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난쟁이

by choiplan

비릿한 소금기와 썩어가는 선창의 목재, 그리고 화물칸에 빼곡히 실린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한데 엉켜 지독한 구역질을 자아냈다.

사르칸의 항구를 떠나 우측 대륙 엘로한으로 향하는 거대한 무역선.

한 달에 한 번씩 두 대륙 사이의 정해진 항로를 오가는 이 거대한 상선의 가장 밑바닥 선창은, 짐짝과 헐값에 팔려 가는 노예, 그리고 푼돈을 내고 밀항하는 밑바닥 인생들이 뒤엉켜 뿜어내는 퀴퀴한 악취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이 쓸모없는 반쪽짜리 괴물 놈아! 갑판에 토사물이 흥건한데 언제까지 굼벵이처럼 기어 다닐 거냐!"

거친 고함과 함께 육중한 뱃사람의 발길질이 작은 사내의 앙상한 등짝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큭…!"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사내가 계단 아래로 짐짝처럼 나뒹굴어, 차갑고 축축한 선창 바닥에 처박혔다. 낡고 해진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그는 일반적인 성인 남성의 허리춤에도 채 오지 않을 만큼 기형적으로 작은 체구의 난쟁이였다.


파도가 뱃전을 거칠게 때리며 배가 요동칠 때마다, 그의 조그만 몸뚱이도 이리저리 쓸리며 거친 나무 궤짝에 부딪혔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몸 위로는 시퍼런 멍과 핏자국이 가득했고, 병약하고 창백한 얼굴 위엔 지독한 뱃멀미로 인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무역선 위에서 작은 사내는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거친 파도에 배가 흔들릴 때마다 뱃사람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매질을 당했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짐창고의 좁은 틈새를 기어 다니며 맨손으로 쥐를 잡아야 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고통이 폐부를 찔렀지만, 사내는 그 어떤 발악도, 살려달라는 비굴한 애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묵묵히 닥쳐오는 고초를 삼켜내고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지자, 뱃멀미에 시달리던 자들의 신음과 코 고는 소리만이 어두운 선창을 맴돌았다.

찬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낡은 나무 궤짝 틈새에 간신히 몸을 웅크린 난쟁이는 미세하게 어깨를 떨며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훅훅 불어져 나왔다.

그때, 삐걱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와 그의 곁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쯧쯧. 이 험한 뱃길을 그 몸뚱이로 살아서 넘길 수 있으려나 몰라."


얼굴이 소금기에 절어 쭈글쭈글한 늙은 뱃사람이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 돌덩이 같은 검은 빵 조각과 반쯤 남은 낡은 가죽 물통을 작은 사내의 품에 무심하게 툭 던졌다.


"먹어 두쇼. 그 앙상한 뼈다귀로 바다 밑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유."


작은 사내는 품에 떨어진 빵과 물통을 굽어보더니,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물통을 쥐었다.


"…호의에 감사하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투는 어딘가 단정하고 차분했다. 밑바닥 인생들이 쓰는 억센 욕설이나 굽신거리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늙은 뱃사람이 픽 실소를 터뜨렸다.


"말뽄새 하고는. 어디 배운 놈들 시중이라도 들다 도망친겨? 아무튼 그 조그만 몸으로 엘로한까지 살아서 가려면 단단히 버텨야 할 게요."


사내는 메마른 목을 축인 뒤, 단단하게 굳은 빵을 아주 조금씩 베어 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저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것이 조금 있을 뿐이오. 그나저나, 상선의 선원치고는 꽤나 여유로워 보이시는군. 이 무역로를 꽤 오래 다니신 모양이오."


"오래 다닌 정도가 아니지!"


노인은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르칸의 철광석과 엘로한의 향신료를 맞바꾸는 이 지루하고 고된 뱃길만 스무 번을 넘게 탔지. 나만큼 우측 대륙을 잘 아는 놈도 이 배엔 없을걸?"


사내의 깊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그렇다면 내 하나 묻겠소. 내 평생 사르칸의 검은 흙과 울창한 숲만 보고 자라, 그곳이 어떤 땅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소만… 이 끔찍한 바다를 건너면 닿게 될 엘로한이라는 곳은, 대체 어떤 세상이오?"


사내의 진지한 질문에 늙은 뱃사람은 어두운 천장을 턱으로 가리키며 뻐기듯 대답했다.


"사르칸 촌놈들은 상상도 못 할 세상이지. 거긴 말이지, 발밑에 밟히는 게 온통 시꺼먼 흙이나 꽁꽁 언 얼음이 아니요.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새하얗고 노란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지. 땅 자체가 푹푹 찌는 불지옥, 사막이라 이 말이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모래라… 생명이 뿌리내리기엔 참으로 척박한 땅이겠군. 어찌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모여 문명을 세웠단 말이오?"


"꼭 그렇지도 않수."


노인이 이가 빠진 입으로 낄낄거렸다.


"그 쪄죽을 모래구덩이 한가운데를 아주 기가 막히게 관통하는 거대한 강줄기가 하나 흐르거든. 사르칸 놈들 동네처럼 뻘건 피 냄새 진동하는 강이 아니요. 바닥이 다 비칠 정도로 아주 맑고 투명한 강물이지. 그 거대한 물줄기 하나가 사막의 그 많은 엘로한 놈들 목줄을 쥐고 먹여 살리는 셈이지."


사내의 미간이 흥미롭다는 듯 좁혀졌다.


"사르칸의 풍요는 과거 세상을 휩쓸었던 대홍수가 남긴 검은 흙 덕분이라지. 허나 엘로한은 그 대홍수의 범위를 비껴간 땅이라 들었소. 하늘의 심판을 피한 축복받은 땅이로군."


"축복? 쯧, 그래서 그놈들이 재수 없는 거지."


노인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혀를 끌쯧 찼다.


"엘로한 놈들은 우리랑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달라. 우리 사르칸 사람들이 허구한 날 전설 속에 나오는 관찰자니, 대홍수니 하면서 하늘 무서운 줄 알고 굽신거릴 때, 그놈들은 콧방귀도 안 뀐다지. 신상(神像)을 모시지도 않고, 기도 같은 건 할 줄도 모르고. 애초에 재앙을 겪어보질 않았으니 두려울 게 없는 게요."


사내가 먹던 빵을 멈추고 노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신의 분노를 본 적이 없으니 경배할 이유도 없는 것이로군.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믿고 그 거친 모래 폭풍을 견뎌낸단 말이오?"


"인간이지, 인간! 오로지 지들 살 궁리만 하면서 지독하게 대가리를 굴려온 거요."


노인은 주름진 손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 거대한 것을 그리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엘로한의 항구에 닻을 내리면 아주 눈깔이 튀어나올 거외다. 우리가 하늘에 엎드려 비는 동안, 그놈들은 쓸모없는 모래밭에서 스스로 굴러가는 기괴한 쇳덩어리들을 만들어 냈어! 사르칸이나 유르가드보다 족히 백 년은 앞서 사는 놈들 같단 말이지. 게다가 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뾰족한 탑들은 또 어떻고. 대홍수가 휩쓸고 가지 않은 세상은 그런 요물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낸 모양이오."


노인의 과장 섞인 묘사를 듣고 있던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자리를 지운 곳에 인간 스스로 쌓아 올린 오만한 탑이라…. 참으로 흥미롭소. 피를 토하더라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지는군."


사내의 덤덤한 감상에 늙은 뱃사람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어려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만. 아무튼 반쪽짜리 기형아 몸뚱이를 가진 당신도 거기 가면 뭐라도 밥벌이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지. 밤에 너무 앓는 소리 내지 마쇼, 시끄러우니까. 살아서 흙이나 밟아보자고."


노인이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잠깐."


사내의 나지막한 부름에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낡은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사내의 덜덜 떨리는 손이 자신의 품속 깊은 곳을 뒤적거리더니, 어둠 속으로 무언가를 툭 던졌다.


챙그랑-


노인의 발치에 떨어져 둔탁한 금속음을 낸 물건. 뱃전의 좁은 틈새로 스며든 창백한 달빛이 그것의 표면을 비추었다. 노인의 푹 꺼진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며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사르칸의 최고급 세공술로 빚어진, 영롱하게 빛나는 묵직한 '금화' 한 닢이었다. 이 더럽고 냄새나는 무역선에서 쥐를 잡던 앙상한 난쟁이 거렁뱅이의 품에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


"이, 이… 이게 무슨…."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얼어붙어 있자, 사내가 남은 빵 조각을 씹어 삼키며 덤덤하게 읊조렸다.


"호의에 대한 보답이오."


그 말만을 남긴 채, 사내는 미련 없이 돌아누워 몸을 웅크렸다. 노인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금화를 낚아채 품속에 쑤셔 넣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파도가 뱃전을 거칠게 때렸다.

눈을 감은 난쟁이 사내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서늘하게 웃음 짓던 얼굴과 피 웅덩이 위로 나뒹굴던 누군가의 잘린 목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기어코 살아남아 저 바다 너머의 사막, 한 번도 본 적 없는 엘로한의 땅을 밟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신이 다시금 세상의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상선은 끊임없이 매서운 파도를 갈랐고, 미지의 대륙 엘로한을 향한 기나긴 밤은 사내의 서늘한 다짐과 함께 묵묵히 깊어가고 있었다.


***


사르칸의 웅장한 궁성, 그중에서도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튼 왕의 집무실.

거대한 아치형 창밖으로는 10세기 전 세상을 휩쓸었던 대홍수가 남기고 간 거대한 흔적, 철분을 가득 머금어 짙은 붉은색을 띠는 강물이 기괴한 혈관처럼 굽이치고 있었다.

그 핏빛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흑토는 유르가드의 혹한과는 대비되는 사르칸 특유의 눈부신 풍요와 생명력을 뿜어냈다.

그러나 창밖의 찬란한 대지와는 달리,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집무실 안의 공기는 당장이라도 피가 튈 듯 서늘하고 팽팽했다.


사방을 두른 흑단목 벽면에는 사르칸 왕조의 유구한 역사를 새긴 정교한 금박 부조가 번쩍였고,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수백 개의 촛불을 태우며 위압적인 빛을 뿌려댔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 최고급 붉은 벨벳과 흑요석으로 세공된 옥좌에는 한 사내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사르칸의 선대 왕 노을 리온과 이름 모를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천박한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뒷방의 벌레처럼 멸시받다가, 기어이 핏빛 거사를 치르고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게 된 새로운 왕, 노을 제논이었다.

그는 사르칸 왕조 특유의 완전한 동양적인 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스물여섯의 젊고 수려한 사내였다. 새까만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드러난 그의 이목구비는 어딘가 위태롭고 병적인 불길함을 품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예리한 눈매는 맹수 특유의 나른함과 신경질적인 광기를 동시에 띠었고,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는 세상을 향한 지독한 조롱과 뼛속 깊은 결핍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태생의 천박함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역대 어느 왕들보다도 화려하고 무거운 금사(金絲) 자수 비단옷을 겹겹이 걸치고 있었다. 제논은 피가 맺힐 정도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집무실 바닥을 붉게 물들인 값비싼 양탄자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고요한 실내에 그의 불안한 숨소리와 잇새로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틱, 틱, 징그럽게 울려 퍼졌다.


끼이익-


그때, 수백 년 된 참나무로 깎아 만든 육중한 집무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제논의 나른하던 눈동자가 독사처럼 번뜩이며 문턱을 향했다. 붉은 카펫을 밟고 들어선 자는 사르칸의 양 날개를 쥐고 있는 두 명의 실권자였다.

가장 먼저 걸음을 내디딘 자는 눈부시게 은빛으로 세공된 갑옷을 차려입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칠고 묵직한 금속음을 내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갈색 벤시. 귀족 기사들의 정점이자 왕실 군대를 통솔하며 사르칸 제일의 무력을 행사하는 우측의 절대자, 오른막관(右幕官)이었다. 완전한 동양인의 이목구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장정을 어린아이로 보이게 만들 만큼 압도적으로 거대한 골격과 2미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신장을 가진 괴물 같은 사내였다. 그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샹들리에의 불빛이 가려지며 옥좌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벤시의 거대한 그림자 곁에는,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짙은 녹색의 비단 단령을 입은 채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걸어 들어온 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초원 할리. 왕이 직접 내는 까다로운 서릿문 시험을 통과하여 평민 출신으로 최고위관에 오른 입지전적인 지략가, 왼막관(左幕官)이었다.

각 영지의 상단과 영주들의 막대한 사병, 그리고 사르칸 전체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는 그는 깊게 파인 주름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호랑이 같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뱀처럼 차분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그 의연한 눈동자는 뿜어져 나오는 연륜만으로도 거구의 벤시 못지않은 묵직한 위압감을 풍겼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전하."


거구의 오른막관 벤시가 옥좌 앞까지 다가와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형식적인 예의는 갖추었으나, 산처럼 거대한 몸을 굽혀 무릎을 꿇지도, 고개를 깊이 숙이지도 않은 오만하고 고압적인 인사였다.

제논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옥좌의 팔걸이를 꽉 틀어쥐었다.


"시체는?"


"아직, 수색 중입니다."


순간, 제논의 나른하던 눈빛이 흉폭하게 뒤집혔다. 당장이라도 탁자 위의 은잔을 저 거만한 거구의 낯짝에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제논은 턱관절이 도드라지도록 이를 악물며 화를 간신히 짓눌렀다. 천한 서자인 자신이 이 견고한 왕좌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저 막대한 돈줄을 쥔 초원 할리와 왕실 군대를 쥔 갈색 벤시가 자신을 쓸만한 장기말로 여겨 찬탈에 '동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수색 중이라."


제논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과장되게 한숨을 쉰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썩어빠진 왕조를 갈아엎은 이 위대한 거사(擧事)가 성공으로 끝난 지가 며칠인데, 아직도 수색 중이라는 모호한 답을 들어야 합니까. 당신들의 그 잘난 귀족 기사들과 영주들의 사병들이 궁성의 쥐구멍 하나까지 다 틀어막고 철통같은 포위망을 쳤다면서요!"


제논의 가시 돋친 비아냥에도 두 막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벤시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제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곁에서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던 왼막관 초원 할리가 두 손을 소매에 가지런히 모은 채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신의 자금으로 궁내 호위들을 매수하고, 오른막의 기사들로 전각을 완벽히 장악하는 것까진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만… 왕의 핏줄을 이어받아 그 알량한 정통성에 목을 매던 늙어빠진 금막관(金幕官) 영감이 제 목숨을 던져 지독하게 앞을 막아섰지 않습니까. 전각 입구에서 핏물이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사투가 벌어졌고, 그 지저분한 아수라장의 틈을 타 누군가 폐위된 전대 왕의 신병을 어둠 속으로 빼돌린 것입니다."


명색이 서릿문을 통과한 대륙 제일의 지략가다운, 억양의 높낮이조차 없는 완벽하게 냉철한 보고였다.


"그래서."

제논이 탁자를 거칠게 짚으며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억눌린 분노로 그의 하얀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기사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성인 남성의 허리춤에도 채 오지 않는 기형적인 난쟁이 놈입니다! 스스로 몇 걸음 걷지도 못해 땅바닥을 기며 숨을 헐떡이는 그 조그만 반쪽짜리 몸뚱이를, 이 사르칸 제일의 무력과 재력을 쥐었다는 당신들이 놓쳤다는 게 변명이나 됩니까!"


제논의 날 선 추궁에 오른막관 벤시의 굵은 미간이 좁혀졌다. 폐위된 왕 노을 유론은 태어날 때부터 몹시 병약했고, 체구가 뒤틀린 작은 난쟁이였다.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그 가엾은 놈이 그날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연기처럼 자취를 감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대외적인 부고장에는 이미 병약했던 그 난쟁이 놈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고, 내 이름으로 대륙 전체에 못을 박아두었소. 내가 그놈의 병환을 낫게 해주겠다며 친히 달여 올린 그 '특별한 약'을 받아 마시고 바닥을 뒹굴며 피를 토하는 것까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는데, 대체 그 숨 끊어진 고깃덩어리가 어디로 증발한 거냔 말이오!"


그 알량한 핏줄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금막관마저 베어버린 마당에, 혹여라도 적통인 그 반쪽짜리 괴물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지방의 관망하던 영주들이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었다.

제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자, 이번에도 왼막관 초원 할리가 호랑이 같은 눈으로 그를 직시하며 단호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치사량에 달하는 독이었습니다. 그 병약한 몸으로 궁성을 빠져나가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희 왼막을 구성하는 상단과 영주들은 '불확실성'을 아주 혐오합니다."


초원 할리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내뿜는 기백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가 이 피비린내 나는 거사에 동조한 것은, 오로지 무능한 핏줄을 갈아치워 이 막대한 사르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불안에 떨며 시체에 집착하실 것이 아니라, 옥좌에 앉아 속히 이 흔들리는 국정을 안정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저희가 약속한 막대한 세수와 자금이 사르칸 전역에 차질 없이 융통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쥔 돈줄의 힘을 과시하는 교묘하고도 오만한 압박이었다. 제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늙은 목통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제논은 턱을 꽉 깨물며 끓어오르는 살의를 또 한 번 짓씹어 삼켰다.


"…부디 내 눈으로 직접 그 반쪽짜리 괴물 놈의 싸늘한 시신을 확인하게 해 주시오. 동쪽 대륙 엘로한으로 향하는 모든 항구는 물론이고 남쪽의 유르가드로 가는 길목 또한 이 잡듯이 뒤져주길 바라오."


제논이 신경질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애써 태연한 척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내 눈엣가시 같던 그 역겨운 대사원 쪽은 어찌 처리했소? 10세기 전의 낡아빠진 대홍수 전설 따위를 들먹이며, 천한 핏줄 운운하고 내 권위에 흠집을 낼 그 망상병 걸린 이단자 놈들 말입니다."


제논의 화제 전환에,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오른막관 갈색 벤시가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의 명대로 남측에 틀어박혀 있던 사원은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하늘의 신벌이 내릴 거라며 끝까지 꼿꼿하게 저항하던 대성언관의 목을 제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단칼에 베어 사원 입구에 높이 내걸었지요. 그 잘난 최고위 사제가 죽고 피를 보자, 남은 수도승들은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 투항했습니다. 이제 대성언관의 잘린 목이 사르칸의 붉은 강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한, 헛된 재앙을 들먹이며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자들은 없습니다."


그제야 제논의 비스듬한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말려 올라갔다. 잔챙이들이 알아서 땅바닥을 기어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아침 들은 것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보고를 마친 거구의 벤시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탐욕스럽게 번뜩이는 눈으로 제논을 내려다보았다.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전하. 거사 전 제게 약속하셨던 그 황금 잔을 하루빨리 내어주신다면… 제가 기사들을 더 강력하게 움직여 시체 수색조를 늘리고 오만한 귀족들을 통제하기가 한결 수월하겠지요."


갈색 벤시가 이 피 묻은 거사에 가담한 진짜 목적. 핏줄의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족 친척 중 단 한 명만이 누릴 수 있었던 막강한 권력, 바로 '금막관'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노골적인 청탁과 거래의 요구에 제논은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물론이지요, 오른막관. 이 궁성의 옥좌가 완전히 안정되는 즉시, 가장 먼저 그 황금 잔에 최고급 술을 가득 따라 당신에게 올리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자신들이 원하는 확답을 뜯어낸 두 막관이 가벼운 인사를 올린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육중한 문턱을 넘어 유유히 빠져나갔다.


끼이익- 쿵.


두꺼운 참나무 문이 닫히고 촛불 일렁이는 집무실에 다시 홀로 남겨지자, 제논의 수려한 얼굴에서 비릿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옥좌의 붉은 팔걸이를 제 손톱이 부러져 피가 나도록 꽉 틀어쥐었다.

눈엣가시 같던 사원을 짓밟고 마침내 사르칸의 주인이 되었건만, 완벽하게 시체를 수습하지 못한 찝찝한 잔재와 자신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꼭두각시 취급하는 오만한 막관들의 태도가 그의 목을 지독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어디로 쥐새끼처럼 숨었든, 반드시 그 난쟁이 놈의 시체를 찾아내 붉은 강에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마."


서늘하고 광기 어린 집무실 안. 완벽한 지배자가 되지 못한 찬탈자의 짓눌린 열등감과 초조함만이 붉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섬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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