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 장 의열(4)
모든 수습을 마치고 다시 군영으로 돌아왔다. 난 그동안 모아둔 일본군의 무기와 소지품 그리고 군복을 의열단에게 넘겼다. 우리는 밤새 거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약산은 그 사이 벌써 새로운 작전에 대한 구상을 마쳤고 나의 임무와 제비를 만나는 방법, 다른 의열단과의 접선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새로운 날이 밝고 난 아침 일찍 새로운 운명을 향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선배, 의열단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오. 이번 거사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약산은 끝까지 선배라 불러 주며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난 감자라 불리고 있소. 도쿄에 가서 일본 놈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외다. 혹여라도 시간 되면 놀러 오시오. 악귀 선생. 하하하.”
약산의 동료는 호탕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경성 피스톨이라 불릴 정도로 제비 선생의 권총 솜씨는 대단하오. 봉오동 저격수와 경성 피스톨의 만남이라. 내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게 한스럽소.”
그는 호탕함을 잃지 않고 이어 말했다.
“꼬마라 불린 봉오동 저격수는 백두산에서 죽었소. 난 그저 악귀일 뿐이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그들과 헤어졌다.
‘니가 말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가 보려 해. 어떤 슬픔이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숨어있을 수만은 없어. 어느 곳에서 어떤 인생을 살던 너의 마지막 말처럼 꼭 행복해 보려고 노력할게.’
백두산을 떠나기 전 시연이의 무덤을 찾았다. 자신은 없었지만 시연이가 바랬던 나만의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다짐을 했다. 시연이를 보내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저격총을 시연이의 무덤에 묻었다. 사부이자 은인인 운산 장군이 아주 아끼던 총이라 들었다. 러시아군과 무기 거래 중 우연히 발견한 스프링필드라는 소총은 미국 육군에서 사용하는 무기였다. 주로 러시아 무기를 구입하던 운산 장군은 처음 보는 그 총이 한눈에 들어왔고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였다. 게다가 그 총은 조준경이 달려있는 저격용이었기에 전략에 뛰어난 운산 장군에게 다양한 작전을 꿈꾸게 해 주었다. 그런 총을 나에게 주었다. 그 덕에 난 봉오동 저격수가 될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을 여기에 묻고 떠날 것이다. 이제 만주에서의 모든 기억을 뒤로한 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할 것이다. 꼬마가 아닌 악귀가 되어.
경성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복을 입고 태연히 돌아다니니 소총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제비는 검문에 걸려 경관을 때려눕히고 겨우 도망쳐 석탄이 실린 화물 열차를 몰래 타고 힘들게 경성으로 들어왔다 하였다. 하지만 난 장교복과 장교 신분증 덕에 아무 제제 없이 편안히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도착해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고 새해를 맞은 지 닷새나 지나 있었다.
경성에 오자마자 난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경성 한복판에 있는 남산이었다. 예정대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니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그것은 지난 시간 내가 겪은 많은 일만큼 경성에도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국경에서 온 귀신이오?”
“밀양 사람의 말을 전하러 왔소.”
경성의 새로운 풍경에 대한 감회에 젖어있을 때 제비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난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또한 그런 것 같았다. 난 약산이 전해준 쪽지를 제비에게 건넸다. 거기엔 딱 두 글자만 있었다.
‘미끼.’
그 쪽지를 본 제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의백이구만. 이래야 의열단장이지.”
그는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밀지를 받고서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경성을 한눈에 내려보고 있었다.
“서운하지 않으시오?”
“임무 말이오?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는 일이오. 의백은 많은 고뇌 끝에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이오.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수장으로서 이런 결정을 내려준 의백에게 고마울 다름이오. 그 덕분에 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어서 즐거울 뿐이외다.”
약산도 그러했지만 제비라는 인물 또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있었다. 의열단원들은 참 단단한 존재 같았다.
“권총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소만.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소?”
결코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 그를 보니 약산이 전해준 이야기가 떠올라서 물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는 덤덤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복종하고 내 한 몸 편히 지내면 정녕 편안할 것 같소? 이 세상 모두를 속여도 내 마음은 속일 수가 없소. 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오.”
이어진 그의 말을 들으며 난 너무도 그리운 형님인 흥 장군과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난 할아버지와 시연이를 잃은 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핑계를 대고 숨어 버린 것이었다. 힘들다고 그냥 다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끝까지 이루어 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신념을 지키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일까? 그러면 시연이가 말한 행복을 찾는 것일까?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직은 그 어떤 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장의 일만을 생각하자고 다짐하였다.
“마지막 남은 폭탄이오. 그리고 나는 여기서도 귀신이어야 하오.”
약산으로부터 전해받은 폭탄을 제비에게 건넸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이군. 거사를 위해서 그대가 드러나면 안 될 일이지. 때가 되면 목표를 가지고 오겠소. 그때까지 잘 지내시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가던 길을 멈추고 그가 뒤돌아 봤다.
“만나서 영광이었소.”
나의 수줍은 고백 같은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남산 중턱에 있는 미리 정해논 연락처를 통해 의열단원으로부터 밀지를 받았다. 누군가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이었다. 폭탄의 위력이 약해서 큰 피해는 없었지만 경성 한복판에 일본의 주요 통치 기관이 폭파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혈안이 되어서 배후를 찾으려고 난리를 칠 것이었다. 그날부터 난 제비의 거처인 삼판통이 있는 남산 서쪽 방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닷새 정도가 흐르자 제비가 다시 남산에 나타났다.
“목표는 종로 경찰서요. 내 그들을 한 번 뒤집어 놨으니 이제 그들은 전력으로 날 쫓을 것이오. 그때가 기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