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다음 의료-선택

27.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면, 존재하고 싶지 않다.

by 최윤재

생물학자로 일하다가 은퇴한 65세 야니 빌렘센은 자신이 더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심하게 불구가 되거나 영구히 똑바로 걸을 수 없을 때, 혼자서 외출할 수 없을 때, 먹고 마시고 샤워하고 옷 입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할 때, 시각과 청각 장애가 극심하거나 치매에 걸렸을 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위에 기록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는 의사조력자살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말기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의사 두 명을 설득할 수 있으면 가능합니다(180).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면, 존재하고 싶지 않다(If I’m not me, I don’t want to be). 88세 제롬 매달리의 신조입니다. 사전 의료지시서에 DNR을 명시할 뿐 아니라, 특별한 사항을 덧붙였습니다. 만일 알츠하이머 병이나 다른 종류의 치매가 발병한다면, 정상적인 영양과 수분 공급을 거부하겠다고. 은퇴한 변호사답게 10개의 조항을 조목조목 나열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논리 정연하게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면, 등등(181).


완화치료의학 교수로 일하는 지안 도메니코 보라시오(Gian Domenico Boracio)는 루게릭이나 치매를 포함한 어떠한 질병의 임종단계에도 큰 어려움 없이 담담히 대처할 수 있지만, 몇몇 예외 상황 중 하나가 본래의 전문 분야였던 악성 뇌종양이라고 했습니다. 악성 뇌종양은 뇌의 어느 부위에 자리 잡았느냐에 따라 병이 진행되면서 폭발적인 공격성과 같은 심각한 인격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폭발은 대개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에게로 향하기 때문에 환자의 가족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보라시오 교수는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무조건 상황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82).


모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미리 준비하는 치밀한 사람들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준비를 회피하거나, 자기만은 마지막까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누구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 기능을 잃어버리는 상황입니다. 몸의 부자유는 막상 닥쳤을 때 상상하던 것과 다르다고 하지요. 실제 치매 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인지기능을 잃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치매 환자의 간병인이 쓴 글은 많지만, 실제 환자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크리스틴 브라이든(Christine Bryden)의 글은 이런 드문 기록입니다. 알츠하이머 병으로 진단받고 자신의 병이 진행하는 과정을 책으로 썼습니다. 호주의 고위공무원이었던 브라이든은 46세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진단받고 병이 진행하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을 담담히 기록했습니다(한국에서 발간된 번역본의 감수를 담당한 신경과 교수는 조심스럽게 알츠하이머 병 진단에 의문을 표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한 퇴행성 뇌질환에 의한 치매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자신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는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녀는 절대로 안락사를 택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것이 이 결정에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폐렴이라도 앓게 되면 치료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183).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고 번역된 이 책의 원제목은 ‘죽을 때 나는 누가 될 것인가(Who will I be when I die?)’입니다.


100에서 7씩 빼보세요. 인지기능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 문제는 익숙하지요. 이 문제를 포함하여 임상에서 편리하게 적용할 수 있게 만든 치매 검사를 하세가와 치매 척도라고 합니다. 검사를 개발한 하세가와 가즈오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이 의사 분이 얼마 전 치매로 진단받고 생활하는 경험을 책으로 썼습니다. 치매를 연구하던 의사가 치매로 진단받고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자신이 연구하던 질환의 환자가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깨닫고, 이를 알리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충격이 아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치매에 걸린 건 어쩔 수 없다, 장수하면 누구나 걸리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치매에 걸려도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184).


브라이든과 하세가와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면,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매달리의 신조는 빛을 잃을까요. 늙고 병들고 장애가 생기고 인지 기능이 떨어지면 나는 내 삶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이, 같은 상황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이 될까요. 각각의 결정은 그대로 존중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브라이든은 46세의 싱글맘으로 10대의 세 딸이 있었습니다. 매달리는 88세, 부인과 딸도 노년입니다. 문화 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존을 당해’야 한다면, 이 또한 부조리가 아닐까요. 내 삶의 존엄을 위해 당신의 죽음을 용납할 수 없다는 오만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보르헤스는 두 개의 시간과 두 개의 공간이 공존하는 벤치에서 한 청년을 만납니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목소리를 상기해 냅니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당신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군요. 나 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고요”

반 세기의 시간이 그저 쓸모없이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책과 다양한 취미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너무 달랐다. 우리는 각기 서로의 캐리커처적인 복사였다. 이러한 순간이 오래 지속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 무엇인가 충고를 하거나, 토론을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은 바로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185).


픽션이지만, 위의 글처럼 반 세기가 지난 자신의 모습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면, 사전의료지시서를 미리 써 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더 까다로운 문제는 인격이 변한 환자에서 이전의 사전의료지시서가 계속 유효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 분만을 계획하던 임부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진통이 시작되면 마취제를 요구합니다. 상상으로 경험하는 것과 실제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빌렌셈이 미리 작성한 목록 중 한 가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이전의 생각과 달리 행복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이전의 지시서를 변경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뇌의 병변으로 인격이 변하거나 치매로 인지기능이 저하된 경우에, 다시 말해 이름과 주민번호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이에게 미리 작성한 지시서를 적용해야 할까요. 보라시오 교수가 불행히도 뇌 병변이 생겨 포악한 성격으로 변해, 이전 지시서를 찢어버리고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한다면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많은 노령 환자가 임종에 임박해서 치료 결정이 필요하지만 불행히도 결정을 내릴 능력을 이미 잃어버린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2000년에서 2006년까지 사망한 60세 이상의 환자를 4000명 가까이 검토했을 때, 42.5퍼센트가 치료 결정이 필요했지만 그중 70.3퍼센트는 이미 결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발병 이전에 유언을 미리 작성한 환자들은 과도한 치료를 제한하거나 완화 치료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186).


사람의 앞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계속 변화한다면 미리 세워놓은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삶을 최대한스스로 책임지겠다고 생각한다면 미리 자신의 마지막을 계획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족들의 부담을 생각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180. Ross W.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Newsweek. 2015.

181. Span P. Complexties of choosing end game for dementia. New York Times. 2015.

182. Borasio G.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동녘 사이언스; 2015.

183. Bryden C.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인터; 2005.

184. 하세가와 가즈오.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라이팅하우스; 2021.

185. Borges J. 셰익스피어의 기억: 민음사; 1997.

186. Silveira MJ, Kim SY, Langa KM. Advance directives and outcomes of surrogate decision making before death. N Engl J Med. 2010;362(13):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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