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절제
미술도구로 잔뜩 널브러져 있는 책상에서 드로잉 특강의 과제를 하고 있다. 선생님은 주제에 맞게 그려오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이제는 많이 그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퇴근 후 피로함도 잊은 채 몇 시간째 30페이지가 넘는 드로잉북을 빠르게 소진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어느새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드로잉북들이 놓여있다. 나는 내심 뿌듯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림과는 멀어졌다. 사진과 눈앞의 쓰레기는 그 차이가 분명해 보였으니까. 단순히 기본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그리면 언젠가 실력이 늘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흰 종이 곳곳에 퍼져있는 연필 자국들은 검은 연기가 되었고, 마음속에 파고들어 기분이 나빴다. 나는 기대가 커질수록 욕망이 앞서서 그림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를 채우고 비워야 하는지 모르니 무조건 채우기만 한 것이다. 그림에 대한 의욕이 꺾이자, 한동안 멈추고 다시 연필을 잡았다. 놀랍게도 이전보다 선이 깔끔해지고 형태도 제법 갖춰진 그림들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바로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언제라도 꺼내어서 그릴 수 있도록 아이디어나 경험을 반드시 기록해 두고, 조급함 때문에 연필을 먼저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