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선생님과의 어색한 만남.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변화들
서 선생님은 그러데이션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박스를 하나 그린 뒤 그 위에 5개 정도 구간을 나누어 단계별로 아래쪽부터 밝은 색상, 위로 갈수록 진해지도록 색을 쌓아가는 것이다. 처음에 너무 어려웠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설명을 조금 보태자면, 아래가 5 정도의 밝기라면, 바로 위에 있는 칸은 1~2 정도의 밝기보다 조금 진한 3~4 정도의 색이 나와야 하는 데 맞추기가 의외로 어렵다.
선생님은 그러데이션이 소묘 중에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어려운 것이라며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느새 내 손등은 연필자국들이 묻어있었고, 뭉쳐있는 선들을 보니 형편없어 보였지만 내심 뿌듯했다. 2시간여 시간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첫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일어서서 연필에 힘을 줬다 뺐다를 반복하며 쉴 틈 없이 손목을 움직였으니 말이다.
“그림 그리는 게 이렇게나 체력소모가 크구나…”
그림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시선이 조금씩 보이게 되었다.
다음 수업 때는 정육면체 그리기 수업을 듣게 되었다. 투시도와 공간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면 제대로 그리기 어려운 데 입체감각이 없는 나로서는 꽤나 고생했다. 더군다나 이전 시간에 배웠던 선 연습도 헤매는 탓에 정육면체의 형태는 젤리처럼 삐둘어져 있었고, 위아래 평행사변형은 서로 제각각이며 양 옆은 소실점을 향해 모이는 것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 선생님 지도하에 나름 열심히 그려보았다. 지우개로 지우며 다시 선을 긋고, 팔을 움직이며 가까이 보기도 하며 멀리서 보기도 하고, 궁금한 걸 질문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렇게 두 달 가까이 지난 후 여느 때처럼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는 데 웬 40대처럼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굉장히 호탕하며 선생님이나 스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화실에 유튜브를 하고 있었기에 PD분이시거나 원장선생님의 지인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난 이때까지 몰랐다. 이 남성을 만나고, 내 인생에 변화가 생길 줄은.
정육면체를 그리면서 슬슬 지겨워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렵기도 하고, 삐뚤어진 공간 안에 그러데이션을 넣으면서 검어지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정말 흥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나를 본 원장선생님이 상담이 좀 필요할 것 같다며 부르셨고, 화실의 탁자 앞에 앉았다.
앞으로 이 탁자를 “진실의 탁자”라고 부르겠다. 앉아 있는 정체 모를 남성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무섭게 뭘 저렇게 쳐다봐…”
갑자기 자리에 있던 원장선생님과 스텝 분들이 군인들의 제식처럼 자세를 꼿꼿하게 고정하고, 남성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마치 그가 말을 꺼내는 것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짧은 사회 경험을 한 나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나 다를까 화실을 총 기획하시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화실에서는 통칭 “검은 그림자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독수리 같은 날카로운 눈매와 호랑이가 사냥감을 물려고 기다리는 듯한 동공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 선생님: “그림 그리기 싫으시죠?”
나: “네? 아… 아뇨?”
검은 그림자 선생님: “에이~ 다 보이는 데 뭘. 본인이 그리기 싫다는 게 그림에서 보여요.”
사실 그의 말이 맞다. 두 달째 완성되지 않는 정육면체를 보며 내가 정말 빨려 들어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선생님의 이런 말 덕분에 힘이 풀리고, 긴장감이 줄어들었다.
검은 그림자 선생님: “그러면 그리지 마세요. 쓸데없이 불필요한 연습을 할 필요 없죠.”
나: “그래도 되나요?”
검은 그림자 선생님: “그리는 게 즐거워야죠. 그림이 뭐라고, 억지로 그려요. 제일 어려운 게 뭐예요?”
나: “아무래도 비례 맞추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원장선생님: “확실히 비례 맞추는 걸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검은 그림자 선생님: “야! 이 분 소묘시키지 마!”
원장선생님: “네 선생님!”
검은 그림자 선생님: “비례 연습을 시켜. 지금부터 알려 드릴게요. 당분간 정육면체 그리지 마시고.”
나: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