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찾아간 편의점인데 자가비가 없다. 자가비를 와작와작 깨물어 먹고 싶은 날인데 할 수 없이 프레첼을 샀다. 자가비보다 죄책감이 훨씬 큰 과자인데 어쩔 수 없다. 달달한 위로를 바라며 맥심 화이트골드를 이미 한 잔 했지만 효과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맥주에, 프레첼을 씹으며 글을 쓴다.
'문어의 꿈'이라는 노래를 아는가. 안예은 님이 만든 노래다. 초등학생들이 진짜 좋아한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초등학생이 특히 반응하는 노래가 몇 곡 있다. 이무진 님의 '신호등', 그전엔 iKON 님들의 '사랑을 했다', 엔플라잉의 '옥탑방'도 그런 노래였다.
'문어의 꿈'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나는 초록색 문어
장미 꽃밭 숨어들면 나는 빨간색 문어
횡단보도 건너가면 나는 줄무늬 문어
밤하늘을 날아가면 나는
오색찬란한 문어가 되는 거 야아아아아아---"
오늘 나는 회색 문어가 된 기분이다.
'복사기를 찾아대는 나는 회애색 문어'.
우리 학교는 ㄷ자 모양 건물이다. ㄷ의 위쪽 획 끝에 우리 교실이 있다면 학년 연구실은 ㄷ의 아래쪽 획 끝에 위치한다. 그것도 다른 층으로. 그래서 복사기를 사용하려면 교실과 가까운 다른 연구실에 가야 하는데 거기도 한 층 올라가야 한다. 게다가 오늘 새 학기 준비로 복사기님도 너무 바쁘신지라, 나는 오늘의 복사를 미련 없이 내일로 미뤘다. 음, 필요한 학습지를 하나도 인쇄하지 못했다는 뜻. 덕분에 내 안색은 무채색인 회색을 닮아버렸다.
그리고 하얀색 문어도 됐다.
'파워 E 눈 맞추면 나는 하얀색 문어'
파워 E를 장착한 동료 교사, 나보다 선배다. 이번에 같이 새로 전입했는데 그분의 에너지에 우와, 놀라버렸다.
오늘 점심으로 김밥을 주문하여 연구실에 모여 먹는데 그분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분은 왜 김밥을 드시지 않고, 나만 보고 계속 말씀하시는 걸까. 아니지, 내가 잘못 앉은 건가. 그런데 이미 내가 유일하게 시킨 치즈 김밥이 하필 거기 놓여 있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식사를 마치고도 오랫동안 그분과 대화가 이어졌고 나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올해 맡은 '학교폭력'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200여 쪽에 달하는 PDF 파일을 정독하며 낯선 낱말들을 삼키다 보니 이 색 저 색 아무렇게나 섞인 똥색 문어도 되었다가, 이런 내가 실망스러워 고개를 푹 숙인 문어가 되기도 했다.
위의 '문어의 꿈'에 이어지는 가사는 이렇다.
"깊은 바닷속은 너무 외로워
춥고 어둡고 차갑고 때로는 무섭기도 해애애애애애---
그래서 나는 매일 꿈을 꿔 이곳은 참 우울해"
깊은 바닷속에 있는 기분. 파도가 없으니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사람도 없겠지. 이번 주 내내 징징대는 마음을 글로 남겨보니 아무리 경험과 경력이 쌓였더라도 새로운 근무지에 적응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5년 만에 또 느낀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안색으로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것도. 콘서트 갔을 때랑 확연히 달라서 혼자 큭큭 웃었다.
잠자며 꿈을 꾸든, 나만의 공상으로 꿈을 꾸든. 이 시기를 버티고 나면 적응하고 스며들어 내 본색이 얼굴에 드러나겠지. 일요일에 고대하던 콘서트가 있다. 다녀오면 나는 다시 오색찬란해질 수 있을까.
안예은 '문어의 꿈'
https://www.youtube.com/watch?v=8-mMGu-Spm8&list=RD8-mMGu-Spm8&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