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몰랐던 그들의 편견_성장 환경
이민 1세대로서 운이 좋게도 동양 이민자들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미 서부 대도시들은 이민자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에 관심이 많다. 그 결과 부모들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의 의견도 어른들의 의견과 동일하게 존중 받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꼬맹이들과 매사에 설전을 벌여야 한다. 윽박지르는 어른들을 향해 느꼈던 억울함과 반발심을 생생히 기억하지만, 아직 논리에 일관성이 없는 만 5세 미만의 아이들을 매사에 설득해야 할 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남편과 미국에서 동양 아이를 키우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을 찾기 힘들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깨달은 사실은 내 아이가 유아원에서 유일한 순혈 동양인이라는 것이다. 무려 50명에 가까운 원생들 중에. 내가 이제껏 이 사실을 인지 못한 이유로는 인종차별이 없는 유아원 문화도 있었겠지만 동양계 엄마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큰 역할을 했다. 엄마들의 30%는 동양인이고 나머지는 백인. 아빠들은 80%는 백인, 내 남편을 제외한 다른 유색인종은 흑인. 세계적인 기업들이 포진해 있는 서부 도심 근처 주거지역에는 상대적으로 동양인의 비율이 높다. 인도인들까지 동양인으로 치는 미국식 집계에 의하면 고학력 직종에서는 동양인들이 미국의 전통적 주류인 백인보다 많은 곳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고학력으로 기존 인종차별을 뛰어넘은 것으로 간주되는 모범소수자(Model minority)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성별에 따른 육체적인 매력요인이 더해져 고학력 흑인 남자들은 동양 여자들과 함께 백인들과 결혼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다고 이곳의 주류가 동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도시에 비해 백인의 존재감이 다소 약할 뿐이지, 아직도 절대 다수이며, 특히 정계, 재계, 학계 할 것 없이 힘 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백인이거나 백인과 특별한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이민자가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진보적인 도시에서도 모범이민자가 아닌 보통이민자들의 영역은 다분히 제한적이다. 우선 본인의 인종 밖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경우가 모범이민자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 주거지역 역시 평범 이하의 소득수준의 경우 같은 인종/출신국들끼리만 모여 산다. 그 결과 미국에서 태어난 보통이민자들의 자녀들 중에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미국에 갓 이민온 모범이민자들보다 어휘력은 물론이고 발음도 더 외국인 같은 경우도 있다. 심지어 부모나 조부모가 이민 온 당시의 낡은 가치관을 물려받아 백인이나 연장자에 복종적인 자세를 취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 본인들이 성공해서 모범이민자가 되더라도 주류의 가치관은 장착하지 못한채 물에 뜬 기름처럼 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남편이 얼마나 백인 위주의 배타적 환경에서 자랐는지 느낀 일화가 몇 개 있다. 남편이 고등학교까지 다닌 동부 마을 놀이터에 아이를 데려간 날, 서부에서는 한 번도 못 한 불쾌한 경험을 했다. 백인 부모들이 아이가 내 아이 근처에 오는 것을 철저히 방해한 것이다. 무려 2017년에! 피차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자기들끼리만 인사를 하고 우리 가족 일체의 시선을 외면했다. 남편이 내가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말을 섞는 것을 신기해 한 이유가 비로서 이해가 가면서 남편의 어린시절에 느꼈을 상처가 그려졌다. 어린 시절에 인종차별에 노출되는 것은 무척 큰 상처이자 인생의 손해이다. 어른이 되어 같은 상황에 처하면 내가 그 놀이터에서 그랬듯 '어머 저런 미개한...애들이 불쌍하다.' 라며 무시하고 말 수 있는데 어린이들은 그런 감정 분리가 어렵다. 그래서 방어기재를 발동하게 되고 사회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내 남편은 아직도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경직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친한 친구들이 꽤 있지만 100% 순혈 동양계이다.
또 한 가지 일화는 남편이 어느 날 새로 생긴 점을 피부암으로 의심하고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것이다. 아직 노화현상에 무지했던 30대 초반 남편은 그 점이 고등학교 때 배운 피부암의 3가지 징후(갑자기 생긴,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돌출 형태의 점)에 부합한다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거 그냥 점이야. 동양인이 무슨 피부암을 걱정해. 시아버지가 점이 많으니 당신도 갈 수록 많아질거야. 걱정마."라고 말해줬건만 굳이 피부과 의사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거의 똑같은 말, '동양계 남성의 흔한 노화현상'이라는 진단을 듣고야 슬퍼하며 안심했다. 나는 분명 한국 고등학교에서 피부암은 백인들이 주의해야 할 병이라고 배웠고, 더불어 흑인들은 피부암이 입술에만 생긴다는 것도 배웠는데 정작 온갖 인종차별이 횡행한 다민종 지역 학교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다니 아이러니다.
주류로서 비주류를 존중하는 일은 어렵다. 공짜로 누릴 수 있는 주류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일상의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상대로도 참을 인자를 수 없이 써야할 노릇인데 알지도 못하는 남, 게다가 생존시장에서 나와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을 포용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인종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주류인 이 도시가 멋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도 이민자에게 모범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프레임을 적용한다는 사실에서는 자유롭지는 못하다. 심지어 이곳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들도 유색인종인 경우 1세대 백인 이민자들보다 더 이민자 대우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