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막이 산맥 너머, 유르가드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견고한 작은 성.
거친 눈보라를 뚫고 성의 안뜰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어섰다. 사냥을 마친 스물여섯의 젊은 영주, 산맥 카일이었다.
어깨에는 갓 숨통을 끊은 거대한 짐승의 사체가 얹혀 있었다. 유르가드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그의 호흡은 짐승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모자에 덮인 흑단 같은 머리칼의 눈을 털어내자, 이질적이면서도 단숨에 시선을 옭아매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두 대륙의 피가 절묘하게 섞인 혼혈이었다. 동양의 온화함을 품은 사르칸 특유의 짙고 단정한 분위기 위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북부의 깊은 골격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늘하게 창백한 피부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담담한 눈빛은, 척박한 남부의 변방 성채에서 그저 짐승이나 쫓으며 살기엔 묘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산맥 카일이 사냥감을 하인들에게 넘기고 성의 널찍한 중앙 홀로 들어섰다.
타오르는 거대한 화로 앞에는 그의 어머니, 노을 엘리가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었다.
세월의 풍파와 남부의 매서운 칼바람은 한때 사르칸의 가장 고귀했던 왕비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녀가 지닌 본연의 꼿꼿함마저 앗아가지는 못했다.
은빛이 희끗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태만으로도 공간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깊고 푸른 눈동자와 기품 있게 솟은 광대뼈에서는 쫓겨난 자의 처량함 대신 꺾이지 않는 고고한 자존심이 배어 나왔다.
"어머니, 다녀왔어요."
카일이 얼어붙은 겉옷을 벗어내며 다가갔다. 하지만 노을 엘리의 시선은 타오르는 장작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의 창백한 손에는 붉은 밀랍이 깨어진 낡은 양피지 한 장이 위태롭게 쥐어져 있었다.
"카일."
엘리의 떨리는 목소리가 화로의 온기를 갈랐다.
"사르칸에서 소식이 왔단다."
카일의 발걸음이 멈췄다. 험난한 물막이 산맥을 넘어 유르가드의 작은 성까지 사르칸의 소식이 닿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유론이 죽었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홀 안을 채웠다.
산맥 카일의 짙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동복형이자, 사르칸에 남겨진 외로운 왕 노을 유론.
사실 카일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 형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카일은 과거 노을 엘리가 왕비 자리에서 밀려나 유르가드로 쫓겨나기 전날 밤, 사르칸의 선대 왕 노을 리온과의 마지막 밤에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기억조차 섞이지 않은 낯선 형제.
하지만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로 전해 듣던 옛이야기 속에서, 형 노을 유론은 늘 병약하지만 심성이 곱고 따뜻한 소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형의 부고는 기묘하고도 먹먹한 통각으로 카일의 가슴을 찔렀다.
"제논의 짓이겠죠."
카일은 덤덤하게, 그러나 뼈저린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노을 엘리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춘부의 핏줄인 그 비열한 서자가 기어이 반역을 일으킨 거겠지. 이제 사르칸의 왕은 노을 제논이야."
카일은 화로 곁의 의자에 무겁게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의 행동에서 사물이나 벽을 부수며 길길이 날뛰는 맹목적인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그 잔혹한 왕좌의 무게를 견뎌냈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핏줄에 대한 짙은 비통함이 넓은 어깨를 짓누를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카일은 죽은 유르가드의 선왕, 산맥 칸과 어머니 노을 엘리 사이의 서자로 위장한 채 살아왔다. 왕권이나 대륙의 패권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이 척박한 설원의 성에서 활을 쏘고 짐승을 쫓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족했다. 자신의 핏속에 잠든 맹수의 본능과 진정한 왕의 자질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였다.
"슬프지 않니, 카일."
엘리가 물기가 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통해요, 어머니. 형님이 그 차가운 왕좌에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생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얼마나 외롭게 돌아가셨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카일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가 당장 검을 뽑아 들고 물막이 산맥을 넘어 사르칸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저 작은 성의 영주이자 사냥꾼일 뿐, 피비린내 나는 왕좌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까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노을 엘리의 눈빛은 달랐다.
화로의 붉은 빛이 일렁이며 카일의 얼굴을 비추었다. 서늘하면서도 강인한 카일의 분위기 너머로, 사르칸을 지배했던 선대 왕 노을 리온의 압도적인 기백이 겹쳐 보였다.
카일은 아직 스스로를 변방의 사냥꾼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의 몸속에는 사르칸의 진정한 적통자의 피가 거세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래. 지금은 맘껏 슬퍼하자꾸나."
노을 엘리는 쥐고 있던 양피지를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시뻘건 불길이 사르칸의 비보를 집어삼키며 타올랐다.
카일은 묵묵히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했다. 유르가드의 밤은 그저 언제나처럼 굳게 닫힌 성벽 너머로 무심한 눈보라를 흩뿌리며 깊어가고 있었다.
***
거센 바람이 얼어붙은 대지를 할퀴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물막이 산맥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유르가드의 설원은 자비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백색의 눈보라를 뚫고 달리는 흑마의 콧김이 허공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말등에 올라탄 산맥 카일의 두꺼운 짐승 모피 위로는 금세 무거운 눈이 내려앉았다. 척박하고 혹독한 남부의 겨울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숨통을 옥죄는 듯했지만, 고삐를 쥔 카일의 서늘한 눈동자만은 흔들림 없이 전방을 향해 있었다.
어제 저녁, 사르칸에서 날아온 전령이 어머니 노을 엘리에게 남긴 비보.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동복형, 사르칸의 적출당한 왕 노을 유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카일의 가슴속에는 비통함과 더불어 짙은 의문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병약한 형이었으니 그저 병사한 것일까?
하지만 어머니를 쫓아낸 찬탈자 가문, 그 서자인 노을 제논이 전면에 나서려는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니. 카일은 단순한 부고장 너머에 도사린 핏빛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유르가드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한 정보망을 쥔 왕실 성채로 향하는 길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너머로 거대한 잿빛 바위산처럼 솟아오른 왕실 성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성문에 다다르자, 두꺼운 곰과 늑대의 털을 둘러쓴 거구의 근위병들이 묵묵히 창을 거두고 길을 열었다. 말에서 내린 카일이 꽁꽁 언 고삐를 마부에게 넘긴 뒤, 횃불이 일렁이는 성채의 길고 어두운 돌벽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의 혹한과는 대비되는 장작 타는 냄새와 묵직한 온기가 굳어있던 카일의 몸을 감쌌다.
복도를 꺾어 들어가던 카일의 발걸음이 멈추어 선 것은, 맹렬한 눈보라가 내리치는 둥근 아치형 창문 곁이었다. 그곳에는 어두운 돌벽과 대비되는 눈부신 여인이 조용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일."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죽은 유르가드 선대 왕 산맥 칸의 차녀이자, 현 왕 산맥 루턴의 여동생인 산맥 제인이었다.
어깨를 포근하게 덮은 은빛 늑대 모피 위로 흘러내린 눈부신 금발은, 이 척박하고 거친 유르가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고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총명하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와 단정하고 지적인 이목구비는 매서운 남부의 칼바람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난 귀한 꽃과 같았다.
"언제 오시려나 한참을 기다렸어요. 눈보라가 이리 거센데."
제인이 다가와 카일의 얼어붙은 뺨에 따뜻한 두 손을 얹었다. 대외적으로 두 사람은 산맥 칸을 아버지로 둔 이복 남매였으나, 서로를 바라보는 깊은 눈빛에는 뻔한 남매의 우애 따위는 없었다. 맞닿은 시선 사이로는 애틋하고도 짙은 연인의 온기가 위태롭게 흐르고 있었다. 카일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차가운 뺨을 기대며, 밤새 날을 세웠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어머니껜 소식이 닿았나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카일의 눈매가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어젯밤에 들었어. 유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마음이 아프겠군요."
제인의 엄지손가락이 카일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이라 해도, 결국 당신의 핏줄이잖아요. 당신이 밤새 혼자 얼마나 아파했을지 생각하니 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괜찮아. 그저… 외로운 곳에서 홀로 눈을 감으셨을 형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시릴 뿐이야."
카일은 애써 담담한 척 미소를 지으며 제인의 손을 가볍게 쥐어 내렸다.
"대체 사르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어. 형님이 병사하신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어머니는 그저 슬픔에 잠겨 계시고,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서 루턴 녀석을 찾아온 참이야."
카일의 말에 제인의 맑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녀는 주변을 오가는 하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오라버니의 집무실로 가보세요. 간밤에 사르칸에 심어둔 첩자들로부터 꽤 많은 서신이 도착했어요. 남들은 당신을 변방의 사냥꾼이나 나의 이복 오라버니라 부르지만… 난 당신의 진짜 이름이 노을 카일이라는 걸, 사르칸의 진정한 적통자라는 걸 아니까요. 당신은 진실을 알 자격이 있어요."
산맥 제인과 산맥 루턴. 이 두 남매만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카일의 출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녀오지. 무리해서 밖에서 기다리지 말고 방에 들어가 있어."
"오라버니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요."
제인의 의미심장한 걱정을 뒤로하고, 카일은 성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왕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철문이 둔탁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넓은 집무실 안은 독한 남부 맥주의 냄새와 매캐한 장작 연기로 가득했다.
그 중앙의 낡은 나무 탁자에는 거대한 곰 가죽을 어깨에 무심하게 걸친 채, 투박한 가죽 부츠를 신은 두 다리를 탁자 위에 떡하니 올려놓은 젊은 왕, 산맥 루턴이 앉아 있었다.
거칠게 자라난 밝은 갈색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그 사이로 번뜩이는 짐승처럼 날카롭고 야성적인 푸른 눈빛. 그는 왕관의 무게나 격식 따위는 벗어 던진 지 오래인 사람처럼 삐딱하게 앉아 있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전신의 분위기만큼은 언제든 상대의 목줄을 끊어버릴 듯한 포식자의 서늘한 기백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왔나."
유르가드의 절대적인 지배자인 산맥 루턴이 탁자 위의 독한 맥주잔을 툭 밀어내며 건조하게 인사를 건넸다. 산맥 카일 역시 왕에 대한 그 어떤 예의나 격식도 갖추지 않고, 익숙하게 그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외적으로는 배 다른 형제였지만, 두 사람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오랜 벗이었다.
"어젯밤에 우리 쪽에도 부고가 도착했다. 형님이 돌아가셨다더군."
카일이 탁자 위에 놓인 빈 잔에 자신의 몫을 따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셔?"
루턴이 픽 코웃음을 치며 탁자 위에 꽂혀 있던 뼈 손잡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공식적인 부고장엔 병사라고 적혀 있었겠지. 하지만 내 정보원들이 목숨 걸고 빼내 온 소식은 전혀 다르다."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카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논 놈이 기어이 네 형제의 숨통을 끊어놨다. 잔에 독을 탔어."
루턴이 단검을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창부의 핏줄인 그 비열한 서자 놈이 제 형을 독살하고 사르칸의 왕좌를 꿰찼단 소리다."
카일의 서늘한 눈동자가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노골적인 진실을 마주하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분노와 비통함이 치밀어 올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형이었지만, 독이 퍼지는 고통 속에서 홀로 피를 토하며 죽어갔을 핏줄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독살이라고?" 카일이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형님 곁에 호위가 몇 명인데 식탁에 오르는 술잔에 독을 타?"
"내 말이 그 말이다. 아무리 뱀 같은 놈이라 해도 궁성 한가운데서 쥐새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루턴이 턱을 괴며 야성적인 눈빛을 빛냈다. "문을 열고 왕의 호위를 치워준 놈들이 확실하게 있다는 뜻이다. 오른막관(右幕官)과 그 휘하의 칼잡이들이 얌전히 길을 터주었을 테지."
대륙의 왕실을 지탱하는 막관 체제.
그중 귀족 기사들로 이루어져 실질적인 무력과 왕실 군대를 통솔하는 수장이 바로 오른막관이었다. 현명하고 강직한 자들이라 포장하지만, 권력의 최전선에 선 탓에 늘 가장 먼저 썩어 문드러지는 집단이기도 했다. 그들의 묵인 없이는 궁성 내의 암살은 불가능했다.
카일이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핏대가 솟았다.
"그 콧대 높은 귀족 기사 놈들이 제논의 개가 되려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왼막관(左幕官)이 나선 거 아니겠어?"
루턴이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유력한 상인과 영주들의 돈줄을 쥐고 있는 평민 출신의 최고위 관료들. 그 왼막의 돈벌레들이 막대한 금화를 댔고, 그 돈을 먹은 오른막관이 독을 든 자를 왕의 침소까지 바로 통과시켜 준 거지. 제논 그놈이 양쪽 막관을 아주 완벽하게 구워삶았어."
사르칸의 무력과 재력이 철저하게 한통속이 되어 형을 죽였다. 퍼즐이 맞춰질수록 카일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카일의 머릿속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가장 거대한 의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렇다면 금막관(金幕官) 영감은 대체 뭘 하고 있었지?"
카일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오른막의 칼잡이들이야 돈에 미쳐 문을 열어줬다 쳐도, 그 영감은 다르잖아. 제논 같은 서자가 왕좌에 오르는 걸 가만히 눈뜨고 볼 위인이 아니야."
대륙의 모든 막관 중에서도 오직 금막관만이 왕의 신발 모양을 딴 황금 잔에 술을 받아 마시며 신발모양 브로치를 달 자격이 있었다. 다른 세력과 달리 왕의 핏줄이 섞인 친척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한 명만이 추대되는 자리였기에, 그들은 정통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런 금막관이 제논의 반역을 묵인했다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카일의 날카로운 지적에, 루턴이 탁자에 빙글거리던 단검을 콱 박아 넣었다.
"죽었어."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 안을 맴돌았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제논이 반역을 일으키던 그 밤, 금막관 영감이 끝까지 유론의 앞을 막아서다 가장 먼저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났다는군. 그 썩어빠진 사르칸 왕실에서, 정통성을 지키려던 그 늙은이 단 한 명만이 유일하게 의리를 지킨 셈이지."
공공연하게 퍼진 소문은 금막관의 참혹한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이면의 진실을 알 리 없는 카일의 가슴에는 유일한 충신의 죽음이라는 또 한 번의 묵직한 통증이 번져갔다.
세 막관 중 두 세력이 배신하고, 마지막 남은 기둥마저 무너졌다. 사르칸의 찬탈 사건은 철저하게 짜인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였다.
카일은 복잡하고 쓰라린 심경으로 씁쓸한 남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루턴이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카일을 빤히 응시했다.
야성적인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서 거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 군대를 빌려줄 수도 있다, 카일."
루턴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캐한 집무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제인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을 굳이 계속 숨길 필요 없잖아. 넌 내 서자 형제가 아니야. 네 진짜 주인의 자리를 되찾고 형의 복수를 하겠다면, 유르가드의 왕인 내가 기꺼이 이 강력한 남부의 검을 전부 내어주지. 그 비열한 서자 놈의 모가지를 내 단검으로 직접 따주마."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루턴의 눈빛만큼은 언제든 산맥을 넘어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된 맹수처럼 살벌했다. 하지만 산맥 카일은 묵묵히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희미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하마. 난 네 오랜 벗이자, 이 유르가드의 사냥꾼일 뿐이야. 형님의 죽음은 비통하지만… 사르칸의 피비린내 나는 왕좌 따위엔 돌아갈 이유가 없어."
루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음을 흘리며 탁자 위의 잔을 들어 카일의 잔에 거칠게 부딪쳤다.
"그래, 변방의 고집 센 사냥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당분간은 푹 쉬어라."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두 남자는 씁쓸한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육중한 돌벽 창밖으로는 거센 물막이 산맥의 눈보라가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고, 두 사람이 삼킨 진실만큼이나 차갑고 무거운 유르가드의 아침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