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의 파편들
어렸을 적 할머니와의 추억은 나에게 몇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항상 밤늦게까지 놀아도 싫은 내색과 혼낸 적이 거의 없으셨다. 놀다 지쳐 거실 바닥에 잠이 들면 할머니의 목소리에 일어나기도 했다. 어느새 새하얀 햇빛이 집을 환하게 비쳤고, 할머니는 부엌에서부터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푸짐한 아침상을 가지고 오셨다. 그 어떤 음식보다도 달콤했다. 또한 같이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올 때 먹었던 간식과 없는 돈 긁어모아 사주신 야광 빛 내복도 더없이 소중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좋아했었던 내가 할머니 앞에서 참으로 말이 많았었다. 이를 듣고는 늘 웃으시고 기뻐하셨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는 지병으로 인해 나를 돌보실 수 없게 되자 초등학교부터는 부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명절이나 병문안 외에는 찾아가지 않았다. 이후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홀로 어두운 방에서 몸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려는 할머니를 외면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만을 나눈 게 전부였고, 무거운 짐을 들고 그 먼 곳부터 집까지 찾아왔을 때도 신선한 회 한 접시 주려 잠깐 나오라고 해도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이게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차마 할머니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맞은편에 앉아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내가 웃고 떠드는 사이 하루하루 편하게 누워 잠을 자는 사이 친구들과 어제 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할머니는 혼자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고통을 이겨내려 발버둥 쳤을 것이다. 아프더라도 내색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가운 방 안에 홀로 외로웠을 것이다.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방학 때만이라도 어렸을 때처럼 옆에서 뭐든 이야기해 주었다면 조금이라도 많은 고통의 시간 동안에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을 깨닫는 데에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색에 관한 특강을 듣게 되면서 살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첫 시간에는 감정에 따라 발색 표를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분홍은 사랑스러운, 빨강은 분노. 이런 식으로 말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알 수로와 헤드윅의 색채 심리 이론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단순히 표면에 드러나는 것 외에도 가족, 친구, 지인 등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을 색으로 정리했다. 즉 내면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은 코발트블루, 초록색, 주황색으로 그렸다. 오로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표현한 것이다. 발색 표를 보니 코발트블루는 30대의 색, 초록색은 기쁨과 슬픔, 주황색은 30대의 색과 보색관계였다. 그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할머니와의 추억은 너에게 전부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네 옆에서 지켜줬다."
할머니의 색은 늘 좋은 색이라고 말씀하신 흰색이다. 현재 30대인 색을 합쳐도 같은 색이 나오게 된다.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내 삶을 존중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할머니의 존재는 너무나도 크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