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함과 작품의 연결성
화실 학생들의 상담하는 대화 소리와 곳곳에 붓을 '탁탁' 터는 소리는 이 무더운 날씨를 내쫓는 마법 주문처럼 들린다. 나는 드로잉에 필요한 적당한 사진을 고르고 있다. 평소 동물 그리기를 좋아하기에 웅장함을 잘 드러낸 코끼리 사진을 골라 그려보기로 한다. 자주 애용하는 피그먼트 펜으로 그려나간 선들은 마치 실타래처럼 일정하지 않고 복잡해 보인다. 그리고 이를 우연히 본 검은 그림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오~ 네가 웬일이냐? 이런 것도 그릴 줄 알고~"
"엥 그런가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렸어요."
"야 저번에 그린 카멜레온 작품보다 훨씬 좋다. 한 200% 정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뭐가 아니야? 이게 훨씬 나은 데~ 약간 앵무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품성이 좋아."
선생님과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서일까? 마음이 조금 답답하면서 카멜레온을 그렸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작품성'이라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끼리 그림은 사진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렸다. 어떠한 의도도 이야기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카멜레온 작품은 실제로 겪은 경험을 몇 개월 동안 공들여 고민한 결과이기에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나와 타협이 되지 않으면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코끼리 그림은 낙서에 불과하고, 작품이 아니야!"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작품'이라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작품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해? 결국에 평가하는 관객이 만들어갈 수도 있잖아?"
"내가 정한 기준과 다른 사람이 정한 기준이 다르다고 작품이 아닌 게 될까? 다른 사람도 나와 의견이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질문들을 뱉고 나니 그제야 나는 내 기준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작품 주제로 고민할 때 검은 그림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지금 이전에 만들었던 카멜레온 작품의 접근법을 너무 강요하고 있어. 그건 잊어버려. 다르게 접근하라고."
그렇다. 나는 이전 작품이 사람들에게 반응이 좋아 그럴싸한 의도와 이야기만 있다면 어떠한 작품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해버린 거다. 나도 모르게 만들어낸 압박감으로 인한 함정에 빠져버렸다. 이제야 좁은 눈으로 보았던 시선들이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이다. 아직 작품성이 있다는 답은 찾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풀리기를 기대하며 서랍 안에 작은 코끼리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