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교양수업 강의 리뷰 - 피해자다움, 성녀와 악녀
중학생 때 같은 학교 동기 사이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친구 사이였던 남녀였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장난치다 남학생이 여학생 신체 부위를 만지게 됐고, 성적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남학생이 여학생의 거절에도 수차례의 요구 끝에 성관계를 맺게 된 사건이다.
그런데 당시 학교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강간인지 강간이 아닌지 의견이 갈리며 파장이 일었다. 논란이 일게 된 배경은 대충 이러하다. 첫째, 여학생은 평소에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이성 친구에게 음담패설이나 스킨십을 하는 등 섹스어필을 즐겼다. 둘째, 강간 상황 발생 직전, 여학생은 “의도적으로” 남학생이 자신의 신체 부위를 만지게끔 유도하는 장난을 쳤다. 셋째, 여학생의 평소 행실이 이렇게 문란한 데 비해 남학생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평범하고도 “무고한” 학생이다. 넷째, 여학생은 이전에도 이미 다수의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백하자면 당시의 나 역시 페미니즘적 시각에 입각한 대응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만한 관계도 아니었기에 딱히 어디 가서 내 의견을 펼칠 일도 없었지만, 나도 여학생을 '타락한 여성'이자 '신뢰할 수 없는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여학생과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이전보다는 가까운 사이가 됐을 때도, 책상에 엎드려 자다 일어난 그 친구가 “중학생 때 겪었던 강간 꿈을 꿨다”라고 말하는 데 그럴싸한 공감과 격려를 해주지 못했다.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의 성적 욕망을 억압해 왔다. 여성이 성적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여성의 성적 쾌락 추구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회적인 낙인이 두려워 스스로 욕망을 억압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가벼운 성적 관계를 추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남녀 관계에서 얻는 성적 쾌락은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하고 불쾌했다. 분명 나의 성적 쾌락 탐구를 목적으로 시작한 관계에서도, 침대만 가면 자꾸만 남자의 욕망과 쾌락에만 집중했다. 은근슬쩍 피임을 회피하는 상대에게 강하게 대응하지도 못했다. 나는 어디서 많이 본 몸짓 말짓을 연기했고, 연극이 끝나면 만족감 대신 찝찝함만 남았다. 이제는 웬만하면 가벼운 관계를 추구하지 않지만, 섹스 상황에서 느끼는 불쾌감은 진지한 관계라고 한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 안에 뿌리 뽑지 못한 여성 혐오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안전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강박적으로 자기 검열을 했다. 나는 정말로 완벽하게 결백하고 선한 피해자인가? 내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내 손을 들어줄 만큼 피해 사실이 명확한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신체 반응이나 정신적 피폐가, 내가 겪은 성폭력 피해 수위에 비례하는 합당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겪은 심각한 성폭력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 나의 경험을 그런 식으로 수치화하고 평가하며 내게 적절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당신의 피해는 당신의 잘못 때문도 아니고 당신만 입은 것도 아니다. 이 사회가 성폭력 피해를 만들고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다”라고 말하는 소위 <가부장제 구조 책임론>을 접하면서 나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있었고 과도한 책임감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삶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관계없이 나는 사회적 약자이며 자주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심한 무력감에 빠졌다.
여성의 삶은 혼란스럽다. 높아진 여성 의식을 바탕으로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은 마음과, 현실적인 위협과 공포가 만연한 일상 사이의 괴리를 매 순간 겪으며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한다. 새벽 세 시건 다섯 시건 거리낌 없이 홀로 한강을 달리던 나는 이제 혼자서는 잘 뛰지 않는다. 여성 주의 자기 방어로서 몸을 단련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에 희망을 품음과 동시에 그런 스스로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웬만한 남자만큼 힘세다고 우쭐하더니, 그게 지금까지 너를 지키는 데 무슨 도움이 됐어?
한창 나의 피해 사실에 몰두해 그에 관한 글을 쓴 적도 있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나와 타인을 설득하고 싶었다. 내가 겪은 삶과 일련의 맥락을 줄줄이 나열해 현재 피폐한 나의 상태를 옹호하고 싶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동물울음소리의 한계에서 울리는 텍스트들을 찬사하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 소통이 아니라 단지 고통스러운 감정의 표출을 위한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이나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암호로 부정하게 소통하면서 자기 주위로 불행을 퍼트릴 뿐”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이자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 프리모 레비가 한 말이다. 그가 내 글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그의 말처럼 나는 “소통이 아니라 단지 고통스러운 감정의 표출을 위한 말과 글을 쓰고, 그 자신이나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암호로 부정하게 소통하면서 자기 주위로 불행을 퍼뜨리는” 사람일까?
강의 중 해당 문장을 볼 때 마음이 아팠다. 가까스로 펼쳐놓은 삶이 다시 짜부라지는 것 같았다. 고통에 대한 발화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고통이 발화되고 희석되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이 놓여있는 맥락을 이해하기에 앞서, 내가 무슨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아보는 과정, 즉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물 울음소리의 한계에서 울리는 텍스트”도 어쩌면 그 과정에서 나온 산출물인지도 모른다.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 바깥 피해자의 삶은, 아주 느린 속도일지언정 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옹호하고 싶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겉보기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여성을 비난하고 무고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 사회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피해자의 외모, 피해자가 해당 사건으로 받게 된 상처, 현재 피해자의 상태 등 피해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정작 성폭력 가해 행위 이후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고, 어떻게 반성하고, 사회 복귀를 위해 어떠한 도의적・윤리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지극히 부족하다.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피해자의 고통을 두고 범죄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 아닌 범죄 그 자체를 봐야 한다. 가해자의 행위가 여성 인권을 어떻게 침해했는지, 그러한 가해자의 행동과 태도가 사회 전반의 인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 처벌해야 한다.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처벌은 그 자체로 사회에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최근 레즈비언 연애 프로그램 「너의 연애」가 쏘아 올린 일련의 논란 속 출연자 리원을 지지하는 글들을 읽으며 가장 와닿았던 페미니즘의 슬로건은 “우리는 모두 창녀”라는 말이었다. 더 이상 성녀와 악녀를 구분하며 내가 성녀의 기준선 밖으로 벗어날까 봐 벌벌 떨 필요가 없다(아마 진작 벗어났겠지만).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남에게 일어난 일 또한 나와 무관하지 않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나와 타인을 옭아매는 여성혐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더 많은 여성들과 연대하고 더 많은 “나”들을 만날 것이다. 학문적인 탐구와 지식 습득뿐 아니라, 안전하고 즐겁게 성적 쾌락을 추구할 방법 역시 모색해야겠다.
2025.5.16.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수강한 여성학 교양 수업 에세이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