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르바비차』리뷰
*이 글은 영화 『그르바비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유사한 형태의 사랑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꼽는다. 인간 역시 동물인 이상, 열 달 동안 자신의 몸에 품었던 유전적 후손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예쁘지 않을 리가. 이처럼 삶의 원동력이자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인 자식이, 동시에 자신의 끔찍하게 아픈 과거 경험의 결정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르바비차 속 에스마와 사라의 관계가 그렇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한부모 가정처럼 보이지만, 사라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에스마가 강간당해 임신한 아이, 즉 체트니크의 사생아다.
에스마는 임신 당시 아이를 죽이고 싶었다고 한다. 유산하기 위해 배를 최대한 힘껏 치기도 했다. 그러나 유산에 실패했고 결국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이후 에스마는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벽 너머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여성의 생물학적 신체 반응으로 젖이 나온다. 에스마는 한 번만 아이에게 젖을 먹여 보자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너무 조그맣고 무척이나 예쁜” 딸 사라를 만나게 된다.
에스마는 사라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딸의 수학여행 비용 마련을 위해 클럽에서 새벽까지 일하는 등 딸을 매우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종종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딸과 웃으며 장난치다가도, 구속당하거나 특정 트라우마가 건드려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의 표정은 한순간에 굳어진다. 아마 조직적 강간을 당했을 때 겪은 폭력에 대한 기억 때문인 듯하다.
학교에 한부모 가정, 특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은 적지 않다. 사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순교’했다고 알고 있고, 해당 접점으로 사미르와 친해져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총기를 가지고 노는 등 다소 탈선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라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뒤, 엄마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웃는 얼굴로 영화는 종료되지만, 나는 사라의 그 이후가 더 걱정됐다. 자신이 강간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쩌면 평생 사라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보스니아 내전의 전시 강간 피해자가 2만 명 이상 있으니 사라와 같은 아이가 더 있을 텐데, 그들의 삶은 출생부터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또한 전쟁 직후 세대인 아이들에게서는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겨루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결핍을 메우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전쟁 이후 세대에게 전쟁은 직접적인 피해는 아닐지언정, 삶을 뒤흔들고 때로는 파괴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다.
전시 강간 피해자들은 지역 센터에 모여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고 가끔 돈을 받기도 한다. 한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실성한 듯 끊임없이 웃는 여성도 있고, 이런 건 필요 없으니 돈이나 일을 달라는 사람도 있다. 에스마 역시 돈을 줄 때만 지역 센터에 얼굴을 비추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에스마는 성적인 장면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클럽에서 일을 하다가도 스킨십 장면을 목격하거나 트라우마가 건드려지면 직원 휴게실로 빠져나와 약을 삼킨다. 전시 강간으로 인한 후유증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에스마의 모습을 통해 전시 강간 피해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에스마와 같은 전시 강간 피해자들은 보스니아 정부에게 정식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해당 영화 『그르바비차』가 큰 역할을 했다. 영화는 전시 강간 피해자들이 공식적인 피해자 신분을 얻기 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럼에도 지역 센터에서 소액의 보조금이 지급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시민 단체의 모금 등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보스니아 내전 당시에도 평화 시위를 하는 시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보스니아 시민들이 전쟁과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는지 더 알고 싶다. 그리고 내전 피해자 신분을 얻게 된 피해 여성들의 삶이 이후에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에서는 사랑 vs 가족의 언뜻 익숙한 구도도 등장한다. 남성을 두려워하는 에스마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펠다를 밀어내려고 하지만, 펠다가 에스마처럼 전쟁 중 아버지를 잃었으며 두 사람이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만난 적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나 에스마는 펠다에게 사라의 존재를 알리지 못한다.
오스트리아로 떠나게 된 펠다가 에스마를 만나러 가지만, 에스마는 떠나지 말라는 말 대신 “당신이 가면 당신 아버지 시체는 누가 확인하나요”라는 말과 키스를 끝으로 그와 헤어진다. 미혼모가 데이트하는 남성에게 자신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것이나, 사랑과 가족 중 가족을 택하게 되는 것은 여러 작품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에스마는 자의가 아닌 전시 강간에 의해 아이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럼에도 사라의 곁으로 돌아가는 에스마의 선택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엄마의 데이트 장면을 창문으로 몰래 훔쳐보며 유기 공포를 느끼는 사라에게 에스마는 “절대, 절대,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아.”라고 말한다. 만약 내가 에스마였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울컥울컥 올라오는 증오와 혐오가 사라에게 향했을 것 같다.
에스마가 친구 사비나의 도움으로 사라의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고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사비나가 “많이 울어. 울면 오줌은 덜 나올 거야.”라고 말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보스니아 내전 당시 좁은 공간에 사람을 잔뜩 가두고 학살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오줌이 벽까지 차올라 오줌을 마시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에도 전쟁의 참상이 담겨있었다.
최근에 전쟁 기념관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전사자를 기리는 비석을 보며, 문득 죽음이 주는 면죄부에 대해 생각했다. 전쟁 중에는 전술로써의 조직적인 강간과 개인의 일탈로써의 강간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곳에서 기리는 죽음들은 전시 성폭력에 대해 결백한 죽음일까?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면 자살을 택하는 가해자들이 종종 있다. ‘죽음’이 생전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방증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계에 의해 발생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이전부터 긴장과 갈등 관계 속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계를 포함한 나머지 민족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다. 티토의 사망 이후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급부상한 배경에는 과거 억압과 차별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호해지는 전쟁 속에서, 집단적 증오와 복수는 세대를 거쳐 폭력의 연쇄를 낳는다. 이러한 복수의 연쇄는 만화 원작인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서도 굉장히 잘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전시 강간은 가해자를 악마화하고 탓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세계는 수많은 전쟁과 그로 인한 아픔을 겪었지만, 현재도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무엇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본과 같은 특정 가치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이분법적 사고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대안적 삶을 모색하고 있다.
영화 그르바비차를 통해 보스니아의 역사에 흥미를 갖고 더 알아보게 되었고, 역사 전달과 호소의 매개체로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또한 사랑과 혐오가 복합적으로 얽힌 에스마와 사라의 관계를 ‘삶’에 폭넓게 접목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삶과 역사는 한 개인의 몸과 마음을 통해 재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건 인류 전체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페미니즘 공부를 통해 ‘나’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한다. 한층 더 성숙한 관점으로 나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세상을 읽어내고 싶다.
2025.5.8.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수강한 여성학 교양 수업 에세이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