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직접 치료하겠습니다.
신플이에요, 타미 주세요.
진료실 문이 열리고 보호자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을 떼기 무섭게 답이 돌아왔습니다. 신플이에요, 타미 주세요.
2009년 가을, H1N1 아형의 독감이 세계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신종 플루라고 명명되면서 하루 종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엄청나게 주목받았습니다. 예방 접종과 진료, 항바이러스제 처방에 진단서 발급까지, 모든 병원의 내과계 외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유행에 비해 치사율은 오히려 높지 않아 과잉 대처라는 논란을 불러올 정도였습니다.
처음 방문한 환자에게 진료의는 어떻게 오셨냐, 어디가 불편하시냐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이상하다는 증상에 기초해서 증세와 병력을 자세히 묻고, 진찰을 하고 난 후에 진단을 내리고 필요한 검사를 하거나 약을 처방하는 게 일상적인 진료이지요.
그날 환자도 동반하지 않고 내원한 보호자는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결하고, 약 처방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대규모 유행을 우려하여 아주 친절하게 증상과 필요한 검사며 처방받아야 하는 약을 되풀이하여 배포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어의 교육으로 진단과 치료를 확신한 보호자가 의사에게 얻을 것은 처방전뿐이었습니다. 신종 인플루엔자 A(H1N1), 타미플루(Tamiflu®, osteltamir, Roche)도 일상용어가 되니 그냥 신플과 타미가 된 것입니다. 어디서든 신종 플루 이야기뿐이니 일부러 찾지 않아도 하루 종일 관련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결과, 환자나 보호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진료실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제는 어떤 질병도 잠시만 찾아보면 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환자들은 몸에 이상을 느끼고 그냥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주위의 아는 사람 몇에게 물어 물어 그 분야의 권위자라는 의사를 찾아가던 시절이 아닙니다. 필요한 정보를 다 검색하고 병원과 의사를 비교하고 치료받은 다른 환자들의 후일담까지 읽고 나서 의사를 찾습니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illigence, AI)에게 진단과 예후까지 모두 물어보고, 담당하는 의사가 AI와 의견이 다르면 설명을 요구합니다. 피터 힌센은 디지털 세계의 드릴 다운(drill-down)이 의료업계 지식노동자의 권위를 잠식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102). 한 가지 주제를 뚫고 들어가듯이 찾아가면 광범위한 지식을 연마하느라 오랜 시간을 투자한 지식 노동자와 별다른 격차 없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병만큼 무섭게 파고들 주제가 있을까요.
내가 직접 치료하겠습니다.
동생 스티븐 헤이우드(Steven Heywood)가 근위축성 축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으로 진단받자, 공학자인 그의 형 제임스는 직접 치료법을 찾겠다고 나섰습니다. ALS는 이 질환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야구선수 루 게릭(Henry Louis Gehrig)의 이름을 따서 루 게릭 병으로 잘 알려진 질병입니다. 운동신경세포가 점차 사멸하여 점차적으로 전신의 골격근이 마비되고, 결과 수 년내에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한 해 십만 명에 한 명 꼴로 발병합니다. 유전적인 소인도 있으나 대부분 산발적으로 일어나며, 아직 발병 원인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법도 없지만, 우선 진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진단이 어려우니 상당히 병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명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하고, 진단 후 2년에서 5년 사이에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질환에 대한 연구는 더딜 수밖에 없고, 특히 대규모의 임상 시험을 거쳐야 하는 치료제의 개발은 더 느립니다. 의료진들은 이성적으로 이런 제약을 감수하지만, 느닷없이 영화에서나 보던 불치병을 진단받은 환자나 보호자는 입장이 다릅니다.
스티븐이 진단받은 1998년, 형인 제임스가 신경과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학자가 아니고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창안하는 아이디어와 장치를 검토하여 시장을 개척하는 기술 이전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직장에서 유전학, 세포생물학, 그리고 분자 생물학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생명과학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검색 엔진 퍼브메드(Pubmed)에서 동생의 병명을 검색해서 얻은 방대한 결과 중에 중요한 논문을 골라주는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이들을 십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치료 아이디어를 내어 기금을 모으고 과학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스티븐은 제임스의 주도로 척수강 내에 줄기세포를 주입하는 치료를 받았습니다(103). 2006년 스티븐은 결국 사망했지만, 제임스와 또 다른 형제 벤자민은 ALS 환자들이 치료와 대응 방법에 대한 세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제임스 형제는 한 친구와 함께 데이터를 모으고, 그것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제약회사와 의사들을 포함한 연구원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환자들 간의 네트워크 페이션츠라이크미(PatientsLikeMe.com)를 만들었습니다(104). 2004년 PatientsLikeMe 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의료인 들은 자신의 의료 기록을 공유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현재 85만 명이 넘는 환자들이 가입해 있고 포괄하는 질병이 2800가지를 넘습니다. 자신의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치료를 구하고자 하는 환자들의 열망이 충족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105). 기존의 의료로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말이지요.
PatientsLikeMe를 설립한 세 사람은 모두 MIT 출신입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유능한 인재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의료계에서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입니다. 의료계 주류에 의견을 반영시키는 방법은 연구 결과를 학회에 발표하고 의학 잡지(저널)에 투고하여 실리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널에 실린 논문이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고, 다른 사람의 논문에 인용이 많이 될수록 인정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으려면 피인용 지수인 영향력 계수 (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Nature, Cell, Science, Lancet이나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같은 저널에 실린 논문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런 폐쇄적인 경로에 반발하여 2013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 중 한 명인 랜디 셰크먼은 아래와 같이 2013년 12월 9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에 기고하며, 앞으로 최고급 저널에 논문을 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106).
'논문은 훌륭한 과학이기 때문에 많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에, 자극적이거나 틀렸기 때문에 자주 인용되기도 합니다. 최고급 저널의 편집인들도 이런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선 그들은 섹시한 주제를 탐구하거나 도전적인 주장을 내세워 파장을 일으킬 만한 논문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과학자들이 행하는 과학에 영향을 줍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는 데 꼭 필요한 연구비와 학교나 연구실 자리 확보는 논문 게재가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연구가 아니라 논문 게재가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목적으로 자리 잡으며 유행과 경쟁에 휘둘리는 연구 풍토에 불만과 자성의 지적이 늘어납니다.
제이미 형제들과 같은 아마추어 연구가들의 참여가 이에 대한 해법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논문게재가 아니라 연구 자체가 목적입니다. 주류 학계의 유행이나 연구비 배분의 동향에는 상관하지 않아도 되기에, 소외된 영역에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환자 수가 적은 질환일수록 연구도 어렵고 가시적인 성과도 미미하기 때문에, 질병 자체가 관심에서 배제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희귀 질환 (orphan disease)에서 환자나 보호자의 노력은 때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102. Hinssen P. 뉴 노멀: 흐름출판; 2014.
103. Weiner J. DNA 딜레마: 이끌리오; 2008.
104. Weinberger D. 지식의 미래: 리더스북; 2014.
105. Kelly K. 기술의 충격: 민음사; 2010.
106. Schekman R. How journals like Nature, Cell and Science are damaging science. The Guardian.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