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4.

by 최신글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빈소는 조문객이 없어 황량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여기가 맞긴 한걸까? 내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조문객이 한 명도 없다니.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어느 예식이든, 결국 인간 정치의 연장이구나. 내가 좀 더 잘나고 능력이 좋았더라면 어머니의 장례식이 이처럼 황량했을까? 어머니에게 나는 끝까지 불효자로구나. 예전에는 그토록 저주했던 부모였건만, 이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이런건 나의 변덕일까? 어머니의 죽음 앞에 잠시 감상에 빠진 걸까? 그게 아니라면 드디어 철이 든 걸까? 됐다. 그만하자. 혼자서 사색에 빠질 시간은 앞으로도 많다. 지금은 현실에 충실하자.

저기 노년의 남성이 홀로 앉아있구나. 누구일까? 뒷모습이 눈에 익다. 아, 아버지다.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세월이 흐른 탓일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젊은 날의 장사는 근육이 쪼그라들어 왜소해졌구나. 굵고 검었던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지고 새하얗게 변했구나. 대들보 같았던 허리는 갈대처럼 휘었구나. 용사의 방패 같던 가슴은 새가슴처럼 오그라들었구나. 탄탄했던 피부는 고목 껍질처럼 메말라버렸구나. 아아, 세월의 흐름이여. 그대의 이름은 공평이로구나. 세월 앞에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도다. 수용하라, 인간들이여! 노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대들의 삶에 찾아오리라. 구도자여, 당신은 이 진리를 아는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사는가? 생존의 관성에 끌려다니는 건 아닌가? 인생의 진리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아아, 그만하자. 나도 모르게 또다시 철학의 세계로 빠져드는구나. 그만하고 아버지께 다가가자.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오랜 시간을 연락없이 지낸 탓인지 어색하다. 두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보자. 먼저 인사를 건네보자.

아버지…… 저 왔어요.

……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구나. 혹시 내 목소리가 작았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나를 못 본 체하는 걸까? 혹시 더는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자식을 자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부모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오랜 기간 동안 연락이 없었던 자식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왜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서운해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잘 왔다고 눈물을 흘리며 반길까? 아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먼저 몸부터 확인할 것 같다. 아버지는 어느 쪽일까?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말을 걸어보자. 이번에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말을 걸어보자.

아버지, 저 왔어요!

음? 어…… 왔네.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아, 나를 향한 아버지의 눈동자를 보았는가? 저게 과연 아들을 향한 눈동자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맞기는 한 걸까? 이십여 년 만에 만났건만, 아버지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원한도, 분노도, 서운함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혹시 나를 버린 자식이라 생각하는걸까? 그래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어떠한 감정적인 교류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버지의 눈은 마치 서로를 알지 못하는 타인을 바라보는 듯 하다. 아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바라보는 것 같다. 공장에서 쓰고 버리는 소모품을 바라보는 것 같다. 정녕 이 사람의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기는 한 걸까?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예전처럼 폭력을 행사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과거의 아버지는 떠올리기도 싫다. 노쇠한 육체는 정신마저 개조하는 걸까? 지금처럼 기운 없어 보이는 아버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그토록 어머니에게 모질게 굴더니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 걸까? 혹시 어머니의 죽음 앞에 충격을 받으신 걸까? 어머니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서 힘이 빠지신 걸까? 과연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있는 걸까? 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아버지가 변했다고 믿고 싶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통해 성장과 타락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던가? 나는 아버지가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지금의 아버지는 예전과 다르다고 믿고 싶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보자.

아버지, 힘드시지는 않으세요?

뭐!

힘드시지는 않으시냐고요. 잠은 제대로 주무셨어요?

뭐라―? 시끄러―!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길래 아버지는 이토록 노하실까?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자식이 주제넘게 나선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모르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그 괴팍한 성격은 변함이 없구나. 육체는 노쇠해도 본인의 성에 차지 않으면 고함부터 지르는 건 여전하구나. 참으로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피곤하다. 폭력을 행사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게 된다. 아버지를 마주하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오른다. 숨어있었던 오랜 기억들까지 폭발한다. 아아, 큰일이다! 분노가 분노를 잡아먹으면서 거대해지는구나. 보아라!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걸 태워버릴 염화가 탄생했노라. 아아, 저 뜨거운 혓바닥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감당하지 못할 열기가 전해진다. 마음아, 문을 닫아라! 그 문을 열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를 붙잡는 이성이 눈처럼 녹아 없어져 버린다. 너 분노여, 사그라들어라! 오늘은 우리 어머니의 장례식이다. 오늘은 슬픔 외에 이곳에 초대받은 자가 없노라. 만일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좋았을까?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지쳐있었다.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떠났다. 살기 위해 집을 떠났다. 자유를 찾아 떠났다.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찾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오늘 다시 돌아왔다. 나는 지금 자신의 과거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분노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는가? 모르겠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두렵다. 나 자신이 두렵다. 분노의 열기에 이성이 녹아 없어져버릴까 두렵다.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여버릴까 두렵다. 아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죽여버리면 어떠할까? 그렇게 하면 내 기분이 좋아질까? 나의 오랜 분노가 사그라들까? 너 분노여, 그게 네가 원하는 것이냐? 오, 놀랍구나! 분노가 나의 물음에 답을 한다.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리며 나에게 말을 건다. 분노여, 너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로구나. 고독과 적막은 친구가 아니로구나. 좋다. 마음아, 문을 열어라! 드디어 우리에게도 친구가 생겼노라. 축배를 들자! 이곳에 다같이 모여 함께 즐기자. 오랜 침묵을 깨뜨리자. 너의 미소는 마음을 녹이고, 너의 속삭임은 꿀처럼 달콤하구나. 아니다. 너 분노여, 나에게서 멀어져라! 나에게 다가오지 말아라! 타들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아라. 너의 열기가 나를 불태운다. 너에게 마음을 열수록 나는 검은 숯으로 변해간다. 불에 타 소멸한다. 아, 그렇구나. 너는 제물을 좋아하는구나. 제물을 불살라 파멸시키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런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 친구의 탈을 쓴 방화범이다. 살인마다. 파멸이다. 그런 네가 가는 길에 진리가 있을 리 없다. 예술이 있을 리 없다. 생명이 있을 리 없다. 창조가 있을 리 없다. 구원과 출구가 있을 리 없다. 오,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나는 당신들의 침묵을 사랑합니다. 부디 나를 도와주소서. 분노의 화염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불꽃과 파멸의 길에서부터 나를 구원해 주소서.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벌써 잊었다는 말이냐? 이 세상에서 나를 구원할 자는 나밖에 없다. 정신 차리자. 습관의 관성에 휩쓸리지 말자. 자신의 힘으로 분노를 몰아내자. 직감과 감정이 아닌, 믿음과 희망도 아닌, 오직 이성과 논리로만 판단하고 행동하자. 너 이성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너 논리여, 웅크린 몸을 일으켜 세워라! 너의 눈을 가린 감정의 손아귀를 뿌리쳐라. 직감의 오류와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라. 믿음이라는 거짓된 환상과 희망이라는 달콤한 사기로부터 깨어나라. 너희가 흔들릴수록, 견디기 힘들수록, 오감을 붙잡아라. 다섯 개의 서로 다른 과학이 상호보완하며 감각의 오류를 줄여주리라. 수학적 사고로 무장하라. 숫자가 너희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되어주리라. 신이여! 악마여! 고독과 적막이여! 환영하라, 여기 이성과 논리니라. 미궁 속을 항해하는 우리들의 조타수이니라. 오, 이성과 논리여! 너희의 이름은 아름다움이로구나.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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