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창부의 아들

by choiplan

사르칸의 웅장한 궁성,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왕의 집무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두 막관이 빠져나간 뒤 홀로 남겨진 옥좌 위에서, 제논은 핏발 선 눈으로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초조함이 목을 조여왔지만, 그보다 더 지독하게 그의 이성을 갉아먹는 것은 방금 전 왼막관 초원 할리가 은연중에 내비쳤던 '천한 핏줄'이라는 멸시의 뉘앙스였다.

사르칸의 화려한 옥좌에 앉아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제논의 귓가에는 지독하게 값싼 분내와 시궁창 냄새가 뒤섞인 과거의 망령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제논의 어머니, 셀마. 그녀는 사르칸 뒷골목의 가장 천박하고 음습한 유곽에서 몸을 팔던, 성(姓)조차 없는 창부였다.


어느 날 밤, 거하게 술에 취한 왕족들이 냄새나는 뒷골목 유곽에 들이닥쳤다. 그 무리 중에는 사르칸의 선대 왕, 노을 리온도 섞여 있었다.

만취한 리온이 하필이면 그곳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셀마를 침상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며칠 전 정치적인 이유로 유르가드에 쫓겨난 자신의 첫 번째 왕비, 서구적인 외모를 가졌던 노을 엘리와 셀마의 이목구비가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에게는 단 하룻밤의 가벼운 유희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축축한 밤은 셀마의 뱃속에 왕의 씨앗을 남겼다.

유곽의 밑바닥에서 구르며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져 있던 셀마는 섣불리 제 뱃속의 핏줄을 내세우지 않았다. 만약 당장 궁성으로 달려가 임신 사실을 알렸다간, 정통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금막관과 왕족들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달아날 것임을 짐승 같은 직감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푼 배를 숨긴 채 유곽을 도망쳐 나와, 볕조차 들지 않는 사르칸의 가장 깊은 진흙탕 속에서 악착같이 아이를 낳고 길러냈다. 사르칸의 고귀한 왕녀가 되겠다는 독기 어린 망상. 그것만이 끔찍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그녀를 버티게 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논이 여덟 살이 되던 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자라난 사내아이의 얼굴에서 왕의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배어 나오자, 셀마는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제논의 손을 거칠게 끌어당겨 쥐고 화려한 사르칸 왕실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핏줄의 등장에 선대 왕 리온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리 비천한 핏줄이라 해도 제 얼굴을 빼닮은 자식을 냉정하게 쳐내어 죽이지는 못했다.

결국 막관들의 끈질긴 반대와 타협안에 따라, 리온은 궁성 밖 변두리에 작은 영지를 하나 내려주고 모자가 그곳에서 조용히 숨어 살도록 조치했다.


표면적으로는 왕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이었으나, 그것은 셀마의 완전한 좌절을 의미했다.

빛나는 옥좌 옆의 눈부신 왕비를 꿈꿨던 그녀에게, 궁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의 초라한 영지는 화려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걸었던 욕망이 묵살당한 끝없는 절망 속에서, 셀마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매일같이 독한 술에 찌들어 살았고, 밤마다 신분조차 알 수 없는 천박한 사내들을 영지의 안방으로 끌어들여 뒹굴며 남색을 밝혔다.

그 타락한 안방의 문틈 사이로, 어린 제논은 제 어머니가 낯선 사내들의 품에서 짐승처럼 헐떡이는 소리를 밤새워 들어야만 했다. 극심한 우울증과 발작이 찾아올 때면, 셀마는 촛대를 집어 던지고 제논을 향해 모진 매질을 퍼부었다.


"이 쓸모없는 새끼! 네놈이 정통성 없는 반쪽짜리라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어머니의 잔혹한 저주와 폭력 속에서, 제논의 유년 시절은 철저하게 찢기고 짓밟혔다.

그 지옥 같은 삶이 2년쯤 이어졌을 때였다.


제논이 아홉 살이 되던 해의 어느 흐린 날. 당시 금막관이었던 늙은 '파도 요한'이 호위 병력 하나 없이 홀로 영지를 찾아왔다.

왕족의 명예와 정통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금막관. 그는 셀마의 끝없는 타락과 방탕한 삶이 사르칸 왕실의 핏물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 판단하고, 왕의 허락조차 없이 단독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왕의 명예를 생각하고 여기서 조용히 목숨을 끊으시오. 그렇다면 그대의 아들만큼은 이 초라한 영지가 아닌, 사르칸의 왕실에서 정식 왕자로서 자라게 해주겠소."


탁자 위에 놓인 작고 차가운 독약 병. 문밖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던 어린 제논의 눈동자가 공포와 경악으로 커졌다.

하지만 요한이 돌아간 후에도 셀마는 쉽게 죽지 못했다. 오히려 살고 싶다는 끔찍한 발악과 왕실에 버림받았다는 미움이 뒤엉켜 그녀의 타락은 더욱 지독해졌고, 핏줄인 제논을 향한 폭력은 뼈가 부러질 만큼 잔혹해졌다.

매일 밤 피멍이 든 몸을 방구석에 웅크린 채, 어린 제논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 없이 기도했다. 어머니가 차라리 빨리 저 독약을 마셔버리기를. 그래서 자신이 이 지옥 같은 영지에서 벗어나 화려한 왕궁으로 갈 수 있기를.


결국 1년 뒤, 제논이 열 살이 되던 날. 극도의 우울증과 광기에 한계에 달한 셀마는 미친 듯이 웃어대다 기어이 그 독약을 삼키고 검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어머니의 식어가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제논이 느낀 것은 혈육을 잃은 슬픔이 아니었다. 마침내 지옥문이 열렸다는 기괴하고도 소름 끼치는 해방감이었다.

파도 요한의 약속대로 제논은 화려한 궁성 안으로 수거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가 꿈꾸던 천국이 아니었다. 창부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비수가 되어 그를 찔러댔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어도, 궁내의 귀족들과 하인들은 그의 등 뒤에서 늘 천박한 핏줄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차가운 궁성에서 유일하게 제논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첫 번째 왕비 노을 엘리의 소생이자 동복형인 노을 유론뿐이었다.


유론은 몹시 착하고 다정했다. 게다가 기형적인 난쟁이로 태어난 탓에, 아무리 고귀한 적통임에도 불구하고 궁성 사람들에게 늘 동정과 은밀한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자란 서자와, 난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적자. 두 소년은 화려한 궁성의 인적 드문 구석에서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제논은 제 평생 처음 받아보는 유론의 맹목적인 다정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얄팍한 동질감이 산산조각이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론이 열네 살, 제논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열린 사르칸 왕실의 거대한 축제일.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인 연회장의 옥좌 곁에 앉아 있던 유론이 환하게 웃으며 단상 아래의 제논을 불렀다.


"제논! 내 옆으로 와서 함께 앉자."


제논이 기쁜 얼굴로 단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 차가운 수관들의 창대가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가로막았다.


"서자의 자리는 이곳이 아닙니다."


얼음장 같은 선고와 함께, 제논은 수많은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회장 가장 구석진, 빛조차 들지 않는 끄트머리 말석으로 질질 끌려가듯 내동댕이쳐졌다.

멀찍이 높은 단상 위에서,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론의 시선. 제논은 그날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 난쟁이 형이 아무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아껴준다 한들, 적자와 서자라는 핏줄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자신은 영원히 밑바닥의 벌레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제논의 내면은 걷잡을 수 없이 어둡고 흉폭하게 비틀려갔다.


제논이 열여섯 살이 되자, 그는 밤마다 궁성의 담을 넘어 사르칸의 뒷골목 유곽을 미친 듯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당하며 들어야 했던 그 끔찍한 교성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그만의 기괴한 의식이었다.

천박한 창부들의 몸을 거칠게 짓누르고 지배할 때마다, 그는 자신을 매질하고 경멸하던 창부 출신의 어머니를 완벽하게 정복하고 짓밟는 듯한 짜릿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유론이 스무 살, 제논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의 가을.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형님. 언제까지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책만 파고들 겁니까? 오늘 밤엔 제가 사르칸 최고의 유곽으로 모시지요. 그 나이가 되도록 여자의 살결도 모르는 건 왕족의 수치입니다."


제논은 짓궂게 웃으며 숫총각인 유론에게 제안했다. 그것은 제논 나름대로 형제에게 내미는 친근감의 표시이자, 자신이 철저하게 지배하고 정복한 세계로 형을 끌어들이려는 비틀린 우월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말 위에서 고삐를 쥐고 있던 유론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몹시 차갑고 굳은 얼굴로 제논을 내려다보았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제논. 사르칸의 왕을 이을 고귀한 적통이, 어찌 천박한 창부를 품는단 말이냐."


그것은 유론의 뼈에 새겨진 왕족으로서의 당연한 원칙이자, 방탕하게 나도는 동생을 훈계하려는 순수한 의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제논의 귀에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저주이자 사형 선고로 들렸다.


'천박한 창부를 품을 수 없다.'


그 한마디는 제논의 어머니인 셀마의 존재 가치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창부의 몸에서 태어난 자신을 영원히 구제 불능의 더러운 오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그 순간, 열 살 축제 때 단상 아래로 끌려가며 느꼈던 비참함이 수천 배로 불어나 제논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흉내를 내보아도, 저 난쟁이 형의 뼛속 깊은 곳에는 자신을 천한 창부의 자식으로 내려다보는 역겨운 오만함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명심하지요, 형님."


제논은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애써 숨기며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제논은 유론에게 향하던 일말의 애정마저 완벽하게 끊어냈다. 그는 밖으로만 나돌며 철저히 어둠 속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고, 두 형제의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시간이 흘러 선대 왕 리온이 죽고, 유론이 왕좌에 오른 지 2년 차가 되던 해.

병약한 유론은 자신의 위태로운 권력을 다지기 위해, 과거 쫓겨났던 어머니 노을 엘리를 유르가드에서 다시 불러들여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소식을 들은 제논의 등줄기에 소름 끼치는 살기가 뻗쳤다.


'정통성을 맹신하는 그 늙은 여자가 궁성에 돌아온다면, 눈엣가시 같은 창부의 핏줄인 내 목부터 치려 들겠지.'


그 끔찍한 생존의 위협이 제논의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마침 유론의 왕권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해 위태로웠고, 과거 제논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금막관 파도 요한은 늙고 노쇠해져 힘을 잃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완벽한 혼란의 틈을 타고, 막강한 무력을 쥐고 있던 거구의 오른막관 갈색 벤시가 제논의 어두운 처소로 찾아와 은밀한 반역을 속삭였다.

제논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핏빛 제안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을 창부의 핏줄이라 멸시하던 세상. 자신을 말석으로 내동댕이쳤던 썩어빠진 귀족들. 그리고 고귀한 척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난쟁이 형, 유론.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짓밟고 이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들의 피로 내 어미의 천박한 과거를 완벽하게 씻어내리라.


"크큭… 으하하하핫!"


과거의 망령에서 깨어난 제논이 텅 빈 집무실 안에서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핏발 선 눈으로 창밖의 붉은 강물을 응시했다.

자신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었다. 이 잔혹한 반역은, 시궁창에서 태어나 짓밟혀야만 했던 한 생명체의 가장 처절하고도 완벽한 생존이자 복수였다.


"어디로 숨었든 기어코 찾아내 주마, 유론. 네 그 고귀한 적통의 피가 내 발밑에 뿌려질 때, 비로소 내 핏줄의 증명이 완성될 테니까."


사르칸의 붉은 태양이 저물어가는 옥좌 위에서, 제논의 병적인 광기와 뼛속 깊은 결핍이 기괴하게 뒤엉키며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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