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복에서 소년과 소녀의 손을 잡아요

끈적하고 따스했던

by 최윤


롬복에서 하룻밤을 보낼 숙소에 도착했다. 얼굴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랗고, 치아 교정을 한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그녀의 이름은 라레였다. 간단히 체크인을 마치고,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줬다.


로비를 지나자마자 정원이 보였고, 한가운데 큰 수영장이 있었다. 단층으로 된 작은 건물들이 정원을 둘러쌓고 있었다. 단정하게 잘 정돈되고 아담한 숙소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 방은 정원을 가로질러 로비 맡은 편에 있었다.


“캐리어 나 혼자 끌어도 되는데.”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보다 키가 작은 라레는 내 캐리어 손잡이를 덥석 잡더니, 방을 향해 앞서 나갔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웅! 정말 고마워.”


롬복 꾸따의 숙소는 화장실도 방도 인도네시아에서 묵었던 숙소 중에 가장 넓었다. 샤워 물줄기 또한 강력했다. 비록 찬물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고된 코모도 투어를 앞두고 우리는 이런 쾌적한 숙소를 마땅히 누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나가려는데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원래 키가 없나?”

“그런가 봐.” 도미가 말했다.


우리 둘 다 당연하게 없다고 생각했다. 고요한 숙소 분위기와 둥글둥글한 라레가 어떠한 걱정이나 불안 따윈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었나 보다. 우리는 문을 잠그지도 않고, 키가 원래 없는 거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하. 평화로워라.
닭과 개가 정원에 살고 있었다.


https://goo.gl/maps/vkqiZsQAwHKtFZD48



꾸따 비치 쪽에 있는 멕시칸 음식점에 갔다. 내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소녀가 스케치북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둘러싸고, 5살에서 7살 사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들이 테이블에 매달려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 너 그림 잘 그린다. 나도 좀 봐도 되니?”

“응! 봐도 돼!”


그녀는 22살의 드위였다. 드위는 비범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색감이며, 디자인하며. 할리우드 여자 스타들이 스케치북 속에 있었다.


“와. 너무 잘 그리는데? 패션 디자인 공부하는 거야?”

“응. 맞아. 앞으로 이렇게 쭉 열심히 그려서 나만의 디자인 책을 출판하고 싶어.”

“우와! 멋진데?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책 내고 싶어! 나는 글쓰기 좋아하거든.”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드위 테이블에 있던 꼬마들이 내 테이블로 넘어왔다. 꼬마들은 팔찌가 빽빽하게 묶여 있는 판자를 들고 있었다.


“어머! 이건 뭐야? 이거 너네가 만든 거야?”

“응! 이거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

“여기는 손재주 좋은 친구들이 많구나!”

“어서 골라봐. 너 너무 예뻐서 특별 가격으로 줄게.”


촉촉한 큰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내가 팔지를 고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거 얼마야?”

“1개에 100루피.”

“응? 너무 비싼데?”


내가 고른 팔찌는 하늘색과 흰색 실을 엮어서 만든 팔찌였다. 결국 20루피에 살 수 있었긴 했지만, 옆에 있던 꼬마들도 전부 다 계속 자신의 것을 사달라고 졸랐다. 나는 한 팀인 줄 알았는데, 개인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감했다. 귀엽다고 다 사주기는 어려웠다. 여기서만 착용하고, 한국에서는 안 할 것 같은 팔찌였다.


“너무 예뻐서 사고 싶지만, 난 하나면 충분해.”


꼬마들은 실망 가득 찬 표정으로 상점을 나갔다. 그런데 그 꼬마들만 팔찌를 파는 것이 아니었다. 롬복 꾸따에 사는 꼬마들은 다 팔찌를 파는 듯했다. 팔찌 판자를 들고 있는 꼬마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Sorry, I'm already wearing a bracelt. Thanks.”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면 꼬마들은 내 거는 안 사줬다며 또 사달라고 하고, 나는 또 거절을 하고, 입술이 뚝 나온 슬픈 표정을 계속 봐야만 했다. 거절을 계속하다 보니, 나도 슬프고 안타깝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쌓이고 그랬다.



드위와 꼬마들
롬복 향 풀풀 나는 팔찌, 도미와 나는 하나씩 샀다.




우리는 저녁을 다 먹고, 근처에 있는 바로 향했다. 맥주도 시키기 전에 팔찌 꼬마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맥주를 시키자마자 이번엔 축구 선수 2명이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바르셀로나의 메시였고, 다른 한 명은 밀란의 카카였다.


카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게 다가왔다. 팔찌를 대신에 “나 배고파, 나 케밥 사줘. 케밥.”이라고 말했다. 나는 단호하게 돈 없어서 미안하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여기 꼬마들은 자신들이 가진 눈망울의 힘을 잘 사용하는 듯했다. 카카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서 나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몇 살이야?”

“나 12살.”

"학교 갔다가 일하는 거야?"

"아니, 내가 돈 벌어서 다니려고."

“그렇구나. 팔찌는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아니, 나도 이거 어디서 사 온 거야.”

“그랬구나. 나는 유니라고 해. 한국에서 왔고. 한국 들어봤어?”

“응! 들어봤지. 여기서도 한국인 많이 만났어.”

“그래? 너 한국 가보고 싶어?”

“응!”

"그럼 나랑 같이 한국 갈래?”

“응! 나도 갈래!”

“내 남자 친구하고 만 같이 갈 건데?”

“응! 나 너 남자 친구 할래.”


그는 내 오른쪽 팔을 꼭 감싸 앉고,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 인생에서 띠동갑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연하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다니! (철컹철컹)


“그런데 너 다시 발리로 안 돌아올 거잖아.”

“응. 한국으로 가면 다시 돌아오긴 힘들 거야.”

“그럼 나 한국 못 갈 거 같은데? 여기 우리 부모님하고 친구들이 다 있어서.”


개구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카카가 귀여웠다.


“그러면 롬복에서만 내 남자 친구 해야겠다.”

“그래도 좋아.”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내가 케밥도, 팔찌도 사주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에게 가지 않고 내 옆에 꼭 붙어있었다. 하루 종일 수십 개의 상점을 돌아다니며, 햇빛과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그의 피부는 끈적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아래 부드러움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어떠한 것도 바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곁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메시와 팔찌를 팔러 다시 떠났다.


그 바에는 부모와 같이 휴가를 온 피부가 하얀 꼬마가 있었다. 나이는 로컬 꼬마들과 비슷해 보였다. 그는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부모가 주는 음식과 음료수를 받아먹고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왜 팔찌를 파는 어른들은 보이지 않을까. 내가 메시와 카카를 위해 20루피를 내고 팔찌를 더 사주면 애들이 학교를 다니고, 축구공을 차고, 부모와 오붓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꼬마들이 더 이상 상점을 휘젓고 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엔 부끄럽다고 안 찍는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귀엽게 포즈를 취했다.
가운데 꼬마가 카카. 내 롬복 남자 친구.



우리는 3차로 '정글 바'로 갔다. 롬복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롬복에서 가장 핫한 클럽이라고 했다. 도착해보니 여기가 '클럽'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인가 싶었다. 낡은 주택에 조악한 DJ 부스를 설치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드카와 사이다를 섞은 칵테일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흙이 깔린 마당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클럽의 형태보다 더 놀라웠던 게 있었다. 팔찌 꼬마들이 이곳에서 현란한 춤 솜씨를 뽐내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모든 꼬마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길거리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모습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꼬마들은 끼를 부리고,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 여행자들에게 '용돈'을 받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롬복은 대부분이 무슬림이어서 술에 취한 꼬마는 없었다.





클럽에서 내 남자 친구 카카와 재회할 수 있었다.


"너 아직 집에 안 갔어?"

"응. 아직 팔찌를 더 팔아야 해."

"부모님은 어디 계셔?"

"집에 있지."

"부모님이 너 안 기다려?"

"응. 괜찮아. 여기 애들 많잖아."

"그러네. 담배 피우는 애들도 많다. 너도 담배 피워?"

"아니. 난 절대 안 필 거야."

"정말이지? 나랑 약속하자."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으며 약속을 했다.


클럽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그곳에서 만든 여행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져서 도미와 같이 클럽 밖으로 나갔다. 클럽 안에도 화장실이 있었지만, 공포스러웠다. 길거리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다. 우리는 팔짱을 꼭 끼고 '들어갈 만한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클럽 밖으로 막 나가려는데 어떤 여자 내 손을 잡았다.


"너나 기억해? 홈스테이?"

"응? 응!"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지만, 그녀의 반짝거리는 교정기를 보고 번뜩 떠올릴 수 있었다.

"너 나랑 같이 호텔로 가자."

"왜? 무슨 일이야."

"나는 진짜 걱정했어. 숙소 문은 열려 있고, 이렇게 늦었는데 돌아오지도 않아서. 내가 문 잠가서 오피스에 키 맡겨 두었어. 나 걱정했잖아. 무슨 일 생겼는지, 너네가 혹시 길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너네 괜찮아?

"응응. 미안해. 우리는 원래 키가 없는 줄 알았어."

"후. 다행이다. 너네 이렇게 어두운데 다시 홈스테이로 돌아갈 수 있겠어? 여기 외국인에게는 위험한 동네야. 내가 너네 데려다줄 수 있어."

"고마워. 그런데 여기 내 남자인 친구도 같이 놀러 왔고, 우리는 두 명이라 괜찮아. 안전하게 숙소까지 다시 갈 수 있을 거야." 도미가 말했다.

"그래? 진짜지? 다행이다."

"우리가 너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내 손을 꽉 잡은 그녀의 손 힘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초해했을지. 그녀는 우리 얼굴 보게 되어서 기쁘다고, 잘 놀고 반드시 조심히 잘 들어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후에야 진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도미와 나는 다 놀고,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드위 그림 실력은 뛰어나고, 재능이 넘치더라. 그런데 그녀가 롬복에 있는 게 좀 아쉬워. 홀란드에 있었더라면,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책도 만들고,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일할 수 있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나 아까 충격받았잖아. 어린이가 어른처럼 춤추고, 담배 피우고. 그래서 아까 내 남자 친구한테는 절대 절대 피지 말라고 약속했잖아. 하하"

"응응. 맞아. 아이들이 밤늦게 까지 돈 벌러 돌아다니고. 처음에는 귀엽고 안타깝고 그랬는데, 쉴 틈 없이 다가와서 불편하기도 했어. 그런데 여기 왜 식당 주인들은 애들 못 들어오게 안 하지?"

"나도 불편했어. 음. 그건 서로 상황을 잘 아니까, 그렇게라도 도울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주인 입장에서도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겠지만, 아이들을 굶게 만들 수 없으니까. 이게 롬복 주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인 거 같아."


우리는 밤을 헤치고, 막막한 롬복의 모습을 고민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한 남자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네 드디어 왔구나. 나 아까 라레한테 전화받고 나서야 안심했잖니. 너네 잘 돌아와서 다행이다."


롬복 꾸따에서 끈적한 포근함을 느꼈다. 순수한 아이들을 보면서 웃을 수 있었지만, 한껏 웃을 수 없었고, 그들이 주는 따듯함이 내 기분을 온전히 산뜻하게 만들긴 어려웠다. 불쾌하진 않았다. 다만 찝찝함이 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딱 달라붙어 있다.




라레와 함께 찰칵! 그녀는 블랙핑크도 알고,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다. 고마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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