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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님 사모님에서 실직자 아내로: 결국, 그날이 왔다

PART I 그렇게 남편은 실직자가 되었다

by 번역하는 엄마

저희 가정은 최근 남편의 실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해 보려고 해요. 매주 2회 수요일, 일요일에 네이버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라갑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상무님 사모님에서 실직자 아내로


PART I 그렇게 남편은 실직자가 되었다


제1화: 결국, 그날이 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알지? 길어야 2~3년이야."


상무로 승진한 뒤 남편은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대기업 임원의 평균 재직 기간 2년. 그마저도 못 채우고 짐을 싸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내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늘 이렇게 생각했다. '에이, 설마.' 승진 누락은커녕 특진을 거듭하며 최연소 임원 자리까지 꿰찬 남편이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했다. 그리고 당연히 들어주실 거라 생각했다.


'하나님, 우리 남편 대표이사까지 오르게 해주세요. 앞으로 딱 10년만 더 회사 생활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던 '그날'은 생각보다 더 빨리, 아니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부터 흐르는 그날의 기억. 여느 때처럼 애들하고 지지고 볶느라 분주한 초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일과 중엔 전화하는 일이 없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약속 있으니 차 놓고 나간다는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오빠."


"음, 나 내일부터 출근 안 해."


말할 때 뜸 같은 건 들이는 법 없는 사람이었기에, '음'이라는 첫 마디에 이미 내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바로 이어지는 그 0.1초의 시간에 이미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했던 것 같다. 내 눈은 금세 눈물로 가득 찼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남편인데, 오히려 남편이 날 위로하던 상황.


"울지 마. 너가 그러면 어떡해, 애들 옆에 있는데. 다 예상한 거잖아. 난 괜찮아. 얼른 정신 차리고, 애들 챙겨. 팀장들이랑 밥 먹고 갈게. 알았지?"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내 가슴을 더 후벼팠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25년 다닌 회사를 하루아침에 나오게 됐는데. 멀쩡하게 출근했다가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대기업 임원이 한순간에 실직자가 됐는데. 마음이 더 무너졌던 건, 챙길 짐이 아무것도 없다는 남편의 말이었다.


"여보, 정말 내일부터 안 나가? 짐 챙길 시간도 안 줘? 그럼 자기 짐은 다 어떻게 해?"


"짐? 하나도 없어."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설명됐다. 남편은 자신에게 닥칠 변화를 이미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애들 밥도 못 챙겨줄 만큼. 소식을 접한 엄마, 아빠는 전화통을 붙들고 몇 시간이고 마흔이 넘은 딸을 달래주셨다. 그 덕에 그 힘든 시간을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


너무 울어 머리가 아파질 무렵, 열한 시쯤 됐을까? 방에 있다가 남편 오는 소리에 서둘러 나가니 밤늦도록 안 자고 아빠를 기다리던 딸하고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위에 힘껏 포갰다. 평소 같았으면 가족끼리 왜 이러냐며 뿌리쳤을 남편이 그날만큼은 내 품에, 딸아이 품에 오래도록 안겨 있었다.


"여보,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 우리 남편 진짜 애썼어. 고마워, 너무 고마워. 절대 기죽지 마. 사랑해."


그렇게 셋이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토닥였다. 그러고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건지, 생각보다는 정말 괜찮은 건지 판단이 안 섰지만,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혼자서 이 순간을 얼마나 많이 상상하며 준비했을까 생각하니 내 가슴은 더 내려앉았지만.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끝이 났다. 남편의 25년 직장 생활과 함께. 연차도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했던 사람인데. 월화수목금금금인 날들이 많았던 사람인데. 그렇게 회사밖에 몰랐던 사람인데. 다음 날 눈을 떠 갈곳이 없다는 그 무력감을 어떻게 견딜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그래서 생각했다. 밥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속이라도 든든히 채워줘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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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우리 넷이 함께라는 것. 그거면 충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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