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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 Oct 14. 2019

행복의 정복이 아닌 행복의 회복

'행복의 정복'을 읽고, 마음이 풍요로운 백수의 이야기


 나는 직업이 없다. 올해 6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어떠한 경제활동을 안 하고 있다.


 이 시기를 포함해서 총 2번의 백수 경험이 있다. 약 5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졸업하고 오랫동안 취업 못하면, 낡은 취업 준비생이 되고, 회사에서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 들을 수업도 없는데, 졸업식만 계속 미뤄야만 했다. 어디라도 소속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학교에 1학기에 10만 원씩 내면서 학생 신분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졸업 유예. 서류상에는 학생이지만, 까놓고 말하면 학생인 척하는 백수였다.


 ‘학생 같은 백수’ 시절, 우울하고 외로웠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는 (전)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가 취업 준비를 도와주고, 마음도 가득 채워주었다. 부모님도 응원해줬다. 너 하고 싶은 일 하라고. 그런데 막막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과 사회에서 설정해준 목표, 대학교 입학을 향해 20년 가까이 살았다. 대학 들어와서 갑자기 너 하고 싶은 거라고 한다. 스스로 목표 설정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회사에 지원하고 떨어지고 셀 수 없이 반복했다. 함께 취업 준비하는 동기들에게 ‘너희 어디 회사, 어떤 직무에서 일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특정 직무와 회사를 말하는 동기도 있었지만, ‘그냥 나 뽑아 주는데’라고 대답하는 동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나 뽑아주는 데 있으면 들어가지 싶었다. 내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명확하게 그리지 못한 채 말이다. 다들 그렇게 준비하고 취업하니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어느 회사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취업 말고 뭐를 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그만둘 수 없었다. 자기소개서 항목 중, 지원 동기가 제일 어려웠다. 이 회사의 사업 분야나 직무에 대해서 대략 알지만,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회사 안에서 경험해봐서 좋다고 느낀 것도 아닌데, 좋을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상상하며 작성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뻥’을 까야만 했다.


 뻥을 친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떨어지면, 뻥을 들킨 것 같고. 나를 속이고, 남을 기만하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봐도 진실하지 않는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들통나면 내가 상처 받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창피했다. 남들도 뻥치고 회사 잘만 들어가는데, 왜 나만 걸리는 건지. 내가 뭐가 모자라지? 나름 중국 교환학생, 미국 어학연수, 토익 930, 오픽 IH, HSK 6급도 있는데. 남들만큼 스펙 쌓았는데 왜 안 붙지? 약 1년간 잇따른 좌절 때문에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갔다.




출처:Pixabay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진짜 백수’인데,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뜻한다. 딱 이 상태이다. 내가 왜 행복한 것 일까.


 러셀은 '행복의 정복'을 불행에서 벗어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책에서 나온 주요 단어에 '나'를 넣어서 현재 상태를 확인 봤다.




출처: yes24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불행 요소를 보자. 먼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 이 책에서는 나에 대해 집착하고, 부정적인 요소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죄의식, 자기도취, 과대망상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나는 여기서 자기도취에 좀 속해있는 것 같다. 인스타에 예쁜 척하고 사진 찍어 올리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이 정도는 정상 수준으로 봐도 되겠다. 지나치게 나를 꾸며서 허영심 수준은 아니고, 기분 좋은 모습을 드러내고,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거니까.


 경쟁. 취업 준비와 사회생활할 때, 누군가를 제쳐야만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 경쟁 구조 안에 들어있지 않다. 매일 하는 요가도 스포츠가 아니고 내 몸과 마음 편하게 하자고 하는 수련이라서.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권태. 전에는 회사-집-헬스장 이런 단조로운 삶이 권태롭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단조로운 삶에 정착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자극은 운동 후 오는 근육통으로 충분하다. 주말에 한번 친구들과 술을 마시긴 한다. 그래도 평일에는 아침에 눈 떠서, 명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요가하고, 밥 먹고, 자고. 부모님 보러 병원 가고. 규칙적인 스케줄이 내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데 이롭다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는 내가 단조로운 삶이 편하다고 느껴서 그런가. 조용하고 별일 없는 이 삶이 좋다.


 걱정. 하나 있긴 한데. 내가 좀 뻣뻣해서, 요가 동작 중에 못하는 게 꽤 된다. 이런 내가 요가 자격증 공부 중이다. 시작 전에는 자격증 따는 거 망설였는데 요가가 좋아서 도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뭐든 인풋 대비 아웃풋. 하루하루 크게 변해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안심이 된다. 처음에 저런 동작 어떻게 해? 하던 거를 이제는 하게 되었으니.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무의식 속에 '불가능'이 자라 잡지 못하게 '의식적인 생각에 충분한 힘과 집중력'을 기울이고 있다.


 질투.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하거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나도 할 때 있다. 인스타 보다 보면 예쁜데 동작도 잘 나오고 유연한 사람들 보면. 그럴 때 잽싸게 맘을 고쳐먹는다. 타고난 것도 재능이요. 저 사람도 오랜 수련을 통해 얻은 것이요. 질투하면 열등감만 생기고, 나를 갉아먹는 부정적 감정이요. 하며 내 안에 머물지 못하게 흘려보낸다. 그리고 나의 멋진 모습을 보자! 이렇게 다짐한다.


 죄의식. 이 책에서는 사회나 어른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말한다. 이건 가지고 있었다가 요즘 줄어들었다. 부모님이 바라는 큰딸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하지 못하는 것과 부모님은 제한된 행동을 하는데 나는 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자아가 분열될 뻔했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싶었다. 하라는 건 다 하기 싫었고. 나를 꾸역꾸역 억누르며 해야 했다. 그런데 요즘 부모님은 나의 삶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격려해 주신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만큼 부모님이 원하고 부모님이 필요한 것을 위해서 해주고 싶다. 저절로 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 부담감을 가지고 노니까 스스로 시간과 방법을 제한하고, 더 떳떳하게 놀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나를 미워해. 아니요! 모두가 나를 좋아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뭐 내 맘 편하면 됐다. 나도 당신들이 좋다.


 세상과 맞지 않는 젊은이. 이는 대중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나는 트레바리를 하면서 나와 비슷한 취미, 신념, 세계관, 관심을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토론을 하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자신과 다르다고 별종 취급하는 동네가 아니다. 또한, 요가원에서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수련한다. 내게 맞는 세상으로 찾아 들어갔고, 나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


 보아하니, 불행 요소가 적다.




출처: pixabay




 다음으로 행복을 채워주는 요소를 살펴보자. 우선, 열정. 내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상태이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일어나 행동하게 된다. 지금 내가 열정을 제일 많이 쏟아붓고 있는 것은 바로 요가이다. 요가 강사가 되고 싶어서 요가 자격증 공부를 하는데 행복하다. 그다음은 글쓰기, 달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랑. 남자 친구는 없지만, 부모님과 친구들과 주고받고 있어서 아직은 충분하다.


 일. 지금 백수이지만, (트레바리 멤버 경험담을 듣고) 당근 마켓에서 중고물품 팔고 용돈 좀 벌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일하지 않을까? 앞으로 계속 일할 거 같은데, 어차피 쉬는 거 맘 편하게 쉬고 있다. 일을 안 하는 지금 상태와 직업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가빴던 호흡을 가다듬고, 길고 깊게 호흡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본다. 여유로운 이 생활이 만족스럽다.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는 이 과정 자체가 기쁘다.


 폭넓은 관심. 작가의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연애할 때는 남자 친구한테만 관심을 두다가 솔로가 된 후에 나에게 관심을 두었다. 관심사가 상당히 넓고 더 깊어졌다. 내가 알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찾아 나섰다. 하면 할수록 기분 좋아지는 것들만 했다. 요가, 러닝, 명상, 식물, 등등. 또한, 자기 개발서는 쳐다도 안 보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과 정신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닥쳐온 변화로 붕 떠버린 마음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날리면서, 이곳저곳에 뿌려지나 보다. 하나둘 싹이 트면서 나를 더 멋있고 아름답게 가꾸게 되었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내가 빛이 나는 순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행복하다. 러셀이 제시한 조건대로라면 나는 '정복자'다. 저 조건 안에 들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행복을 쟁취했다. 그런데 행복의 ‘정복’이라는 단어에 물음표가 붙는다.




출처: stock photo




‘정복’을 검색해봤다.


1. 남의 나라나 이민족 따위를 정벌하여 복종시킴

2. 높은 산 따위의 매우 가기 힘든 곳을 어려움을 이겨 내고 감

3. 다루기 어렵거나 힘든 대상 따위를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됨


 나는 두 가지 의미로 책 제목을 해석해 보았다. 먼저, 행복은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르기 빡센 나무이다. 행복에 오르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야만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행복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불행 자체가 어렵고 버거운 것이고, 이를 이겨내고 행복으로 간다. 그런데 이 의미를 적용하면 ‘불행의 정복’이 더 어울릴 듯하다.


 따라서 첫 번째 의미가 적합하게 보인다. 그런데 과연 행복을 힘들게 싸워서 얻어야만 하는 것일까. 정복하는 그 과정 자체가 고통인데, 행복과 어울리는 단어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은 남의 것이 아니다. 원래 내 것이라서 약탈할 필요가 없다.


 제목을 바꾸고 싶다. ‘행복의 회복’이라고 말이다. 나는 행복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상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태초의 풍요로운 행복을 유지하긴 쉽지 않다. 세상 속에서 타인의 시선, 사회적 통념, 문화, 제도에 복종하고 내 내면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아니 듣지도 못한다.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믿으며 의심도 안 하고 산다. 남을 따라잡지 못하고, 남들처럼 하지 못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게 불행의 시작이다. 내 행복을 갉아내고, 찌그러트리면서 불행의 영역을 넓혀진다. 내가 ‘학생 같은 백수’ 시절처럼 말이다.


 지금은 부모나 사회가 요구하는 그 틀 안에 나를 억지로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행복은 내 안에 항상 있다. 단지, 눈이 밖을 향하고 있으니, 나보다 타인을 관찰하는데 애쓰다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 시선을 안으로 돌리자, 자연스럽게 불행이 떠나가고 움츠려 있던 행복이 두 팔다리 활짝 펴고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내면에서 솟구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분출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나만의 방식대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남이 앞서 나가든 내가 뒤쳐지든 상관없다. 과정 자체가 즐겁고 만족스러우니 말이다.


 내게로 돌아오자, 행복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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