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

by 최신글

아버지의 시신은 화장한 뒤 분골함에 담아 어머니 옆에 묻었다.

나는 고향 집에 다시 돌아왔다.


시간상으로는 며칠 지나지도 않았건만, 마치 몇 년은 지난 듯하구나. 이 집이 원래 이렇게 썰렁했던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너무나도 황량하구나. 집이 사람을 따듯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집을 따듯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집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부동산에 내놓아야 할까? 그런다 한들 사는 사람이나 있을까? 안 팔리면 내가 살아야 하는 걸까? 그건 싫다. 이제 고향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는 않다. 일단 집을 좀 정리하자. 쓸만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해보자. 아, 여기에 있는 건 무엇일까? 누나의 일기장이구나. 생각해보니 나는 누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구나. 누나는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나를 가졌던 게 그토록 괴로웠을까? 그토록 괴로웠었다면, 왜 나를 낳았을까? 후, 그만하자. 그만하고 누나의 일기장을 읽어보자. 두려움이 나의 손을 붙잡는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은 더 강하다.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미궁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XXXX년 XX월 XX일

괴롭다. 죽고 싶다. 아버지의 말대로 아기를 낳았건만 후회스럽다. 아버지는 왜 아기를 낳으라고 했을까? 아버지가 밉다. 미칠 듯이 원망스럽다. 아기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놈이 떠오른다.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죽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내 기억 속의 그놈도, 아기도, 아버지도, 엄마도, 모두 죽여버리고 싶다. 괴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 저 녀석은 대체 언제 사람의 말을 배웠을까? 이제는 나를 보고 누나라 부른다. 죽은 짐승이 놈을 통해 말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그저 나의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정말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놈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다. 아아아악! 아니다! 나의 망상이 아니다! 놈은 죽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무섭다. 소름 끼친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저 새끼 짐승도 내 비명을 들은 걸까?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나를 보고 비웃는다. 너도 죽으라고, 어서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놈이 나를 향해 손짓한다! 크흐윽. 차라리 저 녀석을 죽여버릴까? 놈을 죽이면 이 저주가 사라질까? 더러워진 이 몸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봐도 마음속의 응어리는 사라지지가 않는다. 비명을 지르다 지쳐 잠드는 게 일상이다. 눈이 부어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아, 예전에는 내 웃는 얼굴이 이쁘다고 좋아해주던 남자들도 많았건만, 이제는 거울을 쳐다보기도 싫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보는 것만 같다. 망가져만 가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다. 아아, 이렇게 사는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을 자듯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


XXXX년 XX월 XX일

어머니의 권유로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다. 매일 밤 반복되는 꿈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괴롭다. 죽자. 죽여버리자. 다 불태워버리자. 아아아악! 집 안의 물건들을 미친 듯이 때려 부숴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정신이 가라앉지 않는다. 괴로움은 언제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미칠 듯이 폭발하는 감정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다! 나를 보고 비웃는 저 새끼 짐승 때문이다! 저놈만 없었으면, 저놈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저놈을 죽이자. 저놈만 잡아 죽이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때 아버지가 늙은 짐승을 목 졸라 죽였던 것처럼, 나도 녀석의 목을 졸라 죽이자. 아아,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 내가 약을 어디에 두었더라? 이제는 약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 약이 없으면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감정이 폭발하듯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죽여버리자. 다 죽여버려. 죽여야 한다. 저 짐승을 죽여야 해.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어서 빨리! 놈들이 돌아와서 내 손발을 다시 묶기 전에 어서 빨리 저 짐승을 죽여!


XXXX년 XX월 XX일

죽여버려. 죽여.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려! 다 죽여버려! 다 죽어야 해. 다 죽어! 너는 죽어야 해! 너는 죽어야만 해! 죽어! 죽어! 죽어! 다 죽어버려! 죽어! 왜 죽지 않는 거야? 죽으란 말이야. 제발 죽어줘. 제발, 죽어! 죽어! 이 더러운 짐승 새끼야, 제발 죽어! 죽어라! 죽어버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 죽였어야 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죽어! 죽어버려! 너는 죽어야 해! 너는 죽어야만 해! 죽어! 죽어! 죽여버려! 죽어버려! 죽어! 죽어!


아아, 무섭다. 더는 못 읽겠다. 이게 대체 무슨 글이란 말인가? 누나의 일기장에서 나를 향한 깊은 증오가 전해진다. 괴로웠던 감정들이 전해진다. 크흐윽.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그대들은 알았는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존재는 괴롭다. 슬프다. 비통하다. 가슴이 찢어진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아, 나에게 전해오는 격렬한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일기장에 적힌 누나의 글자 때문일까? 그동안 단절되고 고립되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누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누나는 홀로 괴로워했었다. 늘 혼자 사랑방에 틀어박혀 귀신이 들린 것처럼 불안해하고 괴로워했었다. 고함을 지르며 물건들을 다 때려 부쉈다. 크흐윽. 그때 누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아, 나를 이 세상에 낳아준 여인이여! 당신을 향한 연민에 눈물을 흘립니다. 부모님이 누나의 손과 발을 묶어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문에 누나의 정신만 더 악화되었었다. 누나가 대소변마저 가리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부모님은 누나를 사랑방에 가두는 걸 그만두었다. 그리고 정신 병원에 데려갔었다. 다행히 누나의 병세가 호전되는 듯 보였다. 부모님은 안심했었다. 아니다. 안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나만큼이나 부모님도 지쳐있었을 테니까. 누나만큼이나 괴로워 했었을 테니까. 그러다 사달이 나고 말았다. 부모님이 모두 안 계셨을 때, 가을철에 농작물을 수확하느라 두 분이 모두 집을 비우셨을 때, 누나가 나를 죽였었다. 내 목을 졸라 죽였었다. 아아아악! 그랬었노라! 누나가 나를 죽였었노라! 나의 목을 조르던 누나의 차가운 손가락이 떠오른다. 귀신같이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그 뒤에서 번득이던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아아아, 드디어 얼굴 없는 여자의 정체를 깨달았도다! 그녀는 나를 낳아준 엄마였노라! 내가 따랐던 누나였노라! 나를 죽였던 병자였노라! 그래, 그때 누나는 나를 죽였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었다. 아아, 괴롭구나. 너무나도 괴롭다! 진실을 깨닫는 대가가 이렇게 크다는 말이냐? 그래, 그랬었다! 나는 과거에 이미 한 번 죽었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어머니라 생각했던 할머니가 나를 살려냈었다. 드디어 깨달았다! 나의 머리에 있는 상처는 아버지 때문에 생긴 상처가 아니다. 그때 아버지는 나의 왼쪽 머리를 내려쳤었다. 하지만 나의 상처는 오른쪽에 있다. 이건 무엇일까? 누가 만든 것일까? 그래, 맞다! 이건 내 스스로가 만들었던 상처다. 너무나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자학을 했던 흔적이다. 그래! 나는 누나와의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했었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냈었다. 여기저기! 이곳저곳! 어머니는 그런 나의 기억을 잊도록 도와주셨다. 그게 어디였을까? 그래, 맞다! 교회다. 어머니는 나를 교회에 데려가 기억을 잊게 도와주셨다. 아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었다. 그곳은, 정신 병원이었다!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어머니가 그토록 돈을 벌려고 하셨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토록 나를 교회에 데려가려고 하셨던 이유를 깨달았다. 어머니는 누나에 대한 나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걱정되셨던 거다. 그래서 내게 제대로 말하지 못하셨던 거다. 모든 걸 교회로만 연결 지어 말씀하셨던 거다. 아아, 그때 내가 참석했던 예배는, 정신 병원에서 열렸던 종교 행사였구나. 어머니는 나를 위해 그토록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를 하셨던 거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나는 누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거짓된 평화가 영원히 계속될 거라 믿었었다. 그렇게 희망했었다. 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 수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강렬한 죄책감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수아의 기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었다. 내면에서 폭발하는 감정들이 잊혔던 누나에 대한 기억마저 도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발작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나를 정신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셨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었다. 기억을 잊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느꼈었다. 아무리 괴롭다 하더라도 진실을 덮고 사는 건 삶을 온전히 사는 게 아니라고 느꼈었다.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었다. 성장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거라고 느꼈었다.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길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괴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여정을 떠났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성장보다는 타락이 더 쉬운 법.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있던 방법을 떠올려 수아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괴로움을 해소했다. 기억을 날려버렸다. 아아, 그랬구나! 나의 미궁은 그렇게 시작된 거였구나! 드디어 깨달았다! 드디어 이해했다! 드디어 모든 비밀이 풀렸다! 모든 진실이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났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이 미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깨달았다!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나는 드디어 미궁 밖으로 빠져나왔노라!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미궁이 깨졌노라! 내가 떠났던 이곳에서, 나의 미궁이 끝이 났노라! 아아, 중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여정이 이십여 년만에 그 막을 내렸도다. 셀 수 없는 낮과 밤을 괴롭혀왔던 미궁이 마침내 끝이 났도다. 하지만 왜일까? 생각보다 마음이 홀가분하지가 않다. 신과 악마와 고독과 적막에게 축하를 받고 싶지가 않다. 왜일까? 왜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을까? 미궁은 끝이 나도 나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일까? 그 삶에 함께할 가족이 없어서일까? 내가 가족들에게 축복받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까? 답답하다. 서글프다. 괴롭다. 아아, 대체 이런 나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여! 그대들도 나를 저주하는가? 그래서 나의 애타는 절규에도 침묵하는가? 이장의 말대로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란 말인가? 누나처럼, 아버지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편안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라고, 믿고 싶다. 아아, 믿음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보아라! 여기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믿음은 있노라. 여기 악마를 믿지 않는 자에게도 믿음은 있노라. 여기 고독과 적막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믿음은 있노라. 그렇다! 나는 믿고 싶다. 인간의 존재는 태생이 아닌 흔적으로 정해진다고 믿고 싶다. 운명이 아닌 업적으로 정해진다고 믿고 싶다. 시작이 아닌 과정으로 정해진다고 믿고 싶다. 나의 믿음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우주만큼 크든, 겨자씨만큼 작든, 운명이 있든, 운명이 없든, 신이 존재하든, 신이 존재하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믿어야만 내가 행복하다.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내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비록 나의 탄생이 축복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살고 싶다. 진시황만이 영생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회 상류 계층들의 욕망만이 참된 욕망은 아니다. 나 역시 자신만의 생존을 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그러해왔듯, 앞으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욕망을 품고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 아득바득 살아가겠다.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 좋다. 이제 미궁 밖으로 발을 내딛어보자. 이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미궁일까? 그게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일까? 그건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


집 정리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정리는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서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리하다 지치면 쉬었고, 배가 고프면 밥을 지어 먹었다.

피곤하면 잤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 정리했다.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정리했다.

얼굴 없는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읏차, 어디 보자. 여기있는 이건 무엇일까? 오래된 노트로구나. 갑자기 누나의 일기장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감히 열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원한과 증오가 담겨있을까? 그 부정한 감정들을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만두자. 굳이 지금 이걸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이제 곧 고향집을 떠나게 된다면 이걸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궁금하다. 조금만이라도 열어볼까? 아아, 다행이구나. 일기장이 아니구나. 증오와 부정이 담긴 글자가 아니구나. 숫자다. 글자 대신 숫자가 쓰여있구나.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숫자가 쓰여있구나. 누가 적었을까? 왜 이렇게 숫자를 빼곡히 적어 놓았을까? 이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떤 수학적 패턴이 숨겨져 있는 걸까? 아, 그렇구나. 이건 가계부구나. 물건들을 구매하면서 적은 목록이구나. 다시 보니 내용이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있다. 시간대별로 구분 지어 세세하게 잘 정리되어있다. 이건 누구의 가계부일까? 누가 작성한 걸까? 이 글씨체는 누구의 것일까? 날짜를 계산해보니 누나는 아니다. 어머니의 글씨체도 아니다. 혹시 아버지가 적으신 걸까? 아버지는 언제 이런 가계부를 작성하셨던 걸까? 늘 술과 도박에만 빠져있었던 분이셨는데.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왜 가계부를 적기 시작하셨을까? 언제부터 가계부를 적기 시작하셨을까? 아버지가 맨 처음 구입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가계부의 맨 앞장을 펼쳐보자.


XXXX년 XX월 XX일 ― 태영이 포대기 1개 ― X,XXX 원

아아아,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 안에서 샘솟는 격렬한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슬프다! 괴롭다! 후회스럽다!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너희들은 알고 있었는가? 나는 틀렸도다! 내 생각은 모두 틀렸도다! 숫자에서도 충분히 감정을 느낄 수 있었노라. 숫자도 그 쓰임새에 따라,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충분히 사랑을 느낄 수 있었노라. 그걸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충분히 애정을 느낄 수 있었노라. 나의 편협한 생각이여, 나는 너를 규탄한다!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여, 나는 너를 후회한다! 나의 미성숙한 인격이여, 나는 너를 책망한다! 나는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라는 사람을 여러 각도에서 충분히 바라보았던 걸까? 다양한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짐승 같은 남성에게 한평생 억눌려왔을 아버지의 인생을 나는 알고 있었는가? 그 짐승의 괴롭힘을 자식에게만큼은 절대 물려주기 싫어했던 보호자의 심정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래서 자신의 딸이 겪은 비극 앞에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나는 공감하고 있었는가? 그럼에도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변함없는 사실에 괴로워했을 아버지를 나는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나뿐인 딸이 파멸해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나는 공감하고 있었는가? 죽어버린 딸의 시신 앞에서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저주했을 아버지를 나는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래서 아버지는,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던 걸까?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말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이전 17화미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