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15.

by 최신글

며칠 뒤, 서울 집.


축배를 들자! 축하의 시간을 갖자!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미궁이 마침내 사라졌다.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근심이 모두 사라졌다. 불가사의로 답답했던 나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우리 모두 한자리에 모여 축배를 들자! 아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다. 어서 빨리 글을 쓰자. 소설을 쓰자. 인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창작의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심해 밑바닥 끝까지 잠수해보자. 그 안에서 나 자신을 고찰해보자. 인간의 깊이를 음미해보자. 인생의 모든 골수를 마셔보자. 글자만이 담을 수 있는 정수를 모아 소설로 건축해보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몸부림쳐보자. 아아, 아니다. 이게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이게 아니다. 답답하다.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왜 아직도 인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아직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일까? 비밀은 풀렸다. 미궁은 깨졌다. 아니다.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다. 두려움이 인물 앞에 서서 나를 가로막고 있다. 왜일까? 어째서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아아, 질문과 호기심이여! 당신들의 여정은 대체 언제쯤 끝나나이까? 당신들의 여정에 끝이 있기는 합니까?

너는 죽어야 한다.

아아악!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일까? 진즉 사라졌어야 할 네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다는 말이냐? 그렇구나! 나의 미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구나! 나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구나!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미궁이여! 인생이여! 운명이여! 팔자여! 너의 이름은 불가사의로구나! 나는 너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너의 기구한 처지에 눈물로서 공감한다. 아아, 괴롭다. 고통스럽다. 대체 어떻게 해야만이 이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비밀이 풀리고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했건만, 모든 건 나의 착각이었구나. 얼굴 없는 여인이 또다시 나의 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를 않는구나. 나의 이상은 아름다움을 지향하건만, 현실은 그런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다. 냉혹한 현실이 여느 때보다도 더 차갑게만 느껴진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정의롭게 살 거라고, 남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살 거라고, 그렇게 품었던 나의 이상은 모두 헛된 것이란 말인가? 나만의 몽상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현재 타락하고 있는 것일까? 그쪽 길이 아니라고 인생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올바른 인생이란 말인가? 영희의 말대로 나는 죽어야만 이 미궁에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너 한수아여, 너는 기어코 나의 목숨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이냐? 그래야만 네 한이 풀린다는 것이냐? 아니다. 너는 한수아가 아니다. 아니다, 모르겠다. 얼굴 없는 여인이여, 너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핸드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마을 이장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왔는가? 음, 잘 지냈고? 그려. 여기 와 앉아. 며칠만이지? 한 사흘 됐나?

네.

그려……

죄송합니다.

음? 뭐가? 아, 우리 영희? 됐어―. 갸도 인자 다 컸는디 지 인생은 지가 알아서 혀야제. 게다가 원래라믄 자네를 죽인 다음에 지도 콱 죽을라고 했담서? 미친년이지, 미친년이여. 아무리 내 새끼라지만, 부모라도 자식 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더만. 쯧, 그래도 살아있는 게 어디여. 어즈께도 한번 보고 오긴 혔는디, 자네가 아니였으면 그렇게 만나보지도 못혔을 거여. 자네, 민사 소송도 포기했담서? 경찰서에 가니께 그짝 양반들이 그라더라고. 증인 조사 때 우리 영희헌티 유리하게 말해줬다고. 그러니께 자네헌티 고맙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고,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도 나여. 절대 나헌티 부담 갖지 말어. 미안해혀지도 말고. 우리 영희때매 많이 놀랬제? 어디 다치덴 없고? 그려, 그나마 좀 다행이구먼. 우리 영희헌티는 내가 다 잘 말해놨응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거시여. 우리 영희가 그래놔서 미안혀.

아닙니다, 이장님. 제가 좀 더 잘 했어야하는데. 그리고 저희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마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 뭐, 나가 마을 이장인께 당연한 일이제. 요즘 젊은이들이야 이해를 못하것지만, 예전에는 다 그렇게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살았으.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잖여…… 자네가 태어났을 때도 그러했고.

네?

아이고야, 이 주둥이 좀 봐. 자네 아버지랑은 비밀로 허자고 약속까지 혔었는디…… 아니다.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응께 인자 상관이 없으려나? 아니 뭐, 별일도 아녀. 어차피 다 지나간 과거니께. 알아도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여. 내 말은 그러니께, 자네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거여. 근디 자네가 정말로 궁금허다면, 조금은 알려줄 수야 있제. 어찌 할란가? 나야 뭐 젊은 양반이 옛날이야기를 좋아할란가도 모르것고. 아니 뭐 근디, 어차피 여그 사람도 하나 없은게, 심심풀이 땅콩으로 한 번 들어보것어? 따지고 보면, 다 자네 가족 이야기잉께. 잉?

…… 네, 말해 주십시오.

커 흠, 뭐, 나가 형님허고 약속은 혔지만, 자네가 그렇게 애원을 하니께, 내가 눈 딱 감고 알려주는 거여. 두 번 얘기 안 할 거니께, 잘 들어봐. 그러니까 말여, 고거시 말여, 벌써 삼십 년 하고도 몇 년이 지났으야? 고렇지!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이제. 혹시 자네 할아버지를 기억할란가? 아니다.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께 모르는 게 당연하것네. 아무튼, 그 양반이 정말 대단혔지. 덩치도 호랭이만 하고, 성질도 어찌나 포악하던지, 그 양반에 비하면 자네 아버지는 애기였어, 애기. 그 양반 앞에만 있으면 형님이 꼼짝을 못혔당께. 놀랍지? 자네가 알던 형님이랑은 완전히 딴판이니께. 그래서 나가 왜 그런고~ 하고 가만 보니께 말여, 딱, 아들이 없어서 그렇더라니께. 아들이 없어서. 잉? 생각을 혀봐. 하나뿐인 자식을 장가보내 놨더니만, 딸만 하나 덩그러니 놓기만 하고 그 이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잖여. 딸이 누구냐고? 아, 누구긴 누구여, 자네 누나지. 그려. 그러니께 그 호랭이 양반 심기가 뒤틀리지 않았것어? 안 그려? 아, 물론 요즘이야 시대가 다르지만, 그때는 그랬제. 아무튼 말여, 나가 가만히 있을 수 있간디? 같은 마을에서 형님, 동상하는 사이인디. 아는 사람들헌티 물어물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가 소개를 해줬지. 아 그랬더니, 그 호랭이 양반이 당장에 형님이랑 같이 점쟁이를 찾아갔다는 거 아녀. 햐햐―. 아무튼 대단한 양반이여. 나야 뭐 그냥 속으로만 그러는 갑다 허고 있는디, 며칠 뒤에 보니께, 집 앞마당에 굴을 파고 있더랑께. 그래서 내가 다가가서 물어봤지. 어르신, 시방 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자네 할아버지가.

아, 뭐하긴 뭐해? 자네가 알려준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거참, 용하기는 용하데? 응? 가자마자 우리가 왜 온지를 딱, 허니 알아맞히고 말여.

그래서 내가 또 물어봤지. 아니, 뭔 일이간디, 점쟁이가 집 앞에다가 굴을 파라고 한대요?

뭐하러 파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니께 파는 거지. 그 점쟁이가 그라는디, 여기 집터 자체는 봉황의 기운을 품고 있더라네? 근디, 웬 지네 새끼가 한 마리 들어와 있다는 거여. 그래서 아들을 못 낳는거라고. 그러니까 그 지네 새끼만 여기서 나갈 수 있게 구멍만 하나 파두라고, 그렇게만 하면 봉황이 날개를 펴서 아들을 볼 수 있을거라나? 하하하. 그래서 이왕 굴을 파는 김에 생강 굴을 하나 만들어 두려고. 아, 자네도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여 와서 좀 도와.

아따, 그라요? 햐햐―. 그라믄 저도 도와야 쓰것네요잉. 아니 그란디, 이렇게 공사를 혀는디 어째 기공식도 없어븐다요?

기공식? 뭔 기공식?

아, 왜 티비같은디 보믄 있잖아요. 막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줄도 자르고 사진도 찍고 혀는 거.

하하. 아니 뭐 겨우 생강 굴 하나 파는디 무슨 놈의 기공식이여? 기공식은. 거 쓸데없는 소리나 허지 말고, 빨리 삽이나 들어. 응? 잠깐만, 스읍. 이보게 박씨, 자네 혹시 집에 사진기 있는가?

왜요? 우리 아가 태어나믄 찍어줄라고 하나 사두긴 혔는디. 왜 그런다요?

그래? 그럼 잘 됐구먼! 그거 나 좀 빌려 줄 수는 없는가? 아니 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왕 하는 공사인디 좀 더 정성을 쏟아야 허지 않겄어?

라는 거여. 그래서 어쩌긴? 사진기랑 갖다가 기념사진도 찍고 공사도 시작혔지. 흐. 재밌었으―. 재미나게 일했었지. 생강 굴 말이여, 높이가 10미터에, 폭 1미터짜리로 깊이도 팠었으. 그러고 나서는 밑바닥에서 십자 모양으로 각각 4미터씩 더 파들어갔으니께 솔찬히 큰 공사였제. 나도 열심히 돕는다고 도왔지만, 그 호랭이 양반헌테는 못 당하겠드만. 그 양반이 아주 대단했어. 날이 갈수록 눈빛이 부리부리혀지는디, 참말로 호랭이 같았당께. 그만큼 손주가 보고 싶었을랑가?

그렇게 해서 제가 태어났다는 말씀이신가요? 점쟁이 말대로?

그렇제! 참말로 놀랍제? 점쟁이 말대로 아들이 태어났당께? 아, 말도 말어. 마을에서는 기적이라고 난리도 아니었응께. 자네가 태어났을 때, 자네 어머니 연세가 마흔 하고 다섯인가 드셨을 거야. 나이도 나이였지만, 아가를 낳은 지가 한참이나 지났었으니께 말여. 자네 누나 나이가 열 여덞인가 그랬으니께 한참은 되았제. 아무튼 내 말은, 자네는 점쟁이 말대로 생강 굴을 파서 태어났다, 이거여.

…… 어딘지 과학적이지 않은 이야기네요.

흐흐. 그런가? 맞어.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어. 허지만 말이여, 나는 그 점쟁이 말도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혀. 나야 뭐 종교는 없지만, 가끔 보면 말여, 이 세상에는 정말 사람의 머리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하구나, 라고 생각을 현다니까. 햐햐. 이상허지? 그래도 한평생 농사꾼으로 자연과 같이 살다 보믄 말이여, 그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야. 자네가 그걸 알란가 몰라. 아무튼 내 눈에는, 자네도 그렇고,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알 수 없는 일들이 가득허다 이거시여.

네……

자네 혹시 그 호랭이 영감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는 있나?

할아버지요? 할아버지는, 사고사를 당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생강 굴에 들어가셨다가 질식사를 하셨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굴속에 들어가시기 전에 꼭 먼저 신문지에 불을 붙여서 굴속에 던져 넣으셨던 거로 기억해요. 혹시 내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가스를 없애려고요.

그려, 맞어. 남들헌티는 그렇게 말하기로 형님하고 약속을 했었제.

네?

음? 아이고야! 이놈의 주둥이가 또 말썽이네, 말썽이여. 잉? 에휴, 인자 나도 모르것다. 비밀로 허자고 형님허고 약속까지 혔었는디. 시방 다 탄로 나게 생겼으니 어찌혀야 쓰거스까잉? 응? 아니 그란디, 자네는 그렇게도 궁금한가? 잉? 아, 솔직히 나도 직접 본 게 아니라 정확히는 몰러. 사달이 다 완료되고 나고 나서야 도착혔으니까. 그러니께 말여, 내 말은 들어도 별 신빙성이 없다 이거여. 그런데도 듣고 싶은가? 아니 뭐, 서로 비밀로 허자고 형님하고 약속은 혔지만, 자네는 형님 아들이기도 혀니께, 굳이 따지자면 남남은 아니잖여? 안 그랴? 잉. 그러니께, 자네가 정말로 듣고 싶어 한다면, 내가 특별히 말해 줄 수는 있다 이거여. 어때? 자네는 그렇게도 듣고 싶은가?

…… 이장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건 아닌가요?

흐흐흐. 사실 나가 입이 좀 근질근질 혔어야. 아, 그럼 오늘 아주 잘 됐네! 나는 입이 근질 허고, 자네는 귀가 근질 혀니까 말여. 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왕 시작한 김에 오늘 아주 싹 다 말해버리지 뭐. 안 그랴? 자네도 인자는 다 큰 어른인디,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것는가? 음? 흐―.


이죽 웃는 이장의 얼굴 위로 얼굴 없는 여인이 겹치는 듯 보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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