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I 회사가 맺어준 우리
저희 가정은 최근 남편의 실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매주 2회 블로그와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결혼식을 6개월 앞둔 여름. 스물아홉의 예비신부는 통번역대학원 입시생이 되었다. 말이 좋아 입시생이지 현실은 서른을 코앞에 둔 백수.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친구들은 벌써 대리를 달 나이였다. 주변 친구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해지곤 했다. 이렇다 할 경력도, 통대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통대는 감히 아무나 넘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입시 준비를 하느냐 마느냐로 한창 고민하던 즈음, 우연히 학부 졸업과 동시에 통대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이미 통대까지 졸업하고 현역에서 일을 할 때였다. 마침 잘 됐다 싶어 퇴사 후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해 보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나이에? 이미 공부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언제 입학해서 언제 졸업할래? 그냥 회사나 다녀."
머릿속에 지진이 나는 것 같았다. 친구 앞에 선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구의 눈빛과 말투. 모든 것이 가시가 되어 박혀버렸다. 돌이켜보면, 친구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내 좁은 마음은 퍽 날카롭게 반응했다. 치기 어린 마음에 괜한 독기가 올라왔다.
'그래? 내가 한 번 해볼게. 딱 10년 후에 보자. 서른에 시작한 내가 마흔엔 어디에 가 있는지.'
이후 나는 퇴사를 결심했고, 결혼만큼이나 속전속결로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출근할 때처럼 샌드위치 하나 사들고 학원에 도착해 수업 듣는 시간까지 포함해 하루 12시간 이상 영어에 파묻혀 살았다. 점심은 주로 토스트나 삼각김밥으로 해결했다.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었고, 또 많이 먹으면 졸려서 공부 시간을 날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배고픔만 면하자는 생각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 와중에 결혼을 하고 입시생 생활 2년 차에 돌입할 즈음, 첫 번째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 내 나이 딱 서른이었다. 입시생 신분에 임신이라니, 괜한 욕심이 아닐까 싶었지만 남편과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았기에 입시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임신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 끝에 찾아온 아이라 더욱 기쁘고 반가웠다. 그렇게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하루 12시간 공부를 지속해 나갔다.
집에 오면 긴장이 풀어져 나는 어떻게든 학원에 오래 남아있는 쪽을 택했다. 별도의 자습실도 없고, 그저 복도 끝에 놓인 나무 의자 몇 개가 전부였지만 그곳은 내 지정석과 마찬가지였다. 하루 2시간 수업을 듣을 때 외에는 온종일 그 작은 나무 의자에 머물렀다. 점심도, 쪽잠도 모두 그곳에서 해결했다. 그 흔한 태교도 못한 채 공부에 매달렸지만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 학원 화장실로 갔더니 피가 비쳤다. 너무 놀라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산부인과가 학원에서 멀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부모는 처음이라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이를 잃을까 봐, 혹시 내가 공부하느라 몸을 너무 혹사해서 아이가 힘들었던 건 아닐까, 온갖 자책이 밀려들었다.
검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두 손을 맞잡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우리 아기 살려달라고, 제발 아무 이상 없게 해달라고. 통대고 뭐고 다 포기할 테니 제발 아기만 살려달라고. 다행히 아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혈은 분명 좋은 신호는 아니기에 며칠 푹 쉬는 게 좋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그길로 집에 가서 일주일 내내 꼬박 누워만 있었다.
그 아찔한 상황에서도 내 꿈을 업신여기지 않고 끝까지 지지해 주었던 남편,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