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 신입부터 임원까지 25년, 당신의 희로애락
저희 가정은 최근 남편의 실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매주 2회 블로그와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어느덧 결혼 16년 차. 서른다섯 남자와 스물아홉의 신혼부부는 어느새 사춘기 아이를 둔 중년이 되었다. 그사이 수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며 부부 사이는 때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한없이 좋다가도 이 남자랑은 도저히 못 살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했고, 그래서 진지하게 이혼을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파고를 넘나들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한 부부로 세워져가고 있다.
그 시간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때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두 아이의 영유아 시절이다. 바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남편은 아이들 기저귀도 한 번 갈아본 적이 없을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 가운데 육아와 살림은 모두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공부를 병행하던 대학원생 엄마. 당시 나는 돌쟁이 아이를 키우며 2년간 통번역대학원 생활을 병행해나갔다. 어렵사리 학업을 마치고 번역가로 나설 무렵, 이번엔 남편의 학업이 시작되었다.
주경야독. 그 말이 딱 맞았다. 안 그래도 얼굴 보기 힘든 남편은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며 더 바빠졌다. 업무를 마치면 곧장 학교로 갔고, 수업이 없는 날도 집에는 올 수 없었다. 밀린 일과 과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나까지 합세에 과제를 도울 때도 많았다. 챗GPT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시절이라 남편이 과제를 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자료 조사와 영문 텍스트 번역 등을 주로 대신해 줬다.
그 즈음, 큰아이는 너댓살, 둘째는 갓난쟁이였다. 커리어 측면에서 보자면 남편도 나도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였다. 특히 나는, 이제 막 번역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시장에 나온 그야말로 햇병아리 번역가였다. 일감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에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았다. 하지만 내 어깨에는 엄마 손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의 두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번역가로서도 엄마로서도 어느 하나 놓칠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기를 잘 넘긴 게 우리 부부에게는 커다란 버팀목이 돼 주었다. 뒤 같은 건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던 시절. 남들은 가족여행이다 해외여행이다 놀러 다닐 때 우린 주말이라도 가까운 공원에조차 갈 여력이 없었다. 당장 하루하루 눈앞에 산적한 일을 쳐내기 바빴다. 하루 5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4~5년을 일과 공부, 육아에만 파묻혀 지냈다. 부부와 아이가 모두 함께 커 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 대학원 2년 생활에 이어 남편도 2년간의 학업을 마치던 날, 그날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4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떤 불평도 없이 직장인과 학생으로서의 과업을 묵묵히 수행한 남편, 그 옆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최선을 다한 나, 그리고 무탈하게 잘 커준 아이들까지. 그날만큼은 마음껏 자축하고 싶었다. 더욱이 그곳은, 내가 그토록 소원했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언더우드 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