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t, 실은 어리버리하지 않단 말이죠
김애란의 책 '비행운'에서 '큐티클'이라는 단편을 읽었다. 처음으로 네일 아트샵을 방문한 여주인공은 괜히 초짜인 모습을 들켰다가 이것저것 구매를 강요 당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원래 그녀는 쉽게 가게 주인에게 휘둘리다 결국 지갑을 여는 성격이란다. 갑자기 3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볼 일이 있어 강남역 지하 상가를 지나던 길이었다. 갑자기 어떤 여자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흐리멍텅한 인상 탓인지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잘 붙잡히곤 했다.
"몸에 비해 팔이 두꺼우신 걸 보니까 어깨에서 팔로 연결되는 부위에 노폐물이 쌓였네요. 이런 건 마사지로 계속 풀어줘야 팔이 얇아져요."
초면에 팔이 두껍다는 인사를 건네는 건 어느 나라 인사법이람.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에 팔이 두꺼워 스트레스를 받았던 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주춤해버렸다, 어리버리한 대답까지 추가로 반응해버리고.
"네?"
"제가 근처 유명한 마사지샵 소개해드릴게요. 고객님께는 특별히 오늘 이벤트로 1회 무료 시술해드릴 거에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강남역 대로변에 외관이 후진 것 같으면서도 높다란 빌딩의 고층에 마사지샵이 자리잡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마사지샵이라기 보다는 피부관리샵에 가까웠다. 잠시 소파에 앉아 대기하라고 하더니 원장실로 나를 이끌었다.
원장님과 아주 가깝게 마주앉은 그 공간은 매우 비좁았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즈음 되어보이는 원장은 내게 친절하면서도,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사람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피부와 몸매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내 직장, 나이, 평소 습관 등을 차근차근 물어보면서 내가 왜 이 곳에서 관리를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설명해주었다. 상담을 통해 회원권을 등록했다는 여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도 보여주었다. 옛날 약국이나 부동산에서나 쓸 법한 오래된 재질의 종이 위에 여러 이름들이 휘갈겨 써있었다. 일주일에 1번 오는 조건으로 10회 정도 회원권 가격은 60만원. 입사한 지 4개월밖에 안 됐을 때라 60만원이 절대 쓰지 못할 액수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남역 지하상가를 지나가다 갑자기 피부와 몸매에 투자하겠다며 지르기엔 좀 큰 금액이었다.
원장은 니가 결제를 하기 전까지 이 방에 나갈 수 있겠냐는 눈빛을 보냈다. 결국 결제를 해야 하나, 솔직히 좋은 기회일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한 뒤 필요하다 판단될 때 등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직장 여자 선배들에게 주워 들은 얘기로는, 이런 돈 들어가는 피부 관리는 결혼 전이나 받는 거랬는데 내 나이 스물 여섯에 꼭 이런 비싼 관리를 시작해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1시간 정도 설명을 들었나보다. 원장은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가, 친절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가, 결국엔 우물쭈물하면서도 절대 주장을 굽힐 것 같지 않은 내 모습에 백기를 들었다. 결국 그 오래된 명부에 내 이름을 추가하지 않고 난 그 마사지샵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처음 지하상가에서 그 여자를 따라왔을 때 무료로 1회 시술을 제공해주겠다는 제안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가운을 갈아입고 아래층 마사지샵으로 내려가서 2시간 정도 얼굴 팩과 마시지 시술을 받았다. 당시 거의 민낯으로 외출했기 때문에 시술을 받기 전후의 피부색 변화가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여자들이 관리를 받는 건가? 뭐, 이렇게 오랫동안 각종 팩을 얼굴에 붙이고 있으면 피부가 안 좋아지는 게 더 어렵겠단 생각도 들었다. 1회 무료로 체험해보기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눈 뜨고 코 베일 뻔한 경험이었지만 사실 손해본 건 없었다, 라고 스스로를 응원해본다.
이런 내가 김애란 소설 '큐티클' 여주인공의 마음을 읽고 꽤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스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야무지게 인생을 살아가려 하는데, 이 얼굴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막상 성격은 그리 유하지만은 않은데도 얼굴만 보면 설득하기 쉬워보이나보다. 사람들 많은 길거리를 지나다닐 땐 인상이라도 써야 하나? 생각이 많아지는 일요일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