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장 유럽(3)
예상외의 실력이었다. 그 녀석은 두 발을 제외하고 모두 과녁에 정확히 맞췄다. 말만 앞서고 실력은 형편없길 바랐던 모두들 실망하였고 아쉽지만 패배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드리안의 실력을 본 그 녀석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거란 기대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윈 중요치 않았다. 이미 연습을 통해 리볼버의 감도 익혔고 사격은 그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한때 난 봉오동 최고의 저격수였다. 난 아주 편안하게 사선으로 향했다. 얼마 후 난 사선에서 내려왔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아홉 발을 맞추고 마지막 남은 총알 하나를 약실에서 꺼내 손에 들고 있었다.
“너를 이기고 나서도 나에게는 아직 총알이 남아 있어. 이걸로 내가 무엇을 쏠 수 있을까? 오늘 일을 평생 명심해.”
나는 그 녀석의 손에 총알을 쥐어 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곳에는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정 못 해. 다시 한번 더 해. 소총으로 하자. 난 원래 소총을 더 잘 쏴. 어이, 주인장 여기 소총으로 바꿔 줘요.”
그 녀석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새로운 게임을 제안하였다.
이곳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리볼버뿐 아니라 소총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결국 그 녀석이 원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번엔 내가 먼저 나섰다. 난 역시나 열 발 모두 맞췄고 뒤이은 그 녀석은 아까보다 못한 여섯 발을 맞추는데 그쳤다.
“평정심을 잃은 대가다.”
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녀석에게 한 마디를 던지고 모두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존이라 했나?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가 점잖게 말을 걸어왔다.
“편한 대로 하시지요.”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나 역시 존이라 하네. 난 여기 주인일세. 자네의 사격 솜씨에 반해서 잠시 실례 좀 하겠네. 사격은 어디서 배운 건가?”
“그냥 여기저기...”
그의 질문에 순간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못 했다.
“괜찮네. 모두 자기만의 과거는 있는 법이니. 자네 여기서 일해 보는 게 어떤가?”
뜻하지 않은 그의 제안에 난 갑자기 일자리가 생겨 버렸다.
이제 이곳의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 한 달쯤 전 그 대결 후 사장님의 제안으로 직장을 갖게 된 덕에 훨씬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임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재수 없는 녀석을 만나 대결을 펼친 것이 오히려 큰 행운이 되었다. 일을 시작한 후 나는 더 이상 카페 거리에 나가지 않았다. 그 거리에 나가지 않고도 나의 곁에는 항상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대결이 있던 그다음 날 오전 난 우리가 자주 들리던 카페 거리를 돌아다녔다. 역시 내 예상대로 아드리안 혼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아드리안에게 미소를 보이며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존, 어제는 어디 간 거야? 다들 너를 찾았다고.”
“아드리안, 축하해 줘. 나 일자리가 생겼어.”
우리는 어제의 상황에 대해 서로 말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일자리에 대한 제안과 약자를 괴롭히는 미국인 녀석들의 행동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조용히 그 자리에서 나와서 신홍의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돌아간 것을 눈치챈 사람이 없을 만큼 모두들 흥분해 있었다. 우리에게 진 녀석들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물론 아드리안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지도 않았다. 아드리안과 친구들은 그곳에서 승리를 충분히 즐긴 후 다 같이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아마도 이 시간까지 모두들 취해서 자고 있을 것이다. 아드리안과 둘이서 조용히 얘기하기 참 좋은 시간이었다.
“아드리안,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사실 난 중국인이 아니야. 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어.”
긴 시간을 봐 오던 사이는 아니지만 아드리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나에 대해서 사실대로 고백했고 마자르를 찾는 임무에 대한 조언도 구했다.
“아, 역시 그랬구나. 어제 사격하는 너의 모습이 잘 훈련된 군인처럼 보였어. 한 나라의 소속된 정식 군대도 아니면서 그런 실력이라니 정말 놀라운 걸.”
아드리안은 다행히 나를 이해해 주며 이어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줘서 고마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임무를 위해서 나도 최선으로 도와 볼게.”
한동안은 일하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사격장은 그 규모에 걸맞게 할 일이 다양하며 많았다. 총기 손질에서부터 매장 청소까지 다양한 일이 주어졌고 때로는 손님들이 원하면 사격 자세를 고쳐주는 간단한 교육도 시행했다. 손님들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질 기회가 생겼고 헝가리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기회도 더 많아졌다.
헝가리에 온 지도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난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마자르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일제의 마수는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고 급한 마음도 들어서 본격적으로 마자르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좌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친해진 손님에게 마자르에 대해 묻자 ‘마자르는 여기 있잖아’라고 대답했다. 무척 당혹스러웠으나 이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마자르는 헝가리 민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민족이듯이 헝가리란 국가를 세운 민족이 마자르족이었다. 의열단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마자르란 청년은 자신이 헝가리인이라고 밝힌 것이었다.
마자르란 이름만 가지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지 의백의 말대로 내가 직접 폭탄을 배워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일도 잘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복잡해지던 어느 날 아드리안이 찾아왔다.
“존, 쌤이라고 알아? 아주 재미있는 동양인 친구야.”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의 말에 이름이 다른 한 사람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보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어때?”
마침 일찍 끝나는 날이기도 했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기도 할 겸 약속을 잡았다.
“어이, 같이 사는 친구여. 오랜만이군”
일을 마치고 나간 자리엔 역시 예상대로 신홍이 있었다.
그와 마주 보고 얘기하는 건 헝가리에 도착한 날 이후 처음이었다. 초반에는 서로 활동 시간이 달라 자는 모습만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참 특이한 동거 관계였다.
“같이 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먼.”
그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데.”
“견문을 넓히러 여기저기 유랑을 좀 다녔지. 자네도 같이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나저나 둘은 어떻게 된 거야?”
“국경 근처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말이 안 통해 고생을 좀 했지. 그때 독일어를 하는 이 미국인 친구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주었지.”
신홍은 한동안 여행을 다녔다. 헝가리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같이 먼 나라까지 두루 섭렵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스트리아에서 아드리안과 우연히 만났다. 신홍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드리안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짧은 시간에 그들은 아주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