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안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학 교양수업 강의 리뷰 - 윤금이 사건, 평화운동과 에코페미니즘

by 유미 최 사카모토

지난 강의 자료를 복습하던 도중 미군 기지촌 살인사건이 궁금해졌다. ‘미군’, ‘기지촌’, ‘살해’라는 검색어를 통해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 사건’이 자세히 담긴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에 따르면 1992년 10월, 기지촌 성매매 여성이었던 스물여섯 살 윤금이 씨는 주한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발견 당시 피해자의 주검은 얼굴뼈가 깨지고, 음부에는 콜라병, 항문에는 우산이 꽂힌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가해자는 당시 고작 스무 살짜리 이병이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인가?

해당 기사에는 미군과 대한민국 정부가 손을 잡고 기지촌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실태가 낱낱이 적혀있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병 관리 방식이다.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병 검사는 정부뿐 아니라 미군 측에서도 앞장서 실시했다. 성병이 발견되는 즉시 성병 치료 기관인 낙검자 수용소로 가게 되고, 이는 매우 낙후된 시설이었다고 한다. 당시 성병 치료에는 페니실린 주사가 사용되었는데, 쇼크 발생 빈도가 높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매우 위험한 치료법이었다. 의사가 페니실린 주사 사용을 기피하자, 페니실린 쇼크 발생 시 의사 면책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공식 문서를 보건복지부에서 법무부 측으로 보냈다고 한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성병 통제가 기지촌 여성의 생명보다 명확히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성매매를 알선한 사실조차 잘 몰랐는데, 하물며 성매매 여성의 성병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처음 알았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포주 역할을 하면서도 여성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참담하고 분통 터졌다.


어릴 적 나는 이사를 많이 다녔다. 열 살 때까지는 거의 2, 3년 단위로 지역을 옮겨 다녀서 이렇다 할 고향이랄 게 없는데,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아서 정이 가는 동네가 용산구 이태원이다. 유흥업소 밀집 지역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왔고, 미군기지 옆에 있는 중학교를 나왔다. 외국인과 트랜스 젠더, 길거리에서 웃통을 벗고 달리는 미군의 모습을 익숙하게 봤다.

한남동에 위치한 순천향대학병원 내부의 카페에서 근무할 때였다. 레게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커피를 한 잔 주문하더니, 약에 취한 듯 느릿하고 어눌한 말씨로 묻지도 않은 개인사를 줄줄 꺼내다 울음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 여성은 한국인으로 보였는데, 종종 연인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성과 함께 오곤 했다.

그 여성에 대해, 지나쳐온 이들의 삶에 대해 모든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미군 기지촌과 이태원의 역사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니 어린 시절 희끄무레한 기억 속 이태원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10.29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이태원이라는 땅 위에는 지난한 역사가 참 많이도 쌓인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여성 평화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처음 접하게 되었다. 최초의 에코 페미니스트 회의, 펜타곤 여성 행동에 이어 그린햄커먼 평화 캠프에서의 인간 띠 잇기 현장 사진을 보는데 울컥했다. 영국에 있는 미군 기지에 미사일이 설치되는 것에 반대하며 전개된 해당 시위는 실제로 미사일 철수, 기지 폐쇄 및 평화공원 조성 등의 결과를 이끌었다. 이러한 여성 평화 운동의 실제 사례를 알기 전까지는 ‘평화’가 그저 이상적이고 실체 없는 개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지금껏 내가 이러한 여성 운동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여성의 업적과 군사주의의 후퇴가 잘 알려지지 않는 데는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칠리아 여성 성명서 내용 중 “전쟁에 대한 우리의 반대는 우리 여성들의 해방을 위한 우리 자신의 투쟁과 일치”한다는 문장이 가슴을 울렸다. 한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함양하고 에코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평화를 향하는 길은 예쁜 꽃길이 아니다. 수많은 딜레마를 마주하고, 이견 조율을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수도 없이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대를 이어 나가고 또한 넓혀야 한다는 점에서 가시밭길이나 진창길에 가까울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공부가 좋다. 지식에 대한 탐닉이라기보다 당위나 사명에 가까운 일. 알면 알수록 머리가 복잡해지고 일상에서 불편한 일이 많아지지만, 왜인지 영혼은 제 고향을 찾은 듯 편안함을 느낀다. 세계 곳곳에서 힘껏 투쟁하고 있을 수많은 여성과 연대하고 싶다.


페트라 켈리는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생태적인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에코페미니즘 이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채 4년 반 동안 완전 비건 식단을 실천한 바 있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공장식 축산으로 희생되는 동물들과 환경 파괴로 피해를 겪고 굶주리는 제3세계 사람들이, 가난한 동양 여성인 나보다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나는 페미니즘보다 먼저 반 종차별주의를 체화한 것 같다. 완전 비건식을 실천하는 동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 당사자인 나는 사회는 물론 스스로에게도 억압받았고, 강박과 자기혐오가 깊어져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했다. 그 뒤로 비건에 대한 강박은 내려놓게 되었지만, 비건을 할 때건 안 할 때건 감정적으로 압도되면 가장 먼저 음식을 찾았다. 이러한 감정적 폭식은 자해인 동시에 음식에 대한 착취라고 생각한다. 여성인 내가 음식을, 즉 비인간 동물과 불필요한 영양분, 식품 산업에 이해관계가 얽힌 수많은 인간을 손쉽게 착취하는 일은 어쩌면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곱씹어왔다.


WPS 유엔안보리 결의안 1325는 무력 분쟁, 전시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범죄를 처벌하고 여성을 평화의 주체로 개입할 수 있도록 이를 명문화한 장치로 보인다. 여성 인권을 말하는 자리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일을 보장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투쟁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또한 에이즈 및 이에 대한 교육을 언급한 조항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전시 성폭력 상황에서 성병이 발생하는 일은 매우 흔하겠지만 나는 이에 대해 무지했다. 현실에서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특유의 요구사항’에 대한 교육 지침 및 자료를 회원국에 제공하도록 하는 조항도 있었다. 거대한 국가적 목소리에 소외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 삶은 전혀 평화롭지 않다. 인간 존엄이 짓밟히고 생명을 잃는 사건은 실시간으로 발생하고 있다. 자살, 범죄, 빈곤, 장애, 인권침해 등으로 신음하는 목소리는 지금껏 개인의 문제나 예외 사항으로 축소되고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개인의 인간 안보를 빼놓고 논하는 평화는 진짜 의미의 평화라고 할 수 없다.

인간 안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인한 결핍이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므로 인간 안보는 군사 안보가 확보된 다음에 천천히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군사 안보에 선행하는 개념이다.

군사 안보는 자국과 타국 간의 경계가 명확하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띄지만, 인간 안보에는 그러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안보 아래 인간은 상하좌우 할 것 없이 연결된 불가분 한 존재다. 반쪽짜리 한국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인간 안보라는 개념에서는 인간 외적인 존재가 또다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비인간 동물, 생태계, 환경 등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닌, 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어떤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까? 인간의 평화에서 나아가 전지구적 평화를 꿈꾼다. 이를 위한 투쟁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전개할 작정이다.




2025.4.11.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수강한 여성학 교양 수업 에세이 과제.


*참고 자료 :

송휘수 기자 외 3명, 「죽어서야 ‘조국의 딸’이 되다.. 26세 기지촌 여성의 죽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03.09,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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