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예비신부, 입시생이 되다

Part III 회사가 맺어준 우리

by 번역하는 엄마

저희 가정은 최근 남편의 실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매주 2회 블로그와 브런치에 연재 중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만난 지 6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까지 잡았지만, 남편과 내겐 한 가지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바로 내 진로 문제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 기업에서 야근은 아주 보편적인 문화였다. 그건 남편이 속한 대기업이나 내가 다니던 중소기업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경우, 대기업에 파견돼 일정 기간 내에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는 위치였기에 프로젝트 마감 일자가 가까워올수록 야근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밤 12시는 기본, 새벽 1~2시에 끝날 때도 많았다. 프로젝트 중에는 주말이나 명절 출근도 으레 당연하게 여기던 분위기였다. 대기업 과장이던 남편의 상황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가정생활을 제대로 꾸려갈 수 없다는 게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생각이었다. 직장을 옮기든 직업 자체를 바꾸든, 여러모로 남편보다는 내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른을 코앞에 둔 나는, 이제 겨우 경력 3년 차의 중소기업 사원에 불과했다. 별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물었다.


"하고 싶은 게 뭐야? 네 마음속에서 진짜 원하는 거."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하나. 바로 영어였다.


"오빠, 나 영어 쓰는 일 하고 싶어."


오래도록 꿈꾸며 준비했던 기자라는 꿈이 좌절된 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취업. 모든 게 힘들고 낯설었지만, 오히려 그 3년의 시간을 통해 내가 얼마나 말과 글로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어 관련 경력이 전무한 스물아홉 여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 즈음, 마음속에 떠오른 대안이 통번역대학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꿈같은 곳일 뿐이었다. 통대 입학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문동에서 대학을 다닌 내게도 통대 건물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영어를 좋아만 했지, 결코 통대를 넘볼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다.


더구나 현실적으로도 다시 공부를 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선, 입시 준비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최소 1~2년은 수입이 없을 테고, 결혼 후 임신 계획도 미뤄야 했다. 말이 좋아 통대 입시생이지 그냥 백수인 상태로 서른을 맞아해야 하는 심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한 번 피어오른 마음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은 10년 후 비전까지 그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예비신랑이던 남편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30대가 되기 전에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딱 2년만 시간을 줄 수 있겠느냐고. 남편의 대답은 예스! 그렇게 나의 입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IMG_0018.JPG 2년간 준비했던 통대 입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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