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넘어 연대로 : 여성·평화·생명과 나의 여정

여성학 교양수업 - 학기말 에세이

by 유미 최 사카모토

여성학 교양강의 첫 수업을 듣던 날을 기억한다. 수업 며칠 전, 나는 삼 년에 걸쳐 나를 스토킹 하던 스토커를 육 개월 만에 마주쳐 넋이 나가 있었다. 주말 아르바이트 하던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도 경비원이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관심을 표하며 접근했고, 수업 시간에는 동급생 남학생이 말없이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번호를 물어봤다. 이 세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 강의실에 앉아서 여성이 겪는 성폭력과 그 후유증에 대해 강의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내가 바로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약 이주 정도는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며 등교해 울면서 수업을 들었다.

첫 수업 시간, 교수님은 "내가 살고 싶은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 토론하고 했다. 나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나의 관심은 온통 생존에 집중되어 있었다. 독신 여성 노동자인 나에게 세상은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다.


대학 수업이 진행될수록, 나 이외 존재의 삶에 재현된 무수한 고통에 대해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는 전쟁의 참상 앞에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나의 삶에 딱 붙어있는 고통밖에는 보지 못했구나. 동시에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조금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내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었구나. 나를 공격한다고 느껴졌던 수많은 여성 범죄와 사회적 차별은, 진짜 의미로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나의 삶 위에 벌어진 일은 거대한 흐름을 증명하는 하나의 표상일 뿐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매일 면도를 하며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스스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 생존 이상의 것을 허용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차츰 토론에도 적응해 갔다. 나의 부족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다른 학우의 의견을 구했다. 학교에는 정말이지 성실하고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미군 기지촌과 미군 범죄에 대해 배우며, 내가 가장 오래 산 동네이자 고향과도 같은 이태원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스친 삶의 경험이 해체되고, 다른 의미를 지닌 덩어리로 재구성되어 갔다.

대한민국이 통째로 군사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을 돌아봤다. 나 역시 많은 순간 군사화된 사회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학습된 군사화를 통해, 타인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수많은 폭력적인 통제를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중간고사 이후 수업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스토킹과 성폭력으로 결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보니 열아홉스무 살 때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전 연인(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도 독서실 다니는 나를 끈질기게 스토킹 하다가 기어이 연애 승낙을 받아냈다. 수업을 듣다 보면 그에게 겪은 데이트폭력의 기억이 울컥울컥 떠오르곤 했다. 이제는 조금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어쩌면 나는 나의 마음을 돌볼 시기를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늦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스무 살의 내가 마저 울 수 있도록 달래주러 가야 하나 싶다.

영화 『그르바비차』를 본 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에 대해 알아봤다. 보스니아 내전이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고등학생 교육 과정에서 다루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 세계사를 배우는 시기에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기에 배움의 공백을 느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지난한 역사를 톺아보며, 사람을 이토록 서로 물고 뜯게 만드는 이념이란 건 도대체 뭘까 싶었다. 역사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성혐오와 성폭력, 여성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 따위를 공부하며 스스로 타락한 여성인지, 남성의 보호를 받을만한 가치 있는 여성인지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며 전전긍긍하던 오랜 기간의 내적 갈등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성녀와 창녀의 구분을 넘어 “우리는 모두 창녀다”라는 슬로건을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자 전에 없던 자유를 느꼈다.

시카고 폭염, 청도 대남 병원 등 기후 재난과 팬데믹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사례에 대해 배웠다. 그러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십 대 초반에 아르바이트하다 신천지에 발을 들인 친언니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다음 주에 결혼한다.

본교 채플 수업을 들으며 존재를 알게 된 "성공회" 예배에 두어 번 방문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교회와 다르게 소수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분위기여서 좋았다. 그러나 그곳에서조차 신천지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뒤로 해당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안전하게 신천지 이야기를 할 곳을 찾고 있다. 맹목적인 혐오나 찬양이 아닌,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면서도 그 집단의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구조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대화를 원한다. 물론 아직 나조차 그런 대화가 잘되지는 않는다. 나는 작은 체구와 순한 인상 탓에 신천지나 "도를 아십니까"의 표적이 되어 숱하게 붙잡히곤 하는데, 신천지로 인해 언니와 절연하다시피 한 뒤로는 그들이 말이라도 걸라 치면 눈을 부라리며 자동반사적으로 욕설을 뱉는다. 어쩌면 그건, 언니를 품을 만큼 온전한 가정이 되어주지 못한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 전의 내게 아나키스트적 면모가 있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관용과 환대의 개념을 배우며, 나는 더 이상 나와 주변의 삶에서 벌어진 문제 앞에 뒷짐 지고 점잖은 척 발뺌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적 영역의 무조건적 환대의 사유를 놓지 않으며, 현실의 토대 위에 이를 실현할 방법을 끊임없이 논의해야 한다. 그것만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상호적 이타성 아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믿게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괴로운 삶이라면, 더 이상 회피가 아닌 직면하는 태도로 나아가고 싶다.

공감의 중요성과 공감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흐름을 배우며 나를 돌아봤다. 스스로 생존 가치를 부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나는, 오랜 시간 타인에게 희생하며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연명해 왔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겠지만, 어떤 관계건 쉽게 그런 식으로 변질됐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타성을 스스로 깎아내렸다.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는 면모나 함부로 책임지고 짊어지려고 하는 모든 행위와 태도가 나의 생존 욕구에 기반한 조건부적 선행이라며 자조했다.

상호적 이타성 개념을 배운 뒤 조금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채플 시간에도 상호적 이타성과 거의 흡사한, "커뮤니언"의 개념을 한 학기 내내 배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그 진리에 가까워질 때, 영혼이 제자리를 찾은 듯 편안함을 느꼈다.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는 나는, 어쩌면 인간의 본질에 가까울 뿐인지도 모르겠다.

탈코르셋, 여성의 몸과 인구 정책, 구글 베이비에 대해서도 배웠다. 특히 구글 베이비 내용은 는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자신의 성을 저당 잡아 손쉽게 돈을 버는 백인 여성을 보며 나도 혹시 내 난자를 판매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꽤 긴 시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건 단순히 나의 도덕성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한 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고, 기말고사까지 치르고, 마지막 과제인 최종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나는 첫 수업 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일단 공부가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후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었다.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목표로 삶의 우선순위가 재배열되며,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 동성연애도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번 역시 남성이다. 어떤 관계도 나를 완벽하게 보호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나마 기댈 구석이 생기니 삶이 한결 편해졌다. 정신과 약도 이전만큼 많이 먹지 않는다. 불평등한 섹스 경험의 반복으로 섹스 자체에 거부감과 어려움을 느꼈는데, 현재 연인과 그러한 고민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며 조율하고 있다. 섹스를 포함해, 그와의 관계에서는 전에 없던 안전함의 감각을 많이 느낀다.


삶이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느낄 때면 관성적으로 자기 파괴의 길로 빠진다. 나에게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 원가족은, 개인의 문제를 오롯이 홀로 감내하다가 병드는 삶을 내 눈앞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조현병을 앓던 엄마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떼어냈다. 아빠는 정신증을 앓는 엄마를 데리고 한국에 와서 외국인 노동자 신분을 자처하며 반평생 가족을 부양하다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 후유증으로 중증 장애인이 됐다. 언니는 신천지에서 만난 사람과 곧 결혼해 어쩌면 평생 그 사회에 몸담을 것이다. 내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적 계급의 재생산은 지극히 전형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스물일곱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것은, 나와 내 가족이 사회적 약자라 말할 수 있고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이루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지금껏 스친 수없이 많은 손길에 구원받았다. 타인이 내어준 곁의 온기를 기억하며, 크게 상처받거나 좌절을 경험한 순간에도 꾸역꾸역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게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주입식으로 익혔다. 학기 초 성폭력 피해에 의한 후유증이 극심할 때 교내 인권센터를 방문해 상담받았고, 스토커가 주변을 배회하는 집에서 혼자 잠드는 게 힘들어서, 그러다 내가 나를 해치게 될까 봐 두려워서 주변에 도움을 청해 친구 집에서 잠을 잤다.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과 면담하며 그들과 같은 삶을 욕망했고, 어쩌면 닿지 못했을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닉했다. 한 학기 동안 학업과 학업 외 삶에 정말 최선을 다해 임했다.

여성 평화 생명 강의는 단순히 학문적 페미니즘 이상의 것을 알려주었다. 내게 오랜 시간 수치심을 안겨준 가난, 소수자성 따위가 나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또한 나는 나를 괴롭히는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듦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생존 이상의 것을 내 삶에 허락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반드시 생존의 상위 개념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생존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은 바로 인간 해방이고, 상호적 이타성이고, 커뮤니언이다. 타인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밀려드는 고독감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 단 하나뿐인 진리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오늘 처음으로 술 마시며 과제를 작성했다. 운동을 하면 근육에 미세한 상처가 나며 근육이 커지는 것처럼, 수업을 듣는 나도 수없이 상처 입고 또 단단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이 도래하자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만함을 버리고, 강함과 취약함이 공존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련다. 과제를 마무리할 시간에 맞춰 집에 방문하기로 한 애인 품에 얼른 파고들고 싶다. 그러다 기운이 나면 다시 책장을 펼치러 가야겠다.




2025.6.21.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수강한 여성학 교양 수업 에세이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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