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리서치 회사 인턴의 이야기
제가 6개월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곳은 우리나라 리서치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비 채용형 인턴으로 정치 선거 관련 프로젝트 팀에 소속되어 일했습니다. 리서치 업계가 일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상상 이상으로 일이 많았습니다. 일 하는 동안은 거의 밤낮 구분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야근이나 주말 근무가 잦아서 말이죠.
누울 자리 봐 가면서 발을 뻗어야 하는데 왜 일이 많고 힘든 곳에 제 발로 찾아갔냐고요? 일이 많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게 되면 인턴으로서 제가 해볼 수 있는 일도 많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턴십을 경험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별 소득 없이 시간만 때우다 왔다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저는 시간만 때우다 오는 인턴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턴십을 경험하기 위해 휴학도 하는 만큼 학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오는 유익한 인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또한 이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면 일이 고되어도 제가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불편한 자리임에도 누웠던 것입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회사 측에서 야근과 주말 근무에 대한 수당을 철저히 챙겨줄 것처럼 이야기했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인턴십을 하면서 야근 수당이나 주말 수당을 받아봤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 고용 노동청에 진정서를 넣어서 수당을 받아냈다는 친구는 있었지만요. 그런데 회사에서 나서서 연장 근로 수당을 주겠다고 하니까 이 회사는 보기 드문 일하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회사는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일을 시작했죠. 하지만 일하는 동안 야근, 주말 수당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턴도 야근을 피할 수 없다
리서치 회사의 경우 프로젝트 단위로 회사가 운영됩니다. 회사 내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외부 고객의 프로젝트를 대신 맡아서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감 기일을 엄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마감 기일이 굉장히 짧아서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마감 기일까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야 하죠. 저는 2017년 상반기, 조기 대선이 한창 일 때 정치 선거 관련 프로젝트 팀에 소속되어 일했습니다. 우연히 일했던 시기와 대선 일정이 겹치다보니 대선이 끝날 때까지 야근과 주말 근무 등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회사는 인턴만큼은 야근하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던데, 제가 일했던 곳은 인턴이 야근하는 것을 굉장히 당연하게 생각하는 곳이었습니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할 수 있는지 저의 의사는 단 한 번도 묻지 않고 그냥 야근해야 한다고 통보받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인턴으로 일하면서 개인적인 저녁 약속이나 주말 약속을 거의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인턴이 야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초과 근무 수당은 당연하다는 듯이 주지 않았습니다. 인턴들에게 꾸준히 ‘요즘 회사가 어렵다. 직원들도 월급을 동결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초과 근무에 대한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우회적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팀원 분들이나 팀장님이 사주는 점심, 저녁이 제가 야근의 대가로 받은 유일한 것이었죠. 그것도 야근 수당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제 야근 수당은 한 시간 당 2,500원 쯤 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죠.
인턴은 잡일 처리반
참 이상하게도 리서치 회사에서만 6개월 동안 일했는데 ‘저는 리서치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인턴으로서 했던 주요 업무들이 리서치의 핵심 업무와는 거리가 먼 잡다한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본, 보고서 및 회의록 작성이 저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야근을 한 것도 리서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마감일 전에 새벽 5시까지 야근을 했던 이유는 발표 자료를 제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최근에 이 회사의 정규직원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는데, 학사 졸업생은 아예 뽑지 않고 석사 학생들만 뽑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리서치와 관련한 일은 모두 석사 이상의 직원들에게만 시키고 학부생들은 인턴으로 채용하여 온갖 잡다한 일을 시키겠다는 겁니다. 제가 인턴으로 일할 때에도 리서치 관련 업무들은 석사 학위 이상을 소지하고 있는 분만 할 수 있었습니다. 저 같은 학부생들은 그 분들이 리서치를 하느라 할 수 없는 잡다한 일만 할 수 있었습니다. 뭔가를 배우고 싶어서 휴학을 하면서까지 인턴십을 했던 것인데 인턴 생활 내내 잡일만 돕느라 리서치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습니다.
업무에 관련해서는 인턴십을 통해 배운 것이 거의 없지만 업무외적으로는 배운 것이 있기는 합니다. 6개월 동안의 인턴 생활이 주었던 교훈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자면 ‘사회생활 별 거 없다는 것’입니다. 인턴십을 하기 전에는 사회생활이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정말 멋지고 쿨해 보였는데 인턴으로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사회생활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마니가 되기로 했다
일이 너무 고되어서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정말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인턴십이 굉장히 힘들게 얻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인턴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이 리서치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 분이 인턴 2명을 뽑기 위해서 오늘 하루 종일 면접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회사에 인턴으로 지원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죠. 인턴 채용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보니까, ‘이 자리가 내가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리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퇴사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그만 둔다면 다른 회사에서 인턴 자리를 알아봐야 하는데 이미 이전의 경험으로 인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보니까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싫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잘 참아왔는데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초과 근무 수당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커졌습니다. 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넣어서 지금까지 지급받지 못한 수당을 받아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제 주장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확실한 증거(출퇴근 시간이 찍힌 문서)도 있었던 터라 진정서를 넣었더라면 거의 100% 수당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수당 미지급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함께 일했던 동료 중 아무도 회사를 상대로 진정서를 넣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억울한 마음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우리의 출퇴근 기록부를 증거로 제출하여 회사를 상대로 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넣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원래 인턴은 슈퍼 을이라 이런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회사를 상대로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주위 동료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저도 어느 시점부터 ‘내가 유별나서 회사를 상대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츰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보겠다는 결심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사에서의 평판이 저의 커리어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계약 기간이 끝나서 회사를 나올 때만 해도 앞으로도 계속 정치, 선거와 관련된 리서치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 업계가 워낙 좁다보니까 이 회사에서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다른 리서치 회사에도 쉽게 취업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분들이 제게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 잠깐 참으면 나중에 다른 회사에 지원할 때에 이 분들이 추천서라도 한 장 써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턴들의 시간도 소중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직 저의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고 남 일같이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텐데, 인턴십을 준비하고 있는 분이라면 언젠가는 곧 마주하게 될 이야기일 것입니다. 왜냐면 인턴들이 과도한 야근, 주말 근무를 수행하는 것은 인턴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니 말이죠.
많은 회사들이 인턴 면접 자리에서 지원자들에게 “우리 회사는 무조건 새벽 2시까지 일해야 된다. 늦게까지 야근할 수 있냐” 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야근 못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인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취업을 위해서는 인턴십이 필수처럼 되어버리다 보니까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인턴들이 ‘할 수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답하고 나면 이후에 실제로 야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찍소리도 못하고 야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야근 공화국이라는 별칭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인턴만 야근을 금지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입니다. 대신에 인턴이 야근을 하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은 반드시 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근 수당이라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면 인턴으로서 야근하는 것이 지금처럼은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 : 기업에서 실제로 인턴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실무자 분, HR 담당자 분 등 기업의 관점에서, 혹은 본인의 관점에서 '인턴제도'에 대해 말씀을 나눠주실 분을 찾습니다. 갖고 계신 생각을 공유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턴제도에 대한 의견을 공유해주실 분은 subinne@naver.com 으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