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우면 도망치자.

잘 그리려는 욕심이 앞설때

by 최우성

6개월 동안 검은 그림자 선생님께 보여드린 드로잉 북들을 전부 버렸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림을 활용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그림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모습이 너무 꼴보기 싫었다.


선생님의 조언으로는 “내가 그림을 왜 그리고 있는지를 인지해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는 내가 왜 그리는지에 대해 자신에게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우선 기초가 부족한 것 같아 소묘 수업을 듣게 되었고, 새로 오신 진 선생님과 수 선생님의 지도하에 연필깎이부터 다시 시작했다. 예전보다는 실력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눈앞에 있는 그림은 형태가 찌그러진 엉성한 2차원 덩어리뿐이었다.


그래도 인내를 갖고, 나름 고전하면서 사물 그리기까지 완성하였다. 그러나 뿌듯하다는 마음보다는 한편에 답답함이 목덜미까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그리고 있지만, 그리고 있지 않은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림이 싫어진 걸까?

그럴 만도 하지.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으니까…

실력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리는 것조차 모르니까.

모르니까 배워야지. 근데 어려우니까 쉽게 지쳐가는 것도 사실이야.

생각해 보면 어려운 게 그림뿐일까? 참고하는 거지.

근데 참을 필요가 있을까? 그림으로 뭘 하고 싶은 거지?

아니, 왜 그리는 거지?


스스로 자책하며 다음 수업 때는 사진을 보면서 마카드로잉을 하기로했다. 사실 그리기가 너무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고른 사진은 먹잇감을 기다리는 듯한 표범이었다.


잡생각이 구름이 되어 뇌를 이리저리 스친다. 흐려진 집중력을 잡으려 눈을 부릅뜨며 종이 위에 자로 그리드를 그린다. 그 위에 비례를 맞춰 형태를 갖춰 간다. 표범의 무늬를 칠해간다. 갈색 마카 펜을 잡고, 선을 따라 긋다 보면 어느새 옆에 있는 무늬에 번져간다. 다시 색깔을 맞추려고 조금 진한 노란색으로 그 틈을 메꾼다. 동시에 표범의 눈치를 본다. 자기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장에라도 나의 얼굴을 물어뜯으려는 게 분명했다. 다시 간격을 맞춰 칠하다 보면 번진 자리 위에 번짐이 고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동안 모여있던 스트레스 탓인가? 몸은 나른 거리고, 눈꺼풀을 무겁게 만든다. 스치던 구름은 어느새 먹구름이 되어 혼미하게 만든다. 무늬를 따라 움직이던 손은 궤도 밖으로 나가 있고, 초점마저 흐려지고, 이내 사진 위에 고개를 처박는다.


“…….”

원장 선생님: “야! 우성아, 일어나 봐!”

나: “….”

원장 선생님: “일어나 보라니까! 무슨 화실에서 잠을 자?!”

검은 선생님: “우리 화실에서 잠을 자는 학생이 있었나? 하하하”


일어나 보니 표범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물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이 상황이 어이없으셔서 한참을 웃고 계셨다. 수업이 끝난 뒤 검은 그림자 선생님과 짧은 대화가 있었다. 그리기 싫으면 그리지 말고, 부담 좀 갖지 말라고. 너무 힘을 준다는 말씀이었다.


근데 그게 어디 쉽겠냐고요~!


다음 수업 때 원장 선생님이 드로잉 특강 수업을 수강할 것을 제안하셨다. 커리큘럼은 이렇다. 손, 발, 얼굴과 같은 인체 드로잉부터 직접 모델분들의 자세를 보며 그릴 수 있는 누드 크로키와 풍경, 사물, 블라인드 드로잉, 등 약 3개월 동안 진행되는 화실 내에서 가장 체계적인 수업이라고 한다.


원장 선생님: "너 형태 잡는 거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이번 수업을 통해서 재미있게 그리면서 실력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한번 해봐~"

나: "형태가 어렵긴 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비례 잡는 게 힘들어서 그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원장 선생님: "그러면 인체드로잉 수업 때 좀 더 집중해서 해봐. 아마 실제 모델분들 보면서 그리다 보면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힐 거야. 수업 때 다양한 걸 그리게 될 테니까 그림에 대한 흥미가 다시 생길 수 있을 테니 포기하지말고."


원장 선생님의 조언대로 드로잉 수업을 듣기로 하고, 소묘수업과 병행하기로 했다. 드로잉 때 배운 것을 소묘에 적용해 보고, 반대로 소묘 수업에서 배운 것을 드로잉 수업 때에 적용해 보는 식으로 해보기로 했다.


드로잉 수업 때는 10명 정도 되는 학생들과 같이 배웠다. 이 시기에 다양한 기법들을 통해 실력이 한 단계 성장하였고, 무엇보다 사람들과 카페에 가서 함께 수업 시간 때 했던 기법들을 활용하여 서로의 그림을 보여주는 쏠쏠한 재미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때 얻은 자신감으로 인물화 소묘에 도전했다. 여전히 엉성하지만, 예전처럼 쉽게 포기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집이 세져서 더 파고들었다. 다시 한번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서 이번에는 남성 얼굴을 그려보기로 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힘을 주면서 그렸다.


지우개로 지우면서 형태를 고치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선을 쌓아갔다. 엉망으로 되어가는 눈앞의 대머리 남성은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어두워져 갔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일까? 나의 욕심 때문일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 간다. 이게 무슨 주식 차트도 아니고 한동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누가 보면 정신병 환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먹구름처럼 검어진 손바닥은 스케치북 위의 남성을 더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생각대로 그려지지 않는 답답한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림에 대해 진심이었다는 것을. 내가 그림을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자리로 돌아오니 검은 그림자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검은 그림자 선생님: "야 너 왜 이렇게 열심히 그려? 힘주고 그리지 말라니까."

나: "그냥 잘 그리고 싶어서요…"

검은 그림자 선생님: "왜 잘 그리고 싶은 건데? 아니, 넌 그림을 왜 그리냐?"

나: "그걸 잘 모르겠어요…"

검은 그림자 선생님: "왜 그리는지 모르니까 그려도 그린 게 아닌 게 되지. 그냥 그리기 싫으면 그리지 마. 그림이 뭐라고."


이 시기에 선생님의 말씀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작품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이후 몸에 힘을 뺀 후 그림을 마무리하였고, 인물화 그림들을 몇 점 완성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검어진 그림들이 언젠가는 형태를 갖춘 회화 작품처럼 되길 고대하며.



4화.jpg 검어진 대머리 아저씨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