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장 유럽(1)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육 년이 넘었다. 난생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며 유럽에 첫발을 내딛던 그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순간이 떠오르자 마치 과거가 없던 사람처럼 현재만 바라보며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공허함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멈출 자신이 없었다.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꺾지 못했던 그 바보 같은 일본군 장교와 같이 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의백의 지령으로 유럽으로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부다페스트라는 헝가리의 큰 도시였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전쟁이 끝난 지도 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곳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헝가리는 패전국으로서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고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은 나를 압도하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세계였다. 거리에 늘어선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은 그 웅장함뿐 아니라 장구한 역사까지 나에게 말해주는 듯하였다. 분주하게 거리를 다니는 전차들과 간간이 보이는 자동차까지 도시의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나는 놀라고 또 놀랐다. 경성에서도 큰 건물과 전차 같은 신식 문물을 보았지만 전체적인 도시의 분위기는 경성에서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오랜 세월 외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전쟁의 패전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나라와 같은 분위기를 막연히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유럽은 유럽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소?”
이역만리 타국에서 난데없이 들어오는 우리말에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시선이 향한 곳엔 말끔히 양복을 차려입은 동양 신사가 서 있었다. 그는 의백이 나를 위해 남긴 마지막 배려였다. 그 또한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신세계에 발을 내민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도와준다 하였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의백이 특별히 미리 안배를 해 놓았기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그 순간 그의 존재는 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그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그는 나에게 난생처음 먹어보는 맥주를 내어주며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신씨 집안에서 태어나 홍일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왜놈들의 국호와 같은 글자가 싫어 ‘일’ 자를 버렸소. 그냥 편안하게 신홍이라 불러 주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조차 없이 살았소. 아주 어릴 때 부모님 두 분 다 여의고 최가라는 것만 누군가 알려 주었소. 맘대로 부르시오.”
“그럼 존이란 이름은 어떻소? 그대처럼 이름 없는 사람을 영어로 존 도라고 부를 정도로 아주 흔한 이름이오. 이름 없는 그대에게 딱 어울리는구려.”
“맘대로…”
그는 아주 쾌활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남의 이름을 맘대로 지어서 부를 정도로 좀 무례하기까지 했으나 그의 그런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 그리고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 해서 독립운동 같은 걸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대를 부탁한 사람이나 그대처럼 난 진지한 걸 그리 좋아하지 않소. 그저 유랑하는 양반집 자제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대해 주시오. 내 노는 건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놀고 싶을 땐 언제든지 환영하오.”
밖으로 나가면서 던진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내가 과연 이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지만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처음 맞이하는 낯선 장소에서 낯선 부류의 인간과의 생활이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였다. 맡은 임무를 어찌 행해야 할지도 막연하였다. 모든 것이 불안하였고 막막하였지만 한편으로 느껴지는 이 도시의 생소한 분위기에 어떤 새로운 운명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유럽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한동안은 그저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그 시절 부다페스트에는 미국, 영국을 포함한 타 지역 사람들이 꽤 있었기에 영어로의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우당 선생 덕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이후 몇 년간의 배움이 헛되지 않았는지 나는 여기서 일상적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다. 운산 장군을 만나 배운 러시아어도 한몫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일반 국민들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마자르를 찾는 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기에 일단 숙소 근처부터 시작해서 무작정 돌아다녔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동양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럽은 길거리에서 먹고 마시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카페던 음식점이던 야외 테이블이 있었고 그곳에서 부다페스트의 광경을 즐기던 서양인들은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동양인에게 호기심을 갖고 말을 걸어왔다. 의백에게 받은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로 최대한 아끼고 있었다. 염치를 불구하고 신홍의 숙소에서 먹는 것을 전부 해결하고 있던 나에게 서양인들은 음식과 커피를 권하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처음에는 경계심에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였지만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돈도 아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는 참으로 모순적인 시기였다. 얼마 전까지 벌어진 전쟁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큰 부를 창출하였다. 특히 미국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전례에 없던 규모와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은 막대한 비용과 물자를 필요로 하였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국가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고 큰 이윤을 챙겼다. 또한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의 최대 생산국인 미국에게 전쟁은 최고의 고객이었다.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전쟁 이후 후유증에 힘들어한 것과 대비되었다. 경제적인 호황에 힘입어인지 많은 미국인들이 유럽에 왔고 나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서양인 중 대다수는 미국인이었다.
물론 미국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도 많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엄청난 수의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전쟁의 주요 무대였으며 그 여파는 그들의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런 비극 때문인지 모두들 마음속에 짐을 지고 살고 있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