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만 남은 밤 바다

by 최윤

길리에 도착하니 3시쯤이었다. 길리에서는 도미니크와 다른 숙소를 가게 되었다. 도미는 엄청난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항구에서 보트 맨 꼭대기에 실린 짐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도미는 우리 앞에 서있던 닉과 대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만, 그들을 자신과 같은 숙소로 예약하게 만들었다. 나 빼고 저 세명은 길리에 도착한 날에 숙소를 구했다. 하루하루를 삘에 맡겨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숙소가 없을까 봐 미리 걱정하고, 여행 시작부터 끝까지 3주 치 숙소를 한국에서 예약하고 온 나와는 달랐다.


우리는 우선 체크인하고, 만날 쯤에 위챗으로 다시 연락을 하기로 했다. 나는 애증의 캐리어를 끙끙 끌고 숙소로 향했다. 길리의 도로는 울퉁불퉁했다. 후. 나는 다음 여행은 어딜 가든지 무조건 기필코 꼭 반드시 필히 아빠 등산가방 하나만 매고 오리라! 도로가 우리나라처럼 반듯 매끈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캐리어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바닥에 축 늘어져서 버팅기는 대형견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차와 스쿠터로 꽉 차 있던 꾸따와는 달리, 길리의 도로에는 자전거와 마차뿐이었다.



바다를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다.


해변과 가까운 메인 도로만 타일이 깔려있고, 뒤쪽으로는 다~ 모래뿐이다.



길리에서 5일간 묵을 숙소는 모아나 게스트 하우스였다. 부킹 닷컴에서 호스트가 너무 좋다는 후기에 혹해서 예약했다. 도착하니, 호스트 요만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시원한 웰컴 드링크와 함께! 그는 숙소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Moana Guesthouse
Gili Trawangan, Gili Indah, Pemenang, North Lombok Regency, West Nusa Tenggara 83352, Indonesia
https://goo.gl/maps/pQLH3esdMpBbphGm6


"와이파이 번호는 'CUTE11'이야. 기억이 안 나면 거울을 봐봐. 그럼 생각날 거야."

"우하하, 내가 귀엽다고?"

"응응! 그리고 저녁에는 여기에서 내가 기타 치면서 노래도 하니까 시간 나면 와!"

"그래, 고마워!"


요만은 유쾌하고 친절했지만, 방 상태는 쾌적하지는 않았다. 뭐 어차피 잠만 잘 거니까.


나는 체크인을 마치고, 길리 섬을 살짝 구경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서, 옷 가게도 들어가 보고, 한 가게에서 예쁜 원피스를 발견했지만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과 충분히 무거운 캐리어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도미가 다이빙 센터 좀 알아보고 다시 연락 준다고 하더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미 시간은 6시. 점심도 배 타느라 제대로 못 먹고,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는데. 도미가 닉과 대니하고만 놀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흑. 그럼 뭐 혼자서 놀지 뭐. 쓸쓸하겠지만. 하면서 해변가를 계속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도미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았다며 주소를 내게 보내줬다. 날 잊지 않은 것이었다. 엄청 반가웠다.



왼쪽부터 도미, 닉, 대니


우리가 주문한 요리,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삔땅



도미, 닉, 대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저녁을 먹었다. 닉은 아르헨티나, 대니는 벨기에에서 왔는데 둘 다 말도 빠르고, 영어를 잘했다. 영화와 드라마에 관한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갔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는 게 어려웠다. 모든 토픽을 다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본 영상물 중에 안 본 것도 꽤 많았다. 영어로 대화를 해본 게 거의 4년 만이니, 열심히 듣기나 하면서 귀나 뚫어보자 싶었다.


"유니, 너도 라이온 킹 봤어?"

"유니, 티몬과 품바 노래 한국에서는 어떻게 불러?"

"유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뭐야?"

"유니, 내일 너 오픈워터 코스 시작하지? 너무 기대되겠다."

나를 향한 도미의 계속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벙어리가 된 나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도미는 나를 챙겨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앞에 빨간 보름달이 떠올랐다. 달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다 같이 쳐다보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여자가 닉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거 뭐야?"

"달이야." 닉이 대답했다.

"어머 진짜? 나는 화산인 줄 알았어."


흠. 누가 봐도 달인데? 시력이 안 좋은가 싶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또 닉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 이거 물 좀 따줄 수 있어?"


흠. 저거는 분명! 저 여자가 닉이 맘에 든 것일 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나와 도미는 눈이 마주쳤다. 도미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서로를 쳐다보면 웃었다. 한국이나 서양이나 비슷비슷하구먼.




10시쯤이 돼서야 길고 긴 저녁이 끝났다. 나는 친구들에게 내일 아침 9시부터 오픈워터 자격증 수업을 들어야 하므로, 일찍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관객이 갑자기 올라와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흥이 넘치는 길리 트라왕안.

Gili Sands Beach Club
Jl. Pantai Gili Trawangan, Gili Indah, Pemenang, Kabupaten Lombok Utara, Nusa Tenggara Bar. 83352, Indonesia
https://goo.gl/maps/cvXyB4qx5e3MbBj78



싱어의 목소리가 정말 감미롭고, 좋았다. 목소리를 향해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그런데 그곳에 도미와 닉이 서 있었다.


"도미! 나 다시 왔어."

"유니! 너 다시 왔구나!"

"응, 목소리가 나를 이쪽으로 끌어당겼네."

"너랑 같이 노래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한참 노래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온 상점의 불이 다 꺼졌다. 길리 섬 전체가 정전이 된 것이었다. "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나는 "엄마!"를 찾았다.


정전!


이 깜깜한 밤을 밝힐 빛은 양초, 핸드폰 스크린, 별, 그리고 달뿐이었다. 달이 가장 크고 밝았다. 대부분 사람의 눈길이 달로 모아졌다. 너무나도 환한 달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달이 원래 저렇게 밝았나 싶었다. 그리고 내 눈은 어둠에 금세 적응했고, 화려한 조명에 가려져 있던 달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달달 밝은 달



나의 인위적인 조명을 끄면 어떨까. 이렇게 동시에 다 꺼버릴 수 있을까. 그 순간 맞닥뜨릴 암흑이 두려운가. 나는 왜 조명을 밝히기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 다 꺼버린다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빛 한 줄기로 시선이 저절로 향할 텐데. 은은하지만 명료하고 강력한 그 빛만 따라가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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