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호. 그레이랩
♬ What you need - The Weeknd
오전 10시.
기계 문제로 진행하지 못했던 캐닝 일정을 마무리짓기 위해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탓에 생각보다 추운 날씨를 예상했지만, 의외로 포근한 날씨에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평소 같았으면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버스의 오른편에 앉았을 테지만, 오늘은 나도 모르게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커튼을 살짝 젖힌 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오전 11시 20분.
생각보다 빨리 합정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회사까지 천천히 걸어도 10분 안에 도착하기 때문에, 회사 주변 어딘가에서 대충 시간을 때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근처 소품샵을 가볼까? 리코더 팩토리에 귀여운 제품들이 더 들어왔으려나. 피곤하니까 그냥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출근할 때마다 한번은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 그레이랩 ]으로 향한다.
옆에 난 창문으로 본 3월의 하늘
그레이랩은 항상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이도 오늘은 아주 널널했다. 하늘이 보이는 넓은 창가에 앉은 사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얼마 되지 않아 매장을 떠났다, 테라스에서 강아지와 놀아주는 사람 뿐이었다. 입구 쪽 큰 창 앞에 있는 자리에 앉을까?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같던데. 아싸감성을 가진 나는 도저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 테라스 앞 넓직한 소파가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혼자 앉기에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결국 하늘이 보이는 창가 옆, 간이 테이블과 소파만큼 푹신해보이는 의자가 있는 자리를 선택했다. 꽤 맘에 들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 주문을 서두른다.
"궁금하신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아메리카노 원두는 정해져있나요?"
"세 가지 중에 골라주시면 돼요. 가볍고 산미가 느껴지는 과일향을 찾으시면 Light Grey, 산미가 적고 묵직한 커피를 찾으시면 Dark Grey, 500원 추가하시면 디카페인으로 주문 가능합니다."
"Dark Grey로 주세요."
그나저나 원두의 명칭이 참 재밌고 센스있게 느껴진다. 가벼워서 Light고, 무거워서 Dark인건가? 역시 '센스있다'는 표현은 사소한 것을 지칭할 때 더욱 매력적이다.
DG 4,500원
오전 11시 40분.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로온 손님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멀리 트레이를 들고 오는 직원분을 애써 못본 척 한다. 사실 이때가 가장 어색하다. 일어나서 받아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아싸 그자체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커피잔 위로 따스한 햇살이 드리우니 참으로 조화로웠다. 이건 사진을 안 찍을 수가 없지. 라이브모드로 소리가 최대한 안나게끔 주의하며 사진을 찍는다. 크레마에 비친 영롱한 빛에서 마치 잘나가는 프리랜서가 작업을 하기 위해 카페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현실은 shiiiiiiiiiiiiiiiiiit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내가 Dark Grey 원두로 주문한 게 맞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묵직하고 산미가 거의 없는 맛을 기대했는데 마냥 그러지만은 않았다. 입안에 처음 들어올 때는 가볍게 느껴지다가 혀 끝에서 약간의 산미가 느껴졌고, 목으로 넘어간 뒤에도 그 맛이 꽤나 오래 맴돌았다. 물론 커피 자체가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네이밍을 하자면 Dark가 아니라 Medium이 맞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레이 덕후다.
꼭 혼자 카페를 오면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글을 쓰기 위한 소스를 찾기 위함도 있다. 매장 뒷편 테라스가 훤히 보이는 통창으로 내가 오기 전부터 앉아 있던 까만 푸들아마 이름은 콩이나 초코일 듯?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미친듯이 꼬리를 흔들며 히죽 웃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오늘 내가 입은 옷이 온통 까매서 동족이라고 혼동심지어 나는 개띠다한게 틀림 없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주인이 강아지를 번쩍 안고서는 내 쪽으로 뒤를 돌아보려 하자, 급하게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긴다.
슬그머니 쳐다보니 까만 푸들은 체념한 듯 가만히 안겨있었다. 귀여운 녀석.
그놈의 감성이 뭐라고. 하나 사고 싶잖아?
오전 11시 55분.
회사까지 30초 안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양심상 12시 전에는 들어가야했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다. 커피가 두세모금 정도 남아있었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완전히 식었을 때 느껴지는 그 찝찝함을 굳이 사서 마시고싶지는 않았다. 오고 싶었던 카페였기 때문에 서둘러 매장을 나서는 게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자 여기서 울 엄마의 명언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