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섬 투어 1일 차
“안녕! 나는 삐아야.”
배에서 가장 오래 생활한 듯한 배가 뿔룩 나온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거실에는 승객과 선원이 모여 있었다. 쭉 둘러보니 승객 중 나만 유일한 한국인이자 동양인이었다. 스페니쉬, 더치, 잉글리시 등등 각종 꼬부라지는 말들이 들렸다.
"우리는 여기에 아침, 점심, 저녁을 준비해 줄 거야. 이거는 깨끗한 물이고, 여기 세 개의 보틀이 보이지? 맨 앞에는 차, 가운데는 따뜻한 물, 그리고 그 옆에도 따뜻한 물이야. 여기 커피도 있어. 언제든지 마셔도 돼. 이거 빵도 먹어. 저기 뒤에는 내 침대야.”
그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틀 옆에는 컵들이 쌓여 있었다. 컵 안은 시꺼먼 물때가 껴있었다. 저 컵을 사용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배안에서 몇 번째 다짐인지.
"너희에게 작은 물병을 하나씩 줄게. 우리가 전에 일회용 컵을 썼었는데. 쓰레기가 너무 많아지더라고. 하나씩 받아."
다행이다 싶었다. 물은 깨끗하게 마실 수 있겠구나.
“오늘의 일정을 알려줄게. 여기서 출발해서 3시간 후에 Rinca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는 코모도 드래건이 있어. 그리고 3시간 정도 배를 더 타고, Pink beach에 가서 스놀 쿨링과 수영을 하면서 2시간 정도 놀 거야. 우리가 스놀 쿨링 장비하고, 구명조끼를 준비해 줄게. 그 후에 1시간 반 정도 걸려서 Komodo national park로 갈 거야. 우리는 거기서 또 드래건을 볼 거야." 오늘의 일정이 적힌 작은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은?" 누군가 물었다.
"내일은 내일 알려줄게. 오늘 말해봤자 어차피 오늘에도 내일에도 다 까먹거든."
다 같이 웃었다.
"너네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오케이!" 모든 승객이 대답했다.
Rinca에 도착했다. 코모도 드래건을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장소였다. Rinca의 가이드가 우리를 드래건 있는 스폿으로 이끌었다. 가이드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너 어디서 왔어?"
"한국. 내 이름은 윤이야."
"너 한국에서 연예인이니?"
"아니. 나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나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인 처음 봐." 그는 느끼한 눈빛을 쏘아 대면서 말했다.
코모도 드래건은 악어와 비슷하게 생겼다. 현생 도마뱀 중 가장 커서 3m까지 자란다. 완전한 육식동물로 버펄로, 원숭이, 사슴, 물소 등을 먹는다. 한 번에 몸무게의 80%까지 먹을 수 있으며, 신진대사가 느려서 한 달에 한 번만 식사한다. 나는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어야 살 것 같던데. 효율적인 식사 패턴이 부러웠다. 보통 7월이 교배 기간이라서 내가 방문한 8월에는 모든 암컷들이 임신 중이었다. 수컷이 암컷보다 오래 살고, 개체수가 더 많다. 인도네시아 같은 뜨거운 날씨에 수컷들이 살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남은 개체수는 총 4000여 마리 정도 된다. 천적은 사람이 유일한데, 2019년에만 총 40여 마리의 드래건이 사라졌다.
"만져봐도 돼?"
장난으로 물었다. 약간의 진심도 있긴 했다. 필리핀인가 태국에서 뱀을 만져보고 목에 감아봤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노! 절대 안 돼!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도마뱀인 거 몰라?"
"응. 몰랐어."
"네가 만지면 너를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네게 달려들 거야. 도망가도 소용없어. 엄청 빠르고, 한번 포착한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거든. 그리고 얘한테 물리면, 온몸에 독이 퍼지면서 서서히 죽을 거야."
"어머. 걱정 마. 장난이야. 진짜로 만질 생각 없었어."
아직 여행 반도 안 했는데, 시체가 되어 한국에 가고 싶진 않았다.
드래건을 보고, 우리는 언덕을 살짝 올랐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내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느끼한 가이드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와, 너는 꽃밭에서 태어난 거 같아. 너는 어느 세계에서 왔니?"
살다 살다 이렇게 꿀이 흐르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갑자기 다른 가이드들도 다가왔다.
"나 너랑 사진 찍어도 되니?"
"나도!"
나는 그렇게 가이드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모델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선원들이 WANUA 승객들 모두 단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꼭 고등학교 수학여행 온 듯했다.
다음 일정은 핑크 비치. 생각보다 덜 핑크색이었다. 연하고 연한 벚꽃 핑크색이었다. 내가 사진으로 본 것들은 분명 보정빨이구나 싶었다.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더 붉은 핑크로 본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전 세계에 핑크 비치는 단 7 곳뿐인데, 그중 한 곳에 왔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
바하마의 하버 아일랜드, 필리핀의 산타 그루즈, 네덜란드의 보네르, 그리스의 발로스 베이, 이탈리아의 부델 리 섬, 버뮤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코모도까지 이렇게 총 7 곳에서만 핑크 샌드를 볼 수 있다. 분홍빛 해변은 붉은 산호초 알갱이와 부서진 조개껍질이 흰모래와 섞여서 만들어진다.
도미가 같이 스놀 쿨링 하러 바닷속에 들어가자고 했는데, 씻기 싫어서 안 들어가겠고 했다. 해변에 누워있는데, 또 다른 네덜란드 도미니크가 바닷속이 예쁘다며 빨리 들어가 보라고 재촉했다. 네가 들어가면 내가 같이 들어가 주겠다고 했다. 그의 감탄에 나도 궁금해져 스놀 쿨링 장비가 담긴 박스를 뒤적거렸다. 장비 대부분이 부러지고, 끊어져 있어서 말짱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수많은 사람들의 침이 묻었겠지만, 바닷속이 궁금했기에 마우스 피스를 물 수밖에 없었다.
산호초도 많고, 귀여운 물고기들이 많았다. 바닷속은 생각한 것만큼 맑지는 안았다. 그래도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적당히 보고 나와서 해변에 드러누웠다. 젖은 몸이 다 마르자 선원들이 배로 이동하자고 했다.
배에 도착하니 코가 벌렁거렸다. 테이블 위에 연두색 쟁반이 놓여 있었다. 밥시간이다! 뭐지. 저 좁은 주방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이렇게 때깔 좋은 음식을 만들 수가 있는 거지. 음. 위생적으로 보이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불로 다 익혔으니까 세균들이 다 죽었을 거야. 음식을 펐다. 맛을 봤다. 야채볶음이 아삭아삭하고, 기름도 적당히 들어간 게 고소하고 맛있었다. 조금만 먹을 수 없었다. 수영이다 뭐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하루였다. 한 그릇 더 채워 먹었다. 수박도 어찌나 달고 신선한지. 몇 조각을 먹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점심 먹고 나면, 코모도 국립공원에 도착할 거야! 맛있게 먹어."
“응! 고마워. 삐아 나 궁금한 게 있어. 코모도 섬을 내년부터 닫을 거라고 들었는데. 여기 사는 주민들은 어떻게 생활해? 다들 관광업에 종사하는 거 아냐?”
“우리도 잘 모르겠어. 여기 문 닫으면 주민들 전부 다른 섬으로 이주해야 해. 아마도 안 닫지 않을까? 코모도 문 닫으면 우리도 할 일이 없어져.”
"그렇지. 난감하겠다."
그다음 도착한 곳은 코모도 국립공원이었다. 여기서도 또 다른 로컬 가이드가 투어를 이끌어줬다. 코모도 드래건은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리고 여기가 오늘 마지막으로 밟는 땅이기에 머릿속엔 화장실 생각밖에 없었다. 공원 한 바퀴를 돌며, 화장실만 나오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내 앞에 걷던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내 뒤로 착지했다. 풀사이로 머리를 내민 뱀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점프녀의 남자 친구가 괜찮냐며 달래주는데, 가이드는 잠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키우고 싶어도 키울 수 없는 청록색 파이썬이라는 뱀라며, 아주 귀한 거라 꼭 담아야 한다고 했다.
뱀은 코모도의 맑고 푸른 바다를 몸에 품고 있었다. 돌덩이 같은 코모도 드래건보다 맘에 드는 파충류였다. 색감이라도 고급지게 예쁘니까. 하하
나는 배로 돌아가는 길에 사진을 열심히 찍던 가이드에게 물었다. 코모도 닫는 거 확실하냐고.
"글쎄. 우리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정부가 코모도 드래건 개체수와 환경 보호를 위해서 닫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호텔을 짓겠다는 소문도 들었어."
아직 결정된 게 없나 보다.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했다. 자연환경과 거주민. 무엇을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지속 가능한 관광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극단적으로 코모도 출입을 금지하는 것 말고, 모두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마지막으로 배를 비우고, 다시 배에 탔다. 배에 타자마자 화장실이 또 가고 싶었다. 배 화장실에 안 가겠다는 다짐은 내 몸의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보다는 약했다. 그리고 씻고 싶었다. 매일 샤워를 하는 습관도 내 갑작스러운 다짐보다 강했다. 막상 씻어보니 씻을 만했다. 물은 정말 신선한 담수였다. 짠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씻고 나니 상쾌했다. 후후.
저녁이 되니 쌀쌀해졌다. 따듯한 차가 마시고 싶었다. 물병을 가지러 이층으로 다시 올라가긴 귀찮았다. 시꺼먼 물때가 껴있는 컵 중에서 조금이나마 덜 시꺼먼 노란 컵을 골라서 차를 따라 마셨다. 내 위는 튼튼하니까.
이층 갑판 앞쪽으로 다들 모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아름다운 하늘, 섬, 바다를 눈과 마음에 담고 싶었다. 먹거리, 잠자리, 화장실에 대한 번민이 파도와 바람을 타고 다 휩쓸려 사라졌다. 물론, 꿀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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