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장 유럽(2)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그 거리에서 들었다. 며칠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갔더니 그곳에 항상 모여있던 한 무리의 서양인들과 친해졌다.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거기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리고 직접 느꼈다. 너무나도 새로운 문화와 생각들을.
거기서 만난 상당수는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모두 전쟁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려해졌다. 모순적인 시대다웠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며 즐길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상처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방탕해졌고 순간을 즐기려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의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계정세에 주목하였다. 운산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봉오동에서 어깨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전 학교에서 유럽을 배웠다. 내 머릿속에 서양의 나라들과 서양인들은 강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은 그것과 너무도 달랐다. 이들은 한없이 약하고 불쌍한 존재였다. 백두산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나와 너무도 닮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전쟁과 침략, 그 속에는 인간들이 있었다.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나와 각자의 국가의 승리를 위해서 싸웠던 그들은 나라를 떠나 하나의 개별 인간이었다. 국가의 승리에 기뻐하기보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전우가 먼저 떠올라 괴로워하는 인간이었다. 그들이 불쌍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나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다시 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만나는 시간도 길어졌고 가끔씩 그들의 술자리에도 참석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의 제안으로 리볼버 클럽이라는 사설 사격장에 가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였다. 우리는 두 명씩 편을 먹고 내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드리안이라는 친구와 같은 편이 되었다.
아드리안은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미군에 복무 중인 그에게 참전 명령이 내려졌고 자신과 같은 핏줄에게 직접 총구를 겨눌 수 없었던 그는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했지만 운이 없게도 한쪽 팔을 심하게 다쳤다. 잘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제대로 팔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었다. 이 무리에는 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쟁 중 부상은 흔한 일이었지만 그의 부상은 중한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긍정적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기억을 잃거나 쓰러질 때까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쓰고 싶어 했다. 남은 한쪽 팔로 무언가를 할까 고민을 하며 사는 친구였다. 또한 그는 동양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문화라던지 그 안의 사람들은 어찌 사는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일본의 감시 때문에 난 여기서 중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신홍이 지어 준 존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 외에 모든 과거는 비밀로 하였다. 그래서 아드리안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그에게 대답을 해 줬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와 친해졌고 그는 아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님에도 항상 나의 비용을 내주었다.
“어이 존, 리볼버 쏴본 적 있어?”
“아니, 처음이야.”
“그럼 이렇게 해봐.”
아드리안은 리볼버를 쏘는 방법을 나에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리볼버는 진짜 처음이었다. 항상 소총만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격의 본질은 같으니까. 그걸 알리 없던 아드리안은 친절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외팔이 명사수와 눈이 찢어진 꼬맹이라. 한 발이나 맞출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얼마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미국인이었다. 미국 남부에서 정유 회사를 운영하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라며 거들먹거리는 이자는 항상 자신의 똘마니 하나를 데리고 우리가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오만한 태도와 거친 말투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그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매번 끼어들었다. 이날도 이 녀석은 멋대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이봐, 말 좀 가려서 해줄래? 지금 여기 있는 모두는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마음을 터놓는 친구들이라고.”
동양인을 비하하는 그 녀석의 말투에 아드리안이 약간 화를 내며 대꾸했다.
“이게 누군가? 위대하신 전쟁광의 후예 아닌가. 이제 그만 미국인인 척하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 그 남은 한쪽 팔을 바치는 게 어떤가? 전쟁에 미친 핏줄과 미개한 노란 원숭이라니. 이곳도 있을 만한 곳이 못 되는군.”
아드리안의 배경에 대해 들은 적 있는 그 녀석은 더욱 우리를 자극했다.
나는 흥분해 그에게 다시 뭐라 하려는 아드리안의 어깨를 잡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녀석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와서 말리기 시작했고 아드리안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이, 그렇게 화가 나면 우리를 이겨봐. 너희 둘과 우리 둘만의 대결로 모든 걸 끝내는 건 어때? 지는 팀이 여기의 모든 비용과 오늘 저녁까지 다 포함해서 사는 거야.”
겨우 진정된 상황에 그 녀석은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대신 너네가 지면 우리의 배경에 대해 심한 말 한 것 정식으로 사과해. 모두 보는 앞에서.”
화가 나지만 걱정이 앞서 있는 아드리안 대신 내가 나서서 상대를 했다.
아드리안이 다친 팔은 그가 주로 사용하는 오른팔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왼팔로 리볼버를 처음 쏴보는 파트너와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보였다. 나 역시 내 실력을 드러내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드리안에게 꼭 승리를 안겨주고 싶었다. 저 재수 없는 녀석이 핏줄을 운운할 때는 꼭 일본 놈 같았고 실력으로는 너희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난이도 최상위의 가장 작은 과녁을 열 발씩 쏘아 많이 맞춘 팀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여유 만만한 그들이 선공에 나섰다.
“너희들이 왜 열등한 존재인지 가르쳐 주지. 그런 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야. 유전자에 남아있는 거지.”
비아냥거리며 그 녀석의 똘마니가 먼저 나섰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과녁이라 반 이상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였다. 말만 앞선 놈인 줄 알았는데 여섯 발을 명중했다. 다음은 아드리안의 차례였다.
“사격은 집중력과 호흡이라고 네가 말했잖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조금 덜 익숙한 팔이라고 걱정하지 마.”
나는 약간 긴장한 듯한 아드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아드리안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비록 전쟁에서는 후방에 있었지만 그는 원래 전투 부대 소속으로 부대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조건이었지만 그는 익숙하지 않은 팔로도 똘마니보다 한 발 더 맞췄다.
“내가 돈만 많은 허풍쟁이라 생각하지 마. 나도 니들처럼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웠다고.”
그 녀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