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을 태우는 일은 쉽지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명예로운 기사부터, 다시 살아난 자들까지.
그들을 섞어 태우는 것은 오랜 시절부터 내려왔던 전통이다.
눈보라 치는 물막이 산맥의 사슬 봉우리. 스물다섯의 젊은 기사, 달튼은 가지런히 쌓인 장작 더미 앞에 서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얼어붙은 대지를 사정없이 할퀴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사르칸과 유르가드를 가로막는 거대한 자연의 장벽, 그 새하얀 설원 위로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두 갈래의 연기가 피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리 가문의 기사 달튼은 부하들과 끔찍했던 전투의 흔적을 수습하는 중이었다.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그는 묵묵히 흉측한 사체들을 눈밭 구석으로 끌어다 내동댕이쳤다. 뾰족한 돌창과 조잡한 돌도끼를 쥔 채 죽어간 산맥의 토착 털복숭이 괴물, 두억시니들의 사체였다. 녀석들은 척박한 눈 덮인 산맥에 숨어 살며 길을 잃은 인간을 사냥해 그 살점을 뜯어먹는 끔찍한 식인(食人)의 습성을 가진 짐승들이었다.
혹한의 기후를 가진 유르가드에서는 척박한 땅에 시체를 묻거나 방치하는 것은 곧 끔찍한 재앙을 의미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땅이 망자들의 안식을 거부하듯, 방치된 시체들은 가끔 기괴한 괴물이 되어 눈을 뜨기 때문이다.
물막이 산맥에서는 아주 드물게, 백 명 중 한 명꼴로 기이하게 되살아나는 망자들이 출몰하곤 했다. 비록 이성을 잃고 산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흉측한 시체 괴물이 되었을지언정, 서리 가문은 그들이 한때 누군가의 가족이자 전우였음을 잊지 않았다.
달튼은 전투 중 목숨을 잃은 명예로운 동료 기사들의 시신과 함께, 안식을 잃고 떠돌던 망자들의 시신 역시 정중하게 예를 다하여 장작 위에 뉘어 놓은 상태였다.
"비록 끔찍한 괴물이 되어 방황했을지언정, 한때 따뜻한 피가 흐르던 인간이었으니… 부디 이 성스러운 불길 속에서는 평안하길."
달튼은 장작더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예리하고 푸른빛을 띤 자신의 장검을 바닥에 꽂아 둔 채, 조용히 묵념을 올린 후 정중하게 횃불을 당겼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 쌓여있는 털난 사람 형태의 짐승 시체더미에겐 태도가 달랐다.
"인간의 살을 탐한 짐승들에게 줄 안식은 없다."
달튼은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품에서 짐승의 굳은 기름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장작 하나 없이 눈밭 위에 대충 쌓아둔 식인 괴물들의 사체 위로 역겨운 냄새가 나는 기름을 듬뿍 흩뿌렸다.
화르륵-!
달튼이 당긴 불씨가 기름을 머금은 두억시니들의 빳빳한 흰 털에 닿자마자, 시커먼 연기와 함께 맹렬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오직 시체를 없애기 위해 불태워지는 거칠고 천박한 소각이었다.
달튼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불꽃을 건조하게 응시했다. 거센 눈보라가 그의 뺨을 때리고 흩트렸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곳 물막이 산맥을 지키는 수많은 가문 중에서도 달튼의 영지는 척박한 남부의 왕에게 충성하며, 사르칸과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죽은 자들과 짐슬들을 베어내는 숭고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젊은 장남의 어깨에는 그 무거운 명예를 증명하듯 거대한 대검이 얹혀 있었다.
"장남어른, 저기를 보십시오!"
경계 중이던 산악 기사의 다급한 외침에, 달튼은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과 휘몰아치는 백색의 눈보라 너머로 기괴한 실루엣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불태운 녀석들의 일행인가 보군. 징그러운 것들."
달튼은 낮게 읊조리며 어깨에 멘 대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다가오는 형체는 전혀 추위에 대비하지 않은, 찢어지고 해진 얇은 옷자락을 걸치고 있었다.
대홍수가 지나간 후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를 누리며 작물이 풍족하게 자라는 북측 사르칸의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얇은 로브였다.
유르가드의 척박한 추위 속에서 저런 차림으로 걸어 다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기에, 달튼은 당연히 저것이 눈밭에 파묻혀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 망자일 것이라 확신했다.
질척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눈보라를 뚫고 횃불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모습은 앙상하게 마른 늙은 노인이었다. 이성을 잃은 듯 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붉은 강이… 탁해지고 있어…"
달튼의 미간이 좁혀졌다. 철분이 많아 붉은빛을 띠는 사르칸의 강물은 그들의 강한 지력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 사르칸의 사제들은 보통 신의 자비를 외치며 죽어간다던데, 저 산송장은 이상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사실만을 내뱉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안식에 들어라."
달튼은 자비 없는 목소리로 선고하며 거대한 대검을 치켜들었다. 강철의 검신이 춤추는 불길을 받아 서늘하게 번쩍였다. 일격에 목을 쳐서 저 불길한 중얼거림을 끝내고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생각이었다. 그가 매서운 기세로 눈보라를 가르며 검을 내리치려던 찰나였다.
"거대한 물이... 범람한다..."
뜻 모를 마지막 단어와 함께 노인의 앙상한 다리가 꺾이며 눈밭 위로 속절없이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달튼의 대검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
쓰러진 노인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하얗고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왈칵 뜨거운 붉은 피를 토해내며 하얀 눈을 적셨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숨을 쉬지 않는다. 체온이 담긴 피를 토하지도 않는다. 이 늙은이는 괴물이 아니었다. 따뜻한 사르칸에서부터 이 끔찍한 혹한의 물막이 산맥을 맨몸으로 넘어온,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망설임 끝에 대검을 거둔 달튼은 쓰러진 노인의 멱살을 거칠게 부여잡고 눈밭에서 일으켰다. 목덜미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한 맥박이 뛰고 있었다.
"사르칸의 땡중이 어쩌다 이 사지(死地)까지 기어들어 온 거지."
달튼은 짧게 혀를 차며 기절한 늙은이를 자신의 넓은 어깨 위로 둘러업었다.
뼛속까지 시린 유르가드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가문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달튼은 매섭게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뒤로하고, 눈보라를 뚫고 자신의 영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물막이 산맥 중턱에 위압적으로 자리 잡은 잿빛 돌벽의 성채. 두꺼운 성문이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열리자, 안뜰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
"장남어른이 돌아오셨다! 문을 닫아!"
달튼은 어깨에 둘러업고 있던 늙은이를 거친 숨을 내쉬며 병사들에게 넘겼다. 노인은 그 험난한 눈보라 속에서도 용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얕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남쪽 탑에 빈방을 내어주고 당장 화로를 피워라. 영지의 의원도 그쪽으로 보내고."
"이, 이 자는 누구입니까요? 옷차림을 보아하니 사르칸 사람 같은데..."
병사가 얇은 로브를 보고 기겁하며 묻자, 달튼은 어깨에 쌓인 눈을 거칠게 털어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도 모른다. 눈밭에서 시체인 줄 알고 목을 치려다 주웠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더군. 일단 죽게 내버려 두진 마라."
병사들이 얼어붙은 노인을 황급히 탑으로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본 달튼은 젖은 망토를 벗어 던지고 성채의 중앙 홀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화로가 타오르고 있는 홀의 중앙에는 명예를 중시하는 쉰다섯의 굳건한 영주이자 달튼의 아버지인 말론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 셀리가 화로의 장작을 뒤적이고 있었다.
"화장(火葬)은 무사히 마쳤느냐." 말론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아버지. 되살아난 자들까지 전부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흔적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남쪽 탑에는 누굴 들인 것이지? 병사들이 이방인을 업고 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 셀리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달튼을 응시하며 지적했다.
"화장 중에 국경 근처에서 주운 늙은이입니다. 사르칸의 수도승 옷을 입고 있었는데, 추위 때문인지 실성한 상태였습니다."
"수도승이라고? 사르칸의 사제가 이 척박한 산맥까지 굳이 올라올 이유가 없을 텐데. 도적 떼에게 털리기라도 했단 말이냐."
말론이 의아해하자, 달튼은 화로 가까이로 다가가 언 손을 녹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꾸 붉은 강이 탁해진다느니, 거대한 물이 범람한다는 둥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만 지껄이더군요."
그 순간, 화로를 헤집고 있던 셀리의 손길이 멈칫했다.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말론의 눈동자에도 순간적으로 서늘한 이채가 돌았다.
"붉은 강이... 탁해진다고 했느냐?"
평소와 달리 한층 무거워진 말론의 되물음에, 달튼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는 유르가드의 혹독한 눈보라가 성벽을 집어삼킬 듯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
남쪽 탑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낮게 신음하며 열렸다.
탑 안은 이미 여러 개의 화로가 피워져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아직 갑옷의 냉기를 채 털어내지 못한 장남 서리 달튼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눈보라에 젖어 헝클어진 잿빛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피부, 베일 듯 날렵한 턱선,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서늘한 푸른 눈매는 유르가드의 혹한을 그대로 빚어낸 듯했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산악 기사답게 갑옷 아래의 몸은 강인한 근육으로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서리 달튼이 업고 온 노인이 누워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푹 꺼진 두 뺨을 하고 있었지만, 하얗게 센 백발 아래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분명 북측 사르칸 특유의 선이 곱고 단정한 동양인 계통의 얼굴이었다. 눈을 감고 위태로운 숨을 몰아쉬는 주름진 얼굴에는 어딘가 부드러운 기품과 처절한 세월의 흔적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영지의 노련한 의원이 영주 서리 말론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화로 앞의 거대한 의자에 앉은 서리 말론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질 만큼 육중하고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뒤로 빗어 넘긴 풍성한 백발과 두껍고 단호한 턱선,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쏘아보는 묵직한 눈빛은 그가 이 척박한 산맥의 지배자임을 증명했다.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영주님. 맥박은 안정되었으나, 몸의 기력이 완전히 다해 언제 의식을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은?"
서리 말론의 긁는 듯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짓눌렀다.
의원은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낡은 가죽 주머니를 가리켰다. 달튼이 눈밭에서 노인을 둘러업을 때 그의 품속에서 떨어졌던 허름한 전대였다.
곁에 서 있던 아내 서리 셀리가 다가갔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틀어 올린 은회색 머리칼과 날카롭고 이지적인 눈매를 가진 그녀는 차갑고도 기품 있는 귀족의 분위기를 풍겼다.
셀리가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북측 사르칸 귀족들이나 쓸 법한 금화나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끝부분이 기괴하게 변색된 빳빳하고 낡은 종이 조각 몇 장, 그리고 좁은 주둥이를 제외하고 아랫부분이 넓적한 삼각형 형태를 띤 기묘한 모양의 유리병이었다.
셀리가 화로의 불빛에 그 이상한 유리병을 비춰보았다. 병 안에는 색을 잃고 탁해진 붉은빛의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사르칸의 붉은 강물이군요."
셀리가 중얼거렸다.
서리 달튼의 서늘한 눈매가 좁혀졌다. 북측의 사르칸에 흐르는 강물은 10세기 전 대홍수로 인해 풍부해진 기운을 가득 머금어 아주 짙고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사르칸의 지력과 풍요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하지만 유리병 속의 물은 본연의 짙은 색을 잃어버린 채, 연한 붉은 빛을 띠고, 불길할 정도로 옅고 탁해져 있었다.
"……'붉은 강이 탁해진다.' 아까 네가 주워 온 늙은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했지, 달튼."
서리 말론이 탁자 위에 놓인 변색된 종이 조각과 탁해진 물병을 번갈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르칸의 인간들은 지난 10세기 동안 이어진 풍요에 취해 전설을 잊어가고 있겠지만, 척박한 얼음 땅에 쫓겨나 살아남은 우리 유르가드는 그 끔찍한 재앙을 잊은 적이 없다. 거대한 물이 범람하여 세상을 집어삼켰던 대홍수의 공포를 말이다."
서리 말론의 묵직한 시선이 침대 위에 누운 늙은이의 얇은 로브 깃으로 향했다. 해진 천자락 안쪽에, 과거 대홍수로부터 인류를 구원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존재, '관찰자'와 ‘조정자’를 숭배하는 고대 종교의 표식이 희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조정성교(調整聖敎)의 문양입니다."
셀리가 곁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게다가 단순한 수도승이 품을 수 있는 문양이 아닙니다. 사르칸의 사원 가장 깊은 곳에서, 대홍수의 징조를 감시하는 최고위 사제만이 지닐 수 있는 표식이지요."
그제야 달튼은 자신이 눈보라 속에서 목을 칠 뻔했던 이 늙고 초라한 이방인이,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거대한 종교의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 노인이 홀로 쫓기듯 그 험난한 물막이 산맥을 넘어 도망쳐 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단 하나다."
말론이 거대한 몸을 돌려 장남인 서리 달튼과 정면으로 시선을 맞췄다. 늙은 맹수 같은 아버지와 서늘한 늑대 같은 아들의 시선이 팽팽하게 얽혔다.
"대홍수의 징조가 시작되었다. 이 노인이 품고 온, 색을 잃고 탁해진 강물이 그 증거다. 방치한다면 사르칸뿐만 아니라, 우리 유르가드 역시 다시 한번 수많은 생명을 잃고 끔찍하게 눈을 뜬 망자들의 땅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버지."
달튼은 망설임 없이 대검의 손잡이 끝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물막이 산맥을 지키는 기사의 피가 그의 날렵한 몸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유르가드 본성으로 가거라. 혹한의 기후를 뚫어 유르가드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조정성교의 대사원으로 향해라."
서리 말론의 명령은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그곳의 대사제들과, 남부의 왕께 이 불길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붉은 강물이 맑아졌으며, 재앙의 주기가 도래했다고."
서리 달튼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창밖으로는 나뭇가지 뿔을 가진 순록의 머리가 그려진 서리 가문의 깃발이 눈보라 속에서 거칠게 나부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