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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준 Feb 22. 2021

다 좋은데,

제 3호. 페이퍼마쉐

오랜만에 덕수궁을 다시 찾았다. 마지막으로 왔던 때를 떠올려보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엄마 손에 이끌려다니던 아주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마냥 넓게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커버린 내게 덕수궁 전체를 둘러보는데 걸렸던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을 왜 이제서야 찾게 되었을까.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 참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최고 기온은 영상 15도를 기록했다. 바람은 서늘하고, 햇살은 따스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봄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겉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런 따스한 햇살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는 욕심에 덕수궁 안밖으로 이곳 저곳 거닐기 시작한다. 멋진 팝송을 부르는 한 외국인의 버스킹을 잠시 구경하기도 하고, 유명 와플 집에 줄을 선 사람들의 행렬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한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씨였다.


2시간을 걸은 탓에 다리가 아파온다. 목도 마르다. 오후 시간이여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나른하다. 전날 찾아두었던 청계천 주변의 [ 페이퍼마쉐 ]를 찾아간다.



옐로우 컬러로 포인트를 준 페브릭 소파



저 멀리 보이는 외관에서부터 좋은 느낌을 받는다. 광화문 거리에 독채로 된 크고 넓은 카페가 있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한눈에 넓고 쾌적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테이블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구성이 꽤나 다양했음에도 정돈된 느낌을 준다. 특히, 노란색의 긴 소파 테이블에 눈이 제일 먼저 가더라. 역시나 사람이 보는 눈은 비슷한 모양인지, 소파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2층을 올라가본다. 아쉽게도 2층은 1층에 비해 배치가 아쉬웠다. 게다가 2층의 빈 자리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3층을 올라가본다. 아무리 날씨가 좋더라도, 아직은 테라스 석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조명을 활용한 모던하고 차분한 인테리어도 눈에 띈다. 레일로 이어진 조명들은 저마다의 테이블 위로 빛을 쏘아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빛이 강해서, 그냥 벽면에만 쏘는 정도로도 만족했을 것이다. 기둥을 타고 빛을 상향으로 쏘는 조명, 픽사를 닮은 대형 벽면등도 있었다. 솔직히 조금은 과하지 않았나?



매장은 2, 3층까지 있으니 둘러보세요!



다시 1층으로 내려온다. 소파 테이블 바로 옆에 있는 하나 남은 2인 테이블에 겨우 자리를 잡는다. 꽤 괜찮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음료를 주문한 지 10분이 안되어서 빈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코트를 의자에 걸어 놓고, 등에 맺힌 땀방울을 식힌다. 여름에는 땀이 나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겨울에는 땀이 나는 날씨가 되기를 바라고. 또 막상 땀이 나니 땀이 안났으면 좋겠고. 사람 마음이란게 참 갈대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마음도 갈대이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덕분에 오늘은 베이커리를 주문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또 디저트가 눈에 들어오니, 쉽게 거절할 순 없다. 나를 지켜보는 따가운 눈빛을 애써 외면한다. 사실 눈은 앞을 향했지만, 시선은 빵에 향해 있었다. 오늘은 미안해. 다음엔 꼭 먹어줄게. 결국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주문한다.



아메리카노에 핀 얼음꽃 4,800원



"지이잉" 진동벨 소리에 깜짝 놀란다. 사실 멍때렸다. 커피를 받으러 가면서, 집에서 나오는 길에 들었던 영어 표현이 떠오른다. "My heart was in my mouth." 깜짝 놀라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영어는 한국식 사고와는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늘 수 있지 않을까? 하루에 짧게라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팟캐스트의 <김영철&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를 추천한다. 진짜 재밌더라.


작고 귀여운 쟁반에 커피를 받아든다. 아쉽게도 여기는 일회용잔으로 주더라. 서울에 있는 카페, 얼스어스는 담아갈 용기를 가져와야 케이크를 포장해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제로웨이스트 #용기내챌린지 등이 유행하면서 젊은 세대의 주도 하에 친환경적인 마인드셋을 갖추고 있지만,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나도 이에 동참하기 위해 다소 소극적이지만 텀블러와 잔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꽤나 효율적인 선택이겠지만, 카페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톤 앤 매너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를 가장 우선으로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는 약간의 쓴 맛과 산미가 더해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비싼 축의 가격에 속하지만, 공간에서 주는 무형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일정 금액의 대관료를 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얼마 되지 않아 소파 테이블에 자리가 생겼다. 재빠르게 짐을 챙겨 자리를 선점한다. 조금은 딱딱했던 원목 의자와는 다르게, 소파는 역시나 푹신하고 좋더라.



우드, 아이보리 톤이 잘어우러진 인테리어



바로 옆 테이블에는 두 남녀가 말 없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테이블 2개를 붙여놓고는, 서로 마주보지 않도록 엇갈리게 앉았다. 이 사람들은 과연 커플일까, 친구일까, 남매일까? 괜시리 궁금해진다. 얼추 20분이 흘러, 남자가 먼저 운을 뗀다.


"너 어디까지 깼어?"

"나 여기까지. 너는?"


그제서야 두 사람은 말을 섞기 시작한다. 저녁은 어디서 먹을지, 오늘 찍었던 사진 중 어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릴 것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 이제 남매는 아니고. 테이블 위로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커플이었군. 그냥 앱 게임을 좋아하는 커플이었나보다.



오늘 하늘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서, 사람으로 붐볐던 매장은 꽤나 한적해졌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게임을 좋아하는 커플도, 오른쪽에 앉아 있던 케잌을 맛있게 드시던 중년 부부도 어느새 자리를 떠났다. 저 멀리 창가 쪽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두 여성이 보인다. 카페를 자주 다니는 내 경험 상, 저 자리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에게 인기가 많은 자리이다. #맞팔 #선팔 #selfie … 이제는 조금 식상하지 않나 싶지만 그럼에도 인스타그래머들에게는 여전히 잘 먹히고 있나보다 싶다. 뭐, 아닐 수도 있고.


저녁을 먹으러 나갈 준비를 한다. 좀 전에 알아두었던 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한다. 일요일 휴무. 이쪽 주변 음식점들은 웬만하면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나보다. 젠장. 어째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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