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우리가 어릴 적, 이 얼어붙은 성정에서 눈싸움을 하며 구르던 때 기억해? 난 그때부터 네가 언젠가 이 척박한 땅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카일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우린 다 알고 있어. 네 몸속엔 우리 산맥 가문의 피가 아니라, 사르칸의 선대 왕 노을 리온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루턴의 목소리에 뼈가 실렸다.
"넌 그 핏빛 강물이 흐르는 땅의 진짜 적통자, '노을 카일'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 차가운 눈밭에서 순록 가죽이나 벗기며 썩고 있을 셈이지?"
루턴의 답답함 섞인 일갈에도, 카일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이곳 유르가드의 작은 영지로 쫓겨 온 어머니 노을 엘리. 그리고 가여운 모자를 몰래 품어준 선대 왕 산맥 칸. 카일은 그 은혜를 입고 자라며 옥좌에 대한 욕심을 눈보라 속에 묻어버린 지 오래였다.
"루턴. 내겐 지금 이 하얀 눈밭과… 내 곁의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
카일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눈처럼 하얀 털망토를 두른 아름다운 여인이 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루턴의 여동생이자 유르가드의 공주, 산맥 제인이었다.
"오라버니, 다친 곳은 없으시지요?"
제인이 카일의 뺨에 묻은 순록의 피를 제 따뜻한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눈밭 위였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는 봄날의 햇살 같은 애틋한 감정이 짙게 녹아있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오누이로 자랐으나,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깊은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카일이 제인의 차가워진 손을 제 큰 손으로 꽉 쥐어주자, 제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애틋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턴이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였다.
삐이익-! 뺙!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울려 퍼졌다.
"눈매로군."
카일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새하얀 깃털로 뒤덮여 설원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맹금류, 눈매. 그 짐승은 영하 수십 도의 극한에서도 안구가 얼지 않도록 투명하고 두꺼운 눈막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서운 산맥의 칼바람을 뚫고 대륙을 횡단할 수 있는 유르가드 특유의 생물이었다. 그 뛰어난 귀소본능과 생존력 덕분에 유르가드 왕실의 가장 빠르고 은밀한 소식통으로 쓰이고 있었다.
푸드덕-!
거대한 눈매 한 마리가 루턴이 내민 두꺼운 가죽 팔목 위로 안착했다. 루턴은 익숙하게 매의 발목에 묶인 작은 가죽통을 풀어내어 그 안의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를 읽어 내려가던 루턴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루턴? 왜 그래. 사르칸에서 또 무슨 소식이라도 온 거야?"
카일이 제인을 제 뒤로 살짝 숨기며 물었다.
"제논 그 미친 찬탈자 놈이 금막관의 목을 치고 옥좌를 차지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루턴이 양피지를 구기듯 쥐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르칸 궁성에 심어둔 밀정들에게서 방금 새로운 서신이 왔어. 대외적으론 지병으로 죽었다고 선포된 유론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더군."
"…시체가 사라졌다고?"
카일의 짙은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고 몸집이 작은 난쟁이였던 가엾은 이복형, 유론. 제논이 형을 독살하려 했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누군가 형을 빼돌려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속에서 피어오른 한 줄기 의혹 앞에 카일은 할 말을 잃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카일!"
루턴이 카일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사르칸의 왕좌는 지금 모래성처럼 흔들리고 있어. 지금이야말로 적통인 네가 나서야 할때다! 찬탈자 제논을 끌어내리고 네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전하님! 카일 왕자님!"
루턴의 간곡한 부추김을 끊어낸 것은, 북쪽 산맥 길목에서 경계를 서던 하인들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산맥 쪽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카일과 루턴, 그리고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쥐고 몸을 돌렸다. 눈보라가 걷히는 능선 너머로, 기괴할 정도로 둔탁한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사르칸의 기사들이 국경을 넘어 추격해 온 것인가 싶어 카일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하지만 하얀 눈무덤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찬탈자의 군대가 아니었다.
지독한 눈보라와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흔적을 훈장처럼 뒤집어쓴 기이한 형색의 세 사람이었다. 선두에는 예리하고 푸른빛을 띤 장검을 쥔 사내가 경계심 가득한 날 선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짐승의 가죽을 걸친 털보에 산만 한 덩치를 가진 뚱뚱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거대한 양날 도끼를 둘러멘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구의 사내 등에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비쩍 마른 노인이 짐짝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국경 변방에서나 볼 법한 기적의 산말, 염솟말 두 마리에 몸을 의지한 정체불명의 세 사람이, 산맥의 거대한 눈보라를 뚫고 마침내 유르가드 본성의 순록 사냥터 한가운데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카일의 화살촉과, 지칠 대로 지친 이방인의 푸른 검 끝이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교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